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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오피니언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2>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①~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2>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①

[중앙일보]입력 2009.04.21 02:35 / 수정 2009.04.22 17:02

공자님만 알았던 세 살의 의미

“우리 아기 몇 살?” 엄마가 물으면 아기는 어렵게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세~살”이라고 말한다. 그냥 재롱으로 보이지만 실은 한국인이 되는 첫 관문의 시험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한국의 속담을 봐도 세 살은 인생의 시작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하필 세 살인가? 그 비밀은 공자님만이 아신다. 『논어』 양화편에는 공자님이 제자인 재아(宰我)로부터 질문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마디로 부모님의 삼년상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군자도 삼년상을 지내다 보면 일반 예법을 잊게 되고 음악 연주자도 삼년상을 치르고 나면 몸에 밴 음악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 년이면 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공자님의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어린애는 세상에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겨우 부모의 품속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부모가 돌아가시면 이번에는 삼 년 동안 자신이 그 곁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재아인들 삼 년 동안 부모 품에 안겨 자라지 않았겠는가.

부모의 삼년상을 인륜적 시각에서라기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벌판을 뛰어다니는 망아지도 있고, 알에서 깨어 나오기 무섭게 하늘로 곧장 날아오르는 앨버트로스 같은 새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달리 삼 년 동안 한순간도 부모의 도움 없이는 우는 것 말고는 고개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존재다. 속수무책 벌거숭이 미숙아로 이 세상에 떨어진 결함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라는 아르놀트 겔렌의 말이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2000년도 훨씬 이전, 삼년상의 쟁점이 바로 오늘의 삼세아(三歲兒) 교육의 이슈로 직결하게 된다.

그렇다고 세계의 모든 아이가 삼 년 동안 부모의 사랑 밑에 자라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는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도시대 때의 일본 어머니들은 가정형편이 곤궁하면 낳은 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을 아이를 신에게 되돌려 준다는 뜻으로 ‘고가에시(子返し)’라고 불렀고 푸성귀를 솎아낸다는 뜻으로 ‘마비키(間引き)’라고도 했다. 위험한 낙태보다는 낳아서 죽이는 편이 안전하다 하여 고가에시를 하는 비정한 어머니들도 있었다. 어미가 애를 목 졸라 죽이는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신사(神社)의 에마 그림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수전 핸리의 연구에 의하면 에도시대의 일본 농가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아이를 죽일 만큼은 곤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합리적인 가족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약간의 종교적인 뜻도 작용한 것 같다. 에도시대의 문화 감각으로는 애는 신이 내려보낸 것으로 일곱 살까지는 자기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식구가 늘어나면 동리 사람의 압력도 작용하여 고가에시는 사회풍습의 하나로 퍼지게 되었다. 유교가 들어오고 막부의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말이다.

하기야 위대한 로마시민들도 그랬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전쟁터의 병사 하나가 남자애를 낳으면 훌륭하게 잘 기르고 여자애면 소쿠리에 담아 강물에 띄우라고 한 편지가 발견돼 당시의 자녀관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설사 죽이지 않는다 해도 옛날 미국인들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엥겔스의 이야기로는 서구에서 가족을 뜻하는 패밀리아는 원래 로마에서는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앞으로 수도 없이 듣게 될 테니까 여기에서는 그저 주걱으로 뺨을 때려도 밥풀을 떼어 먹을 수 있어 행복해했던 흥부네 식구가 모두 몇 명이 되었는지 맞혀보는 것으로 끝내기로 하자.

정답은 열두 명. 그렇게 많은 애들을 푸성귀처럼 솎아내는 마비키나 잘못 배달된 물건을 반송하듯 고가에시를 하지 않고 “너 몇 살” “나 세~살” 재미있게 재롱 떨며 사람으로 키운 흥부의 이름을 잘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것이 저출산 시대에 더욱 그리워지는 우리 한국의 아버지요, 어머니의 옛 얼굴이었으니까. 혼자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밑에서 3년은 보호받아야 인간이 되는 이 늦깎이 생물은 이천수백 년 전 공자의 시대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공자처럼 삼년상을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변화요 진화라고 부르는 인간 문명의 역사라는 거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3>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②

[중앙일보]입력 2009.04.22 02:17 / 수정 2009.04.24 10:15

모든 것은 셋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렸을 때 읽은 르나르의 『박물지』생각이 난다. 그중에서도 “3333333---개미의 무한한 행렬”이라는 글이 기억에 생생하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3을 왼쪽으로 눕혀 놓고 보면 허리가 잘록한 영락없는 개미다. 시대가 변해서인지 요즘 아이들은 3자를 오른쪽 방향으로 돌려서 본다. 그래서 1자는 깃대고 2는 물 위에 떠있는 우아한 백조인데 3만은 발가벗은 엉덩이의 두 볼기 모양이 되어 이미지가 좋지 않다.

