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6월 27일 금요일[(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6월 27일 금요일[(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사제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찾고자 애쓰시는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입당송
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시네.
<대영광송>
본기도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언제나 가득히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
저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신 아드님의 성심을 보시고
저희에게 무한한 사랑을 인자로이 베푸시니
저희가 그 성심을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며
마땅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4,11-16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3 그들을 민족들에게서 데려 내오고 여러 나라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의 산과 시냇가에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풀밭에서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그곳 좋은 목장에서 누워 쉬고,
이스라엘 산악 지방의 기름진 풀밭에서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5ㄴ-11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3-7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3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예물기도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무한한 사랑의 성심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속죄의 제사로 받아 주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또는>
요한 19,34 참조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큰 사랑의 성사로 저희에게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저희가 언제나 성자를 사랑하며
형제들 가운데서 그분을 알아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특별히 이날은 저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25년 전, 저는 경기 북부 지역에 있는 ‘적성 성당’에서 본당 신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구장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제 성화의 날 체험 발표를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제게는 체험이라 할 만큼의 경륜도 없고, 사제들 앞에서 드러낼 만큼 영성이 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제안을 받고는, ‘그냥 내가 살아온 사제 생활을 나누는 거다’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발표 주제는 “사목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저의 나눔은 교구의 사목 국장 신부님이 알게 되었고, 저는 교구청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뒤로 교구 사목국에서 3년간 교육 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정리했던 사목에 관한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첫째, 사목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성아, 산보 갈래?’ 했더니, 진성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따라나섭니다. 큰길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고, 시장까지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성이가 묻더군요. “그런데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아마도 산보가 어딘가에 있는 장소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도 문득 하느님께 자주 되물었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 뜻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고, 이미 다 알려주셨는데 말입니다. 사목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둘째, 사목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해인사 청동 대불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을 때, 한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비는 옳고 그름을 다툼으로써는 풀 수 없습니다. 시비를 함께 놓아버릴 때 끝이 납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원망은 원망으로 갚으면 해결되지 않고, 오직 참음으로써 해결된다.” 사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져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론 품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묵묵히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습니다. 사목은 결국 사랑이며, 보시(普施)이며, 용서(容恕)입니다.
셋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 후 사제관으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건회와 진성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는 겁니다. 성당 버스를 놓친 두 아이는 장현리에서부터 무려 3시간 반을 뛰어왔답니다. 그 길은 차로도 15분은 걸립니다.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찡했습니다. 저 아이들이 오늘 제게 성지 주일의 진짜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목은 한 번의 만남, 한 번의 교리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모를 심는 일처럼, 끈기와 인내로 계속 관심 두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목입니다.
넷째, 사목은 습관입니다.
사람은 이성으로 문명을 만들고, 감성으로 예술을 꽃피우고, 오성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직관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건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은 타고난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사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한 신학 지식, 특별한 능력만으로는 사제다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는 습관, 교우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습관,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 습관 같은 것들이 사제를 사제답게 만듭니다.
1995년부터 한국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거룩한 삶을 다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고, 교우 여러분이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심의 주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사제들도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모든 사제가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더 좋은 사목자, 더 따뜻한 사제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에제키엘 34,11-16 로마 5,5ㄴ-11 루카 15,3-7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되찾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한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주로 유목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땅은 목초지가 별로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평지가 아닌 가파른 벼랑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였습니다.
문제는 이 양이 시력이 지나치게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양의 시력은 –0.7에서 -1.0 정도로 추정 되는데, 즉 양들은 전방 1미터 앞의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청각을 사용해 떼를 지어 움직이는데,
목자가 지팡이에 종을 매달고 양들을 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양이 풀에 정신이 팔려 대열을 이탈하면,
평지와 벼랑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절벽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기 쉽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을 잃어버리게 되면 목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양의 발자국을 추적함으로써, 방황하는 양을 언덕과 계곡을 넘어서라도
기어이 찾아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양이 죽었다면 양털을 가져다가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죽음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반면, 어디선가 살아있는 양을 발견하면 그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길을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시며 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시는 분,
당황한 우리들을 달래시며 당신의 길로 이끌고자 애쓰시는 분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다시금 주님을 찾게 되거든
두 팔을 크게 벌려 환영해 주시는 분,
기쁨의 잔치를 열만큼 행복해 하시는 분입니다.
