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8월 24일 목요일[(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8. 24. 06:28

[매묵]2023년 8월 24일 목요일[(홍)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다.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소아시아를 거쳐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입당송

시편 96(95),2-3 참조
나날이 선포하여라,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오롯한 믿음으로 성자를 따르게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굳센 믿음을 주시어
그의 전구로
주님의 교회가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 초석들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21,9ㄴ-14
천사가 나에게 9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0-11.12-13ㄱㄴ.17-18(◎ 12 참조)
◎ 주님, 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49 참조
◎ 알렐루야.
○ 스승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알렐루야.

복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5-51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며 주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오니
그의 전구로 저희를 자애로이 도와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2,29-3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며
성체를 모시고 영원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현세에서 올바로 살아 미래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순교.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아이 때 이것만 하지 못하게 한다면 크면서 냉담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예수님께 이런 칭찬을 들은 사람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백성이란 뜻도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믿음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짓이 없는 사람만이 쉽게 믿을 수 있다고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유는 믿음의 에너지를 거짓말에 소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말은 바로 내 안의 뱀이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하느님처럼 만들어서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방식은 하와 자신이 주님이 되고 창조자가 되고 심판관이 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뱀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게 만들어서 하느님을 대체합니다. 믿을 필요가 없게 합니다. 

 

    피노키오를 생각해봅시다. 피노키오에게 늑대가 다가와 서커스에서 공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사실 구경거리가 되어 남에게 이용 당하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서커스를 위해 무대에 오르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제페토 아버지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가 필요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늑대의 역할이 우리 안의 자아입니다. 

 

    늑대는 또한 피노키오를 어른 놀이하는 섬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는 어른들처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파티를 즐깁니다. 스스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늑대에 속아서 아버지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되어가지 못하고 당나귀가 되어갑니다. 우리 안에서 자아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 정작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려는 하느님을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고 자신이 따먹어 주인님이 되고 육체적 욕망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하며 스스로 창조자가 되게 했고 하느님과 이웃을 판단하며 스스로 심판관이 되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러니 이미 창조자나 주님, 심판관이 있음을 믿을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입니다. 자아에게 속으면 그래서 하느님을 믿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뱀은 이 거짓말들에 지속적으로 속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게 한 것입니다. 그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는 한 자신 스스로 주님이 되고 창조자가 되고 심판자가 되려고 했던 잘못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해지면 어떨까요? 금방 자신이 주님일 수 없고 창조자일 수 없으며 심판관일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나의 것이라 우겨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내 사람이라고 해도 헤어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결국 우리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솔직해지면 자녀도 내 창조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눈도 다시 넣어줄 수 없고 생명도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해지면 누구도 나에게 재판관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판단을 참 심판관이신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듯 참 믿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 믿어지지 않느냐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뱀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마치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만 되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시험만 잘 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자라며 냉담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인 것 같습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3년은 제게 은총과 감사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성지순례 5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1 1일에는 신부님들과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매일 아침 주님의 무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제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간 것은 27년 만입니다. 주님의 세례 터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세례의 은총을 다시금 생각하였습니다. 1 17일에는 ME 부부들과 함께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평화신문 설립 35주년 기념으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다녀왔습니다. 광야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파스카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재앙이 지나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스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는 파스카입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바오로 사도처럼 삶의 방향이 변하는 것입니다.

 

5월에는 4년 전에 가기로 했던 그리스, 터키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으로 취소되었던 순례였습니다. 4년 동안 기다려준 분들과 함께 순례를 떠났습니다. 지난 2월에 터키에 강력한 지진이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취소한 팀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순례를 떠났습니다. 터키와 그리스를 순례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조가 생각났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유구한대 인걸은 간곳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흥망이 유수하니 망월대로 주초로다. 오백년 도읍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가는 나그네 눈물겨워 하노라.” 망해버린 고려를 그리워하며 슬픈 마음을 담은 시조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개척했던 초대교회는 무너져 돌덩어리만 남았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꽃이었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지순례는 화려한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 성지순례입니다. 6월에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교우들과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앞에는 예수님께서 오르셨던 계단 성당이 있습니다. 28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함께 무릎으로 계단을 올랐습니다.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계단은 재물, 성공, 권력으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의 계단은 희생, 나눔, 봉사를 통해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Logos)’  뮈토스(Mythos)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인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주인은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자비임을 맗해줍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 받게 된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온 일꾼들의 몸 고생과 나중에 온 사람들의 마음 고생도 함께 돌보십니다.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가난하고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 사랑의 우선적 선택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능력과 성과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 주시고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공정은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며, 당신의 호의와 자비는 부족함이 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공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이러한 포도원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정주 삶의 축복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

 

"내 영혼아 주님 찬양하라.