하지만 한자로 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 천(川)자밖에 모르던 시골 농부가 편지글을 읽을 줄 몰라 애를 쓰다가 三이라는 날짜를 발견하고는 “川자가 여기에 누워 있는 걸 몰랐구나”라고 한 서당 아이들의 유머, 한자의 三자는 어느 방향으로 돌려놓든지 냇물이 되어 백조쯤은 거뜬히 띄울 수 있다.

그렇지. 한국인이 좋아하는 수는 정말 3이 아니라 옛 시절대로 三이라고 써야 어울린다. 돈이나 물건을 세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것은 “세 살!”이라고 나이를 세는 귀여운 우리 아기의 손가락처럼 신성한 상형문자다. 그래서 우리는 만세를 불러도 삼창(三唱)이고 노래를 불러도 삼박자다(일본은 이박자다). 그리고 일본 씨름 스모는 단판 시합인데 한국의 씨름은 삼세판이다.

우리가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에 태어나게 된 것도 삼신할머니 덕분인데, 이때의 삼신(三神)은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를 어우른다. 어느 종교와 관계없이 그 중심에는 하늘· 땅·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삼재(三才) 사상이 있다. 그래서 한국의 국기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지만 일상생활 속의 부채에는 삼태극 모양이 그려진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서울올림픽 엠블럼도 삼태극이 아닌가. 서양에서 기독교가 들어와도 낯설지가 않다. 삼위일체의 그 교리는 우리가 먼저 안다.

이 삼자를 한창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신화와 만난다. 그 고기(古記)에서 삼자들을 뽑아 나열하면 하늘에서 내려보낸 삼위태백(三危太白), 천부인 세 개, 환웅이 거느리고 내려온 삼천 명의 무리, 그리고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隕붊)…끝없는 삼 자 행렬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중요한 것은 쑥과 마늘을 먹고 기(忌)한 끝에 삼칠(三七)일 만에 인간이 된 웅녀의 이야기이다. 삼칠일이란 3에 7을 곱한 수로 21일이라는 뜻이다. 시간도 삼을 단위로 쪼개어 기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산모들은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치고 삼칠일을 기한다.

그러고 보면 웅녀 이야기는 신화라기보다 핏덩어리로 태어난 한 생명체가 어떻게 사람이 되고 한국인이 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실험보고서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날것을 생(生)이라고도 한다. 흙에서 막 뽑은 무를 ‘생무’라고 하고, 익히지 않은 쌀을 ‘생쌀’이라고 한다. 그런 말투가 남아서 “생쑈”라는 점잖지 않은 말까지 나왔다. 그러기 때문에 곰과 같은 생물(生物)을 순수한 우리말로 옮기면 날(生) 것(物)이 된다. 이 날것이 김장독 같은 동굴 속에서 발효돼 잘 익어야 비로소 맛이 든다. 그러면 생자에 사람 ‘인’자가 붙어 인생(人生)이 되는 것이다.

곰이 사람이 되듯 세 살이 지나면 아이는 생물의 상태에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곰이 기하는 것같이 스스로 자신을 억제하고 다스리는 ‘버릇’을 통해 한국인이 되어간다. 생각해보면 버릇처럼 양의성을 가진 말도 드물다. “버릇을 고친다”고 할 때의 그 ‘버릇’은 나쁜 습관을 뜻하는 것이고 “버릇없다”고 할 때의 ‘버릇’은 예의범절처럼 좋은 의미다. 좋은 버릇, 이상한 버릇, 못된 버릇, 버릇은 자기도 모르게 문화유전자 밈으로 몸에 배어 있다가 남에게도 전파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 살의 냇물을 건너 하나의 인간이, 한국인이 되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삼자와 같은 무수한 문화유전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 살 때 버릇을 잘 익히지 않으면 생떼를 부리는 한국인 (용서하라 한 번만 막말을 쓰겠다), “생쑈”를 부리는 오늘의 비한국인이 생기게 되는 거다.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4>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③