반면 우리의 모습은 양떼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들은 일상 생활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게 구분할 수 없고,
사소한 죄와 실수들 안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들이 청각을 사용하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음성에 의지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금방 대열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에게 오늘 제1독서의 하느님의 말씀은 커다란 힘을 줍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늘의 제 2독서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인간의 회개를 위한 것이었음을 천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종종 하느님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인해 너무 고생했어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인류를 구원했습니다”라고 자랑할 법도 하지만,
실제로는 오늘의 복음에서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한 목자의 말을
그대로 하느님께 했을 것 같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오늘의 이 복음을 기억하며 혹시 지금의 나 자신은 번번이 길 잃은 양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더불어 지금도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사랑을
모쪼록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의 18장 14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을 더욱 깊이 전달해 줍니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루카 15,3-7
거룩한 마음이란 남편의 마음을 자녀가 느끼게 하려는 아내의 마음이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마음, 성심(聖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을 ‘자비로운 마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사랑의 마음’ 등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예수 성심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 성심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이 공유하게 하려는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정의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혜롭고 사랑이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신만 사랑하고 따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고,
아버지를 존경하며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은 온 가족이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 증거입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의 기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외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6)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하자”고 청할까요?
혼자 기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 성심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느끼는 기쁨은, 근본적으로 양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하늘이 기뻐하기에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동화 ‘라푼젤(Tangled)’에서 라푼젤은 본래 샐러드용 채소의 이름입니다. 라푼젤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때
마녀의 정원에 자라는 '라푼젤'이라는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병이 날 지경에 이릅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마녀의 정원에 들어가 이 채소를 훔쳐오고, 결국 태어날 아이를
마녀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채소를 얻게 됩니다. 마녀는 이렇게 얻은 아이에게 그 채소의 이름을 따
'라푼젤'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라푼젤을 향한 마녀의 사랑은 겉보기에 완벽합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엄마가 제일 잘 알지. 바깥세상은 무섭고 위험하단다.
엄마 품이 가장 안전해.” 그녀는 라푼젤의 진짜 부모에게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녀를 진실로부터 격리하고
‘아버지 없는 고아’로 만드는 가장 이기적이고 무서운 사랑입니다.
성경에도 이 ‘고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입니다(루카 15,25-32 참조).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지만,
큰아들은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너희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혀 다른 마음을 만나봅시다.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나오는 네 자매의 어머니,
‘마미(Marmee)’입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마미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지를 딸들에게 읽어주며 그의 사랑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딸들이 선행을 베풀 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격려하며 모든 행동의 기준을 아버지의 마음에 둡니다.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은 딸들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 ‘마미’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심의 모상입니다. 성경에서 이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그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군중을 보며 시기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한다.”(요한 3,29-30) 그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다리’의 완성이십니다. 그분은 공생활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찾기 때문이다.”(요한 5,3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 모든 말씀은 우리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끌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나의 봉사는 과연
‘라푼젤’의 마녀를 닮았습니까, 아니면 ‘작은 아씨들’의 마미를 닮았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듯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의지하고 좋아하게 만들려는
이기적인 마음은 없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마미’와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을 주시고자 합니다.
내가 죽고 나보다 높은 이의 마음을 자녀들이 가지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당의 냉담 교우 한 사람이 다시 성사 생활을 시작할 때, 죄의 길에서 방황하던 한 영혼이
고해소 문을 두드릴 때, 바로 그때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순간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할 순간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6.26.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창세16,1-12.15-16 마태7,21-29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읍시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06,1ㄴㄷ)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 5장부터 계속된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되는 마지막 7장 끝부분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처럼 반석위에 집을 지을 것인가 또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모래위의 집을 것인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집 짓기는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평생과정임을 봅니다.
