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집안의 가장 미켈란젤로…경제적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켜♥ 쉼터 ♧
[양정무 교수의 Money&Art](22) 몰락한 집안의 가장 미켈란젤로…경제적 고난 예술로 승화시켜
미술 작품 감상에는 두 개의 역사가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보고 나기 전과 그 후가 바로 그것이다. 다소 과장일 수 있겠지만 분명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그림 ➊, ➌)를 한번 보고 나면 미술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림은 스케일부터 남다르다. 폭 14m, 길이 41m에 천장 벽면 넓이는 500㎡, 주변부까지 합치면 1000㎡ 에 달하는 상상 초월의 초대형 그림이다. 이 거대한 화폭에 미켈란젤로는 수백 명의 군상을 웅장하게 펼쳐 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림들은 우리 눈에서 20m 이상 떨어진 천장에 자리하고 있다. 거의 바닥으로부터 7층 정도 떨어진 곳을 한없이 올려다봐야 하는 셈. 잠시 쳐다만 봐도 목이 뻐근할 정도인데 이런 곳에 매달려 4년 동안이나 작업한 미켈란젤로의 집념과 투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시스티나 벽화, 미술 작품 감상 기준 바꿀 만한 대작
이렇게 엄청난 미술 작품을 탄생시킬 때 미켈란젤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작업대에 올랐을까? 그림만 놓고 보면 미켈란젤로는 일상적 삶에서도 대단히 고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학자풍의 인물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막상 그의 개인사를 추적하다 보면 대단히 당혹스럽고 모순적인 개성을 만나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미학을 말할 때 ‘공포감을 줄 정도의 극한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테리빌리타(terribilita)’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이 용어는 그의 괴팍한 성격을 지칭하는 데에도 아주 꼭 맞아떨어진다. 그야말로 그는 ‘난폭한(terrible)’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의 다혈질적 성격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작업할 때에도 수시로 폭발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미켈란젤로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코가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➋). 미켈란젤로는 재능만큼 잘난 척도 잘했는데 이 때문에 선배 화가한테 얻어맞아 콧등이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의 별 볼 일 없는 외모는 이로써 더 추해지게 됐고, 그렇지 않아도 외톨이 같았던 성격은 더 심하게 고립됐다. 한편 천재들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는 우울증이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했으며 항상 사람들이 자신을 질투하고 모함한다는 피해망상증도 갖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화를 내거나 흥분하면 거의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는데 심지어 교황 앞에서 거들먹거리다 얻어맞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올 정도다. 시스티나 천장벽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일을 재촉하는 말을 하자 미켈란젤로는 사과는커녕 도리어 “끝날 때 끝나겠지요” 하며 성의 없이 대꾸해 교황을 격분시켰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만큼 다혈질이었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지팡이로 미켈란젤로의 머리를 내리쳤다. 당시 교황은 황제보다 더 높은 존재인데 그 앞에서 호기를 부린 미켈란젤로의 배짱이 어이없을 정도로 당차 보인다. 미켈란젤로의 남다른 자존심에는 그의 출신 배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피렌체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비록 몰락했지만 귀족이었다. 원래 가업은 은행업이었지만 그가 태어나던 당시 별로 사업이 신통치 못해 아버지는 가업을 접고 공직으로 자리를 옮겨 시골 면장 정도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이런 출신 배경은 당시 미술 작가들의 출신 배경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높은 편이었다. 미켈란젤로도 이 점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작품 속에 ‘부오나로티(Buonarroti)’라는 자신의 성을 꼭 새겨 넣었다. 미켈란젤로의 집안은 그에게 자부심을 줬지만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완전히 골칫거리였다. 미켈란젤로는 식구들의 돈 문제로 항상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5형제 중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미켈란젤로가 평생토록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금전적으로 시달렸음을 상기하면, 미켈란젤로가 왜 그렇게 고객들과 돈 문제로 자주 다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돈 계산을 할 때 그는 아주 철두철미한 사업가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을 거래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약속한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시스티나 천장화를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짐을 싸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했다. 그가 교황에게 얻어맞고 피렌체로 돌아갔을 때에도 교황은 금화 500두카토를 보내 그의 마음을 겨우 되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림을 그린 것이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교황의 예배당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화가로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회인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터. 그러나 당시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미켈란젤로는 분명 이 시기 가족들과의 돈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금전적인 어려움도 그가 작업대에 오르게 된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가문의 영광 되찾으려 그림 그린다” 시스티나 벽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던 1508년 7월 미켈란젤로는 동생에게 분노의 편지를 보낸다. 동생이 임대사업을 하다 망한 후 아버지를 금전적으로 괴롭힌다는 소식을 접한 미켈란젤로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자기 동생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부른다. 그는 “당장 달려가 다리를 분지르고 싶지만 지금 하는 일 때문에 참는다”고 쓰면서 “내가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푸념한다. 그는 거듭해서 “나는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온갖 괄시와 어려움을 참아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적었다. 시스티나 천장의 광활한 벽면 아래에 서서 미켈란젤로는 엄청난 예술적 도전정신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한 귀퉁이에는 분명 성공과 금전적 욕심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스티나 벽화를 한없이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런 세속적 열망도 최종적으로는 그의 예술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집안 문제로 골머리를 썩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고상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코믹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보면 이것이 보다 진실한 예술가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예술가들은 이런 일상적 번민을 예술로 승화하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주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감동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철학박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82호(12.11.14~11.20 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의정 주변 풍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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