[중앙일보]입력 2009.04.23 03:09 / 수정 2009.05.04 10:40

유아 언어 속에 담긴 힘

 “전쟁 후 끼니를 거르며 살던 때였지요. 하루는 아이가 ‘환한 밥! 환한 밥!’ 하면서 우는 거예요. 제 처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쌀밥이 먹고 싶다는 거래요. 아직 말을 잘 몰라서 꽁보리밥을 깜깜한 밥, 흰 쌀밥을 환한 밥이라고 했던 거죠.” 그러고는 안경을 벗어 눈물을 닦더니 그 기업인은 말을 이었다. “아이가 병으로 죽고 난 뒤늦게서야 형편이 피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면 뭘 합니까. 쌀밥이란 말도 모르고 죽은 애에게 돈을 얼마를 벌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한 맺힌 가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그런데도 한 기업인의 말에 눈시울을 적셨던 것은 쌀밥을 ‘환한 밥’이라고 했다는 그 대목에서였다. 쌀밥과 보리밥을 빛과 어둠으로 비유한 천재적인 유아언어(幼兒言語)에서 나는 어느 명시 못지않은 진한 감동을 받았다. 시인이란 커서도 세 살 때 말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아언어의 소구력이 얼마나 큰지는 오바마의 선거전에서도 나타난다. 오바마란 이름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매케인처럼 까다롭지가 않아 젖먹이 애들도 따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이용해 오바마라고 말하는 젖먹이 애들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 것이다. 귀엽고 신기한 장면은 호기심을 유발하여 하루에도 비슷한 동영상이 수백 건씩 늘어나고 내려받기 수는 기하급수로 폭발해 쓰나미 효과를 일으켰다.

유아어의 특성은 오바마의 이름처럼 단순한 모음, 그리고 구순음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 나라마다 언어가 다른데도 엄마·아빠의 어린이 말은 에스페란토와도 같다. 우리의 ‘엄마’와 ‘맘마’는 세계 어디에서나 번역할 필요 없이 ‘마마’ ‘마미’ ‘마망’으로 통한다. 거의 모두가 ‘M’ 계열의 부드러운 구순음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P’ 계열의 강한 파열음으로 인도유러피아의 조어(祖語)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아파(appa)’다. 거기에서 영어의 ‘파더’, 독일어의 ‘파데르’, 프랑스어의 ‘페르’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유아어란 의미 이전에 소리만으로 어느 대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일종의 태생적 배꼽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배꼽 친구처럼 그것이 커서도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 ‘오노마토피어’라고 하는 의성어다. 언어학자들은 이 의성어가 가장 발달한 말로 한국어를 꼽고 있다. 일본 학습원대학의 시타미야(下宮忠雄) 교수가 조사한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각국어로 번역한 것을 비교해 보면 의성어가 영어 역에서는 6개, 독일어에는 7개, 프랑스어는 3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에는 무려 34개나 등장한다. 실제 조사 자료는 없지만 우리가 일본보다 의성어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일본어로 코고는 소리는 “스야스야” 정도지만 한국어로는 “색색”과 “콜콜”, 어른이면 “쿨쿨”과 “드렁드렁”, 그것도 모자라면 “드르렁 드르렁”이다.

한국의 의성·의태어는 반드시 ‘ㅗ’ ‘ㅏ’ 양모음과 ‘ㅓ’ ‘ㅜ’의 음모음이 짝을 이루는 모음조화의 법칙으로 구성된다. 가령 쌀밥과 보리밥을 빛으로 나타낼 경우 쌀밥에 보리가 조금 섞이면 ‘환한 밥’은 ‘훤한 밥’이 되고 꽁보리밥에 흰쌀이 들어가면 ‘깜깜한 밥’은 ‘껌껌한 밥’이 된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깃발은 팔랑팔랑 휘날리고, 설렁설렁 불면 그것은 펄럭펄럭 나부낀다. 그래서 수돗물이 나오다 끊어지는 물줄기를 6단계로 표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는 없을 것이다. 콸콸 흐르던 물이 좔좔로, 좔좔에서 줄줄로, 줄줄에서 졸졸로 물줄기가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가 ‘ㄹ’ 받침이 ‘ㄱ’으로 바뀌어 조록조록이 되면 물줄기가 끊어지기 시작하고, 조로록 조로록으로 변하면 수돗물은 곧 끊길 것이다. 모음조화만이 아니라 자음조화까지 거들어 흐르는 물에는 ‘ㄹ’이 붙고, 막히고 끊기는 것엔 ‘ㄱ’ ‘ㄲ’의 폐색음이 따른다. 힘을 줘야 나오는 대변은 “끙가”인데 어른이 되어도 힘주어 일할 때에는 “끙끙거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의 성공법칙으로 꿈, 깡, 꾀, 끼, 꼴, 끈의 쌍기역 시리즈는 모두가 끙가의 배꼽 친구였던가 보다.

