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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21] 日王 "항복할테니 통치권만은 보장을"/광복의 기쁨 2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21] 日王 "항복할테니 통치권만은 보장을"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08.30 23:30

1975년 2월 잡지 '문예춘추'에 실린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동생 다카마쓰(高松)의 회고담은 충격적이다. "어떻게 하면 잘 패할 수 있는가에 전쟁 목적을 두어야 한다." 패전이 임박한 1944년 6월 그는 형의 무책임한 말에 놀라 고노에(近衛) 당시 총리대신과 히로히토의 퇴위를 상의한 일이 있음을 털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승산 없는 싸움임을 잘 알고 있었던 히로히토는 그러나 이듬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7만 명 이상의 생령(生靈)을 잿더미로 만들었어도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한 발 더 떨어진 9일에야 그는 자신의 국가 통치권을 보장하는 조건부 항복을 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연합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천황제의 존폐 여부를 국민의 선택에 걸었다.

戰犯 히로히토 - 1943년 4월 29일 대본영(大本營)에서 열린 육해군 최고위 지휘관 회의 모습. 가운데가 침략전쟁의 주범 히로히토 일왕이다. 패전 이후 1975년까지 그는 야스쿠니 신사를 여덟 번이나 참배하며 군국(軍國) 일본의 망령을 다시 불러냈다.
8월 15일 정오 일왕의 육성은 전파를 탔다. "짐은 국체(國體)를 호지(護持)하려는 충량(忠良)한 그대들 신민(臣民)의 적성(赤誠)을 신뢰한다. 확고하게 신주(神州)의 불멸을 믿고, 맹세코 국체의 정수를 앙양하라." 항복 선언의 그날 히로히토는 '국체', 즉 살아 있는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이 통치하는 국가 체제를 고수할 것을 황국(皇國)의 신민들에게 명령했다. 점령 초 미국은 일본인 스스로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다. 그해 12월 '천황제 유지'에 94.8%가 찬성표를 던진 여론조사 결과는 일본인들이 종교와도 같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깊이 주박(呪縛)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왕을 전범(戰犯)으로 재판하려면 100만의 군대를 재투입해야 할 것이다." 1946년 1월 연합국총사령관 맥아더의 말이 웅변하듯, 미국이 일왕을 국가의 상징으로 남겨 둔 주된 이유는 일본인들의 천황제에 대한 지지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일왕의 치세가 영원히 지속되길 기원하는 '기미가요'를 목청 높여 제창하고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물인 황군(皇軍)의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자랑스럽게 내흔드는 오늘, 일본 정부는 주요 국정에 대한 각료들의 내주(內奏), 국회 개원식 출석, 외국 원수와의 친서 교환 등 평화헌법에 들어 있지 않은 일왕의 실질적 국가원수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히로히토의 지상명령인 '국체 호지'는 여전히 일본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꺅 1945년  12월 '천황제 유지'에 94.8%가 찬성표를 던진 여론조사 결과는 일본인들이 종교와도 같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깊이 주박(呪縛)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도사람들의 빈번한 여성 성폭행, 북한사람들의 매사에  "어버이수령 감사합네다." 등 주박(呪縛)된 인식....ㅠㅠ...^-^

 

- 2013년 3월19일 화요일 성 요셉 대축일에...수산나 -

 

1945년 일왕의 항복...모니타화면...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복의 기쁨-일장기 내리는 장면...대한민국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