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13] 우리는 언제부터 배불리 밥을 먹게 된 것일까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6.14 23:16 | 수정 : 2012.06.15 02:01
- 금덩이 같던 戰線의 주먹밥 - 6·25전쟁 중 부녀자들이 국군 장병에게 보낼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
식민지 시대, 특히 일제가 대륙침략에 나선 1930년대 이후 우리 식생활은 더욱 비참해졌다. 1인당 쌀 소비량은 1910년 101㎏에서
1934년 52㎏으로 절반이 됐다.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만주에서 들여온 좁쌀이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명줄을 이어야 했다. 1945년
광복도 해묵은 배고픔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남북분단으로 화학비료의 공급이 끊기고 6·25전쟁으로 연간 쌀 생산량이 300만t을 밑돈
1950년대, 민초들의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미국산 밀가루로 주린 배를 채우던 1970년대 중반까지 ‘흰 쌀밥에 고깃국’을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다. 국가가 앞장서 혼·분식을 장려하며 절미(節米)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을 만큼 식량사정은 어려웠다. 학교에서는 보리알
숫자를 헤아리는 도시락 검사가 행해졌고, 무미일(無米日)이었던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설렁탕에도 밥 대신 국수를 말아내는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를 쌀밥을 늘 먹는 ‘미식(米食) 민족’으로 만들어 준 것은 1971년에 육종에 성공한 다수확 통일벼가 가져다준
녹색혁명이었다. 품종개량과 재배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연간 쌀 생산량은 1988년 605만t으로 정점을 찍었고 다시 줄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420만t을 기록했다. 그리고 산업화의 성공이 가져다준 경제적 번영은 쌀에 대한 오랜 집착에서 놓여나게 하였다. 우리의 식탁에 지구마을의 다양한
먹거리가 오르는 오늘, 그릇 위에 수북이 쌓인 밥이 더 많았던 고봉밥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미국산 밀가루로 주린 배를 채우던 1970년대 중반까지 ‘흰 쌀밥에 고깃국’을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다. 국가가 앞장서 혼·분식을 장려하며 절미(節米)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을 만큼 식량사정은 어려웠다....^-^
그러나 1971년 통일벼가 가져다준 녹색혁명으로 식량사정이 좋아졌다...ㅎㅎ...^-^
- 2013년 3월7일 목요일...수산나 -
콩나물교실 앞쪽... 칠판과 교탁 있고...풍금 있고...난로위에 올려 놓던 도시락 생각이 나요...ㅎㅎ...^-^
콩나물교실 뒤쪽...게시판 있고...청소도구 뒤에 있고...난로와 연통이 보이고...조개탄이 생각나네요...ㅎㅎ...^-^
콩나물 교실...한 반에 80명씩 앉았지요...그 때는 선생님 말씀에 '절대복종' 하던 시대였지요...ㅎㅎ...^-^
콩나물 교실과 모니터 화면...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촬영한 사진 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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