깜깜한 보리밥을 먹던 한국인들이 환한 쌀밥을 먹게 되고 앞이 깜깜하던 날들이 점점 훤하게 밝아지며 환한 날을 맞게 된다. 그 다이내믹 코리아의 원천적인 힘이 바로 그 세 살 때 배꼽말 속에 있었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5>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④

[중앙일보]입력 2009.04.24 02:17 / 수정 2009.05.04 10:07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이비인후(耳鼻咽喉)과 병원에 가서 “이가 아파서 왔는데요”라고 말해 보라. 간호사는 틀림없이 “여기 치과 아녜요”라고 할 것이다. 간판에는 귀를 이(耳)라고 써놓았는데 말이다. 역시 안과(眼科)에 가서 “안(眼)이 거북해서 왔다”고 하면 내과로 가라고 할 것이고 “목(目)이 아파서 왔다”고 하면 인후과로 가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한자말을 그렇게 많이 써왔는데도 역시 한국인은 세 살 때 배운 한국말로 해야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어의 반 이상(55.31%)이 한자말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사용 빈도가 높은 백 개의 말 가운데 한자어는 고작 16개밖에 안 된다는 통계다. 내 몸부터 살펴보라. 눈·코·입·귀·목·손·발·배 등 모두가 단음절로 된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이다. 한자 바이러스를 막는 면역체가 내 몸 안에 있었다는 증거다.

같은 한자문화권인데도 일본 사람들은 동해(도우카이)를 통째로 한자말에 넘겨주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말끝에 끝내 토박이말을 붙여 ‘동해바다’라고 불렀다. 한두 개라면 틀린 말이라고 하겠지만 초가집, 처갓집, 역전앞, 황토흙, 거기에 일본말에서 온 ‘모찌떡’, 영어의 ‘빵떡’에 ‘라인 선상’의 영한(英漢)까지 겹친 말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천지인 삼재(三才)처럼 인체어도 ‘머리’ ‘허리’ ‘다리’의 ‘리’자 돌림의 삼원구조로 되어 있고 머리에서 갈라진 머리카락, 손에서 갈라진 손가락, 그리고 발에서 갈라진 발가락의 파생어까지도 절묘한 삼분구조다. 제각기 따로 노는 영어의 ‘헤어’ ‘핑거’ ‘토우’와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세 살 때 몸에 밴 토박이말들은 배꼽 힘이 들어 있어 강하다. 최근 발견된 정조대왕의 어찰에서도 ‘뒤죽박죽’이란 말만은 한글로 적혀 있지 않던가. 김삿갓 역시 물속에서 노는 고기 떼들을 어쩌지 못하고 ‘수물수물’이라는 토박이 의태어를 한자음을 빌려 ‘水物水物’이라고 묘사했다.

동양에서는 음양사상이, 서양(희랍)에서는 수성설(水成說)과 화성설(火成說-탈레스와 엠페도클레스가 두 원류다)이 ‘물’과 ‘불’로 철학의 기간을 삼아 왔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한국말의 ‘물’과 ‘불’처럼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앞 글에서 설명한 대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서구의 ‘파파와 마마’의 유아 언어처럼 한국어의 물과 불은 선명한 M(ㅁ)/ P(ㅂ) 대응의 짝을 이루고 있다. 아버지는 불이고 어머니는 물이다. 그리고 물은 맑다고 하고 불은 밝다고 한다. 글자 모양까지 대비를 이루어 물에 뿔 난 것이 불이다. 그 자리에서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물불은 절묘한 세트로 접합돼 있다.

한국말처럼 음과 양의 모음조화로 이룬 의성어 체계, 머리·허리·다리처럼 삼분관계로 구조화한 신체어, 거기에 물불처럼 선명한 이항관계를 나타낸 말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물과 불은 분명히 상극한다. 물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 물은 하강하고 불은 거꾸로 상승한다. 그런데 물의 영혼은 반대로 김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고 불의 영혼은 재가 되어 거꾸로 땅속에 묻힌다. 그런데 이렇게 대립하고 갈등하던 물불이 조왕님이 계신 부엌에 들어오면 놀라운 조화의 힘으로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인다.

불과 물이 같이 있으면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일방적인 믿음 때문에 지구 온난화의 재앙을 일으킨 것과는 다른 현상이 벌어진다. 상극은 상생으로 변해 날것도 아니요 탄 것도 아닌 맛있는 문명의 밥상이 차려진다.