 주님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니,

 내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시편103,2.5)

 

쉴 사이 없이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참 부지런한 하느님입니다. 배밭사이 길을 걷다가 이마를 부딛쳤고 위를 쳐다 봤습니다. 흰별들처럼 주렁주렁 달린 흰 배봉지 열매들중 하나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동안 참 놀랍게 많이 컸습니다. 작은 배꼭지에 찰싹 붙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열매를 보며 믿음의 배꼭지를 연상했고 이 또한 저에겐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가을 열매 익어 수확할 때까지는 믿음의 배꼭지는 꼭 나무에 붙어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중심에 계신 정주의 하느님은 쉴 사이 없이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정주 삶의 축복에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이 참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하면 괴물이요 답이 없습니다. 현 시국을 대할 때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아침식사후 부지런히 불암산 계곡길을 걷는 것도 기쁨이요 얼마전 써놓고 재미있어 한 글을 나눕니다.

 

“산에 가고 싶을 때

 산을 바라보며

 산이 되네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가 되네

 

 강에 가고 싶을 때

 강물처럼 걸어서

 강이 되네

 

 누가 알리?

 이 행복, 정주의 축복

 아마 하느님은 아실 거다”

 

늘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에서 산이 되어, 바다가 되어, 강이 되어 살아가는 정주 삶의 축복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라는 글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 또한 정주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제 집무실을 수도생활 잘 하라고 하늘이 숨겨둔 천장암天藏庵이라, 또 제분수를 잘 알아 만족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족암知足庵이라 부르곤 합니다. 천장암은 불교의 대선사 경허스님이 머물던 충남 서산 개심사에 위친한 암자이고 지족암은 흔히 일컫는 암자 이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 삶의 신비를 엿볼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이나 오후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가 똑같은 급료를 받자 항의하는 일꾼,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하느님의 권리에 대한 도전이요 월권입니다. 제 분수를 잃은 무례하고 무지한 이의 반응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요즘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는 기본소득제도의 원조임을 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 일하고 싶어도 심신의 허약이나 장애나 연로함으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모두가 인간의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매달 국가가 전국민에게 기본적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실현될 때 복지국가의 완성이요 이런 방향으로 가리라 봅니다. 바로 이런 복지사회의 완전한 실현의 모델이 우리 요셉 수도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동체가 소임에 무관하게 모든 이가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너그럽게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깊은 배려의 사랑은 늦게 온 사람의 속사정을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식솔이 딸린 무거운 짐을 진 가장이라면 일 시간에 개의치 않고 기본적 하루 생활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를 겸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을 만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분수를 벗어난 무지한 이의 항의를 깨끗이 매듭짓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시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네가 뭔데?”, “너나 잘해!” 꾸짖는 말투처럼 들립니다. 네 분수를 알아 네 자리에서 네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완전 고용을 위해, 모든 이들의 완전 구원을 위해 흡사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끝까지 기다리는 주님을 연상케 하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에 충실하며 제대로 살았던 정주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나 이 짧은 생각의 사람은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판관기의 요탐의 우화가 깊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역시 악순환의 반복의 인간 역사를 보여줍니다. 어제 기드온 판관의 등장으로 좋았던 분위기가 아비멜렉 임금 독재자의 등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백성이 자초한 재앙으로 우리의 현실을 연상케 합니다. 

 

요탐의 우화에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로 상징되는 이들은 자기 분수를 알았기에 절대 임금이 됨을 사양합니다. 이래야 맞는 것입니다. 반면 가시나무로 상징되는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례한 대책 불가능한 아비멜렉은 제자리를, 제역할을, 긍극적으로 자기를 몰랐습니다. 절대로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살았어야 할 백해무익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비멜렉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선택으로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참 유익한 공부가 되는 예화입니다. 제발 이런 악순환의 반복은, 이런 공부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포학하고 무지한 지도자 잘못 뽑으면 "판도라의 상자(판도라가 열지 말라는 뚜껑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재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의 상자)"가 열리듯 지옥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배도 바다의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중이 바다라면 지도자는 일엽편주(一葉片舟) 배와 같습니다. 민중의 바다가 노호하여 태풍처럼 휩쓸면 배는 흔적없이 사라짐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참된 지도자라면 겸손히 공동체의 의견을 경청하여 공동체의 뜻에 따라, 민심에 따라 자비롭게, 지혜롭게 공동체를, 공동체의 성원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분수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 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8/24(목)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되새김구절]

 

1. 솔직해지면 누구도 나에게 재판관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판단을 참 심판관이신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2.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조재형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자비와 지혜를 겸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을 만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분수를 벗어난 무지한 이의 항의를 깨끗이 매듭짓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시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이수철 신부)


 
 

[8/24(목)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 243 기도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예수님을 만나보고 즉각 신앙고백을 한 바르톨로메오 사도처럼...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 예수님을 만남에 감사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게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24일(목) 6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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