저의 평생 하루하루 매일 강론 역시 평생 예수님 반석위에 집짓는 마음으로 씁니다.
과연 지금 내 인생집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늘 점검해 봐야 하겠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미사전례 시간은 내 인생집이 예수님 반석위에 잘 지어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잘 들여다 보면 산상설교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야 말로 바로 반석위 인생집 짓기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도들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모든 성인들 역시 성공적으로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은 분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데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구체적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시종여일 말씀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같은 삶이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의 비유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수도원, 교회, 국가든
모든 공동체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재직동안 12년 동안 거의 매일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삶과 동향을,
그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이어 지금 저는 레오 14세 교황의 매일의 행보를 보고 배웁니다.
말 그대로 한결같이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다가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요 뒤를 잇는
267대 레오14세 교황 역시 정중동의 행보중에 ‘경청과 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교회 일치와 화해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레오14세 교황 역시 지금까지 평생 반석위에 인생집을 잘 지어오셨고 여전히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계속 잘 짓고 계십니다.
레오14세 교황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참으로 슬기로운 예수님 정통파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 새벽 읽은 레오 교황의 말씀중 몇 대목입니다.
“네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켜라.”(Keep your eyes on Jesus)
“사제생활에 열정적이 되라.”(Be passionate about priesyly life)
교황청을 방문한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갑시다. 우리의 희망! 그분은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
(Let’s go to Jesus, our hope! He can heal us!“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한 대목입니다.
중앙아시아(Middle East) 신자들에게는 “온교회가 너희와 함께 있다” 격려하였고,
방문한 주교들에게는 “친교의 사람들이 되라”(to be men of communion)고 호소하였습니다.
옛 현자도 인생집을 짓는데 한곁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갈길이 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다산>
“짐은 무겁고 길이 멀기에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된다.”<논어>
우보천리의 자세로 평생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지어야 함을 배웁니다.
삶은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인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완성을 향해 지어가는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반석위에 지어지는 인생집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도외시 하고 제 좋을 대로 살아 온 이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참 냉혹하지만
우리의 무지와 태만에 죽비같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주님 반석위에 인생집은 평범한 일상 모두를 통해 이뤄집니다.
창세기의 아브람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사가 참 복잡합니다.
사라이의 호의로 아브람이 그의 몸종 하가르를 통해 이스마엘 아기를 갖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정은 큰 분란을 겪지만 하느님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 하가르외 이스마엘을 돌봄으로 아브람은 위기를 벗어납니다.
아브람의 부족을 보완해 주면서 그가 인생집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되시니 말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져야 반석위의 인생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 온 아브람이기에 주님은 그의 일시적 부족을 보완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온 슬기로운 이들과 실행하지 않은 어리석은 이들의 결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는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모래위에 인생집을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집짓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방법이자 비결은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면서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평생 반석위에 인생집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공정하게 사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시편106,3).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6/27(금)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되새김 구절
1. 1995년부터 한국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거룩한 삶을 다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고, 교우 여러분이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심의 주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사제들도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모든 사제가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더 좋은 사목자, 더 따뜻한 사제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길을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시며 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시는 분,
당황한 우리들을 달래시며 당신의 길로 이끌고자 애쓰시는 분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다시금 주님을 찾게 되거든
두 팔을 크게 벌려 환영해 주시는 분,
기쁨의 잔치를 열만큼 행복해 하시는 분입니다.(방종우 신부)
3. 우리 본당의 냉담 교우 한 사람이 다시 성사 생활을 시작할 때, 죄의 길에서 방황하던 한 영혼이
고해소 문을 두드릴 때, 바로 그때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순간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할 순간입니다.
(전삼용 신부)
4. 과연 우리는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모래위에 인생집을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집짓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방법이자 비결은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면서 예수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6/27(금)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오늘의 기도
복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오늘은 사제들이 거룩한 삶을 다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고,
교우 여러분이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심의 주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사제들도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모든 사제가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아멘.
- 2025년 6월27일(금) 7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