한마디로 세 살 버릇은 물불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철이 들지 못한 사람을 일러 “물불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30년 전에는 물불 모르는 사회주의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붕괴하는 것을 보았고 오늘날에는 과욕과 탐욕의 물불 모르는 자본주의가 리먼브러더스와 함께 물벼락을 맞는 광경을 보았다. 겸허한 마음으로 백두산에 올라 외쳐라. 한민족을 향해, 세계를 향해서 크게 외쳐라.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이어령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6>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⑤

[중앙일보]입력 2009.04.27 02:31 / 수정 2009.05.04 10:12

배꼽을 달고 날아가는 방법

오늘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널리 퍼진 유머 하나가 있다. 경제난으로 일가족이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떨어져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였고, 어머니는 바람난 주부에, 딸은 날라리였다. 거기에 큰아들은 제비족이고, 둘째 아들은 비행소년, 막내는 덜 떨어진 아이였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듣고 웃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외국인은 아니다. 유머 감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기러기 아빠’나 ‘제비족’, 그리고 ‘바람난다’는 독특한 한국어의 속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날라리’나 ‘비행(非行)’과 ‘비행(飛行)’의 동음이의어는 음운 체계가 달라 번역조차 불가능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수돗물의 6단계 의성어도 외국 사람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잡음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입버릇이 되었는데도 이 유머 앞에서는 한국인 혼자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다. 정말 떨어져도 죽지 않고 날려면 세 살 때의 언어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 한국 하늘에 처음 제트기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쌕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호주 비행기’라고도 했다. 그 탁월한 의성어의 실력을 발휘해 초음속으로 나는 제트기의 굉음을 듣자마자 ‘쌕쌕이’라고 이름 붙인 우리는 천재였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국을 ‘오스트리아’가 아닌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고 제트기를 호주 비행기라 불렀던 사람들, 호주댁이 전쟁 난 시댁을 도우려고 친정에 알려서 보내온 비행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 가족주의의 등에 업혀 살아온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바깥 세상에 나가 보면 그것은 쌕쌕이도 호주 비행기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제트 비행기란 말은 소리 나는 것을 그냥 귀로 듣고 직감적으로 옮긴 말과는 다르다. 프로펠러가 아니라 가스를 분사하는 힘(제트 ‘jet’)으로 날아가는 과학적 원리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아무 쓸모없이 된 배꼽은 슬프다. 유머 속의 일가족처럼 추락해도 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세 살 때의 말과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어서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듯이 우리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들려온 말이 “일어나라”는 말이었다. 영어의 웨이크 업(wake-up)은 눈 뜨고 일어서면(up) 그만이지만 ‘일어나라’의 한국말은 다르다. 그냥 일어서는 것에 ‘나가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일어나다’는 ‘일어서다’와 ‘나가다’의 두 동사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의 압박 속에서 가장 많이 썼던 말이 ‘독립(獨立)’이요, ‘궐기(蹶起)’였지만 그 한자 말에도 ‘나가라’는 뜻은 없다. 생각할수록 ‘일어나다’의 그 토박이말에는 의미심장한 한국의 행동의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나가면 바깥이고, 바깥은 바람이요 비다. 업힌 채 어깨너머로 바라보던 수틀 같은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비정하고 견고하고 거칠다. 그런 세상으로 일어서 나가려면 영화 ‘타이타닉’의 디캐프리오와 윈즐릿처럼 넓은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부푼 돛처럼 펴고 날아야 한다. 그때 바깥 세상에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 배꼽이 자기 존재의 한 중심에 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원래 ‘배꼽’이라는 말은 배의 복판에 있다고 해서 ‘뱃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ㅂ’ 이 ‘ㄱ’으로 바뀌는 음운도치 현상으로 배꼽이 된 것이다 (배복>배곱>배꼽).

비행기에는 동력과 날개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진정 날게 하는 것은 균형을 잡아주고 방향을 정해 주는 중심이다. 그것이 우리 몸 한복판에 있는 배꼽의 상징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깥 바람이 거세도 이 배꼽으로 중심을 잡으면 덜 떨어진 아이도 정말 옥상에서 떨어져도 제트기처럼 초음속으로 날 수 있다.

일어서면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면 눕게 되는 한국인의 행동 원리. 그래서 ‘일어나다’의 반대말이 ‘드러눕다’와 짝을 이루는 한국어의 신비함(‘일어+나다’와 ‘드러+눕다’). 그리고 일어나고 드러눕는 사이에 문지방 같은 신성한 배꼽의 중심이 있는 세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전통문화에서 새로운 쓸모가 생기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역설이 아무리 추락해도 배꼽을 달고 날아가는 한국인이다.

이어령

 

 

살구나무꽃...꽃받침이 뒤로 잦혀지면 살구꽃...꽃받침이 꽃잎을 감싸면 매화꽃...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