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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17일 금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다. 사무엘은 임금의 횡포로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임금이 전쟁을 이끄는 다른 민족들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제1독서).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간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죄의 용서는 곧 치유라는 사실을 율법 학자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8,4-7.10-22ㄱ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안토니오가 어둠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구원의 성사로 힘을 얻어,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와 치유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이 구원이 드러나는 자리임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우리 삶에서 구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실감하게 되는 사건은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을 깊이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구원을 실제로 살게 됩니다. 그 반면에 용서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심지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까지 느끼는 순간, 주님의 온전한 구원과 치유에 대한 믿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가을에 본 연극 한 편의 강한 인상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의 한 극단이 영국의 유명한 연출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였습니다. 놀라운 연기와 신선한 연출에도 감탄했지만 무엇보다도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남긴 ‘용서’라는 주제를 다시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연극의 뒷부분인 에필로그에 나오는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마지막 대사는 용서만이 인생의 행복을 다시 찾는 길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부릴 정령도 없고/ 걸 수 있는 마술도 없고 해서/ 기도로 구원되지 않는다면/ 저의 마지막은 절망이 됩니다./ 기도는 뚫고 들어가 자비를 움직여서/ 온갖 잘못을 용서합니다./ 여러분도 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
우리는 용서가 때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과,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프로스페로에게 용서가 삶을 건 도전이었듯이 우리에게도 용서는 그것을 감행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어 우리가 온전하게 치유받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걷는 우리의 삶이라면, 용서의 힘은 분명히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자라나 있을 것입니다.     

 

아산 공세리성당 루르드성모상

 


 

2014-01-17 오후 1:45:30추천수11반대수1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Mk.2,5)
 
 
제1독서 1사무 8,4-7.10-22ㄱ
복음 마르 2,1-12
 

우선 1박 2일 동안의 짧은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음을 새벽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저의 여행 소식을 들으신 많은 분들이 제게 참 많은 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더군요. 또한 카페 묵상 글 댓글과 SNS를 통해서도 많은 내용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분들이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네요. 가족이 없는 매이지 않은 몸이라 훌쩍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말씀, 여행 갈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부럽다는 말씀 등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올린 몇 장의 좋은 풍경 사진을 보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여행이라기보다는 피정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오래 걷고 오래 뛰는 것을 싫어합니다. 군대 생활을 할 때에도 제일 싫었던 것이 행군이었고, 학창시절에 제일 못하는 운동이 오래 달리기나 마라톤이었습니다. 또 여행을 많이 다니기는 했지만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함께 다니는 여행을 선호합니다. 그러한 제가 이번 여행에서 혼자 40Km 이상을 걸었습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에 알이 배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지방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위 맛집 기행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루에 1~2끼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음식들만 먹었지요. 자장면, 국밥(돼지국밥이 아닌 콩나물국밥이었습니다), 밀면(유익한 부산 지방의 대표음식이네요).

결국 이번 여행은 즐기기 위한 단순한 여행이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한 무작정 걷기였지요. 계속 걷다보면 머릿속이 단순해지거든요. 그리고 그 단순함을 통해서 앞으로 일들도 걱정 없이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글을 보면서 마치 제가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더군요. 어쩌면 ‘여행은 즐기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선입견과 의심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 종종 쓰시는 말씀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죄의 용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눈에 보이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지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선입견과 의심으로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들 것에 달아서 내려 보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지요. 주님만이 이 중풍 병자를 고쳐줄 수 있다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그 어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각종 의심과 굳은 선입견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는 굳은 선입견,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계속된 의심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를 내려 보내는 사람들처럼 모든 의심과 선입견들을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는 자유롭게 당신의 구원 활동을 펼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맥스 에흐만).

 
광안리의 일출 장면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십시오.

어제 걷고자 했던 길의 딱 중간쯤 왔을 때였습니다. 전날의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인지 점점 더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분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고, 그분께 ‘걷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푸념식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 문자에 곧바로 이러한 답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네가 선택한 고생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제 여행의 결론을 내려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복잡한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었는데, 사실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인데, 어렵다고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걸으면서 그 해결점을 보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삶 전체가 이렇지 않을까요? 즐기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요. 즐기지 못해서 불평과 원망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고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 더군다나 남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겠지요.

즐기며 사는 하루, 기쁘게 살아가는 오늘이 될 것을 생각하니 이 새벽부터 설렙니다.

 

교황님의 새해 결심 10가지를 소개합니다.

서방의 한 일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혀진 것이랍니다.

1. 험담하지 않기

2. 음식 남기지 않기

3.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시간 내기

4. 좀 더 가난하게 살기

5.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기

6.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기

7. 반대자들을 친절하게 대하기

8. 교리들에 대해 헌신하기

9. 기도하는 습관들이기

10. 행복하게 살기

 

 

 

부처

2014년 1월 17일 금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용서가 때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과,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어 우리가 온전하게 치유받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걷는 우리의 삶이라면, 용서의 힘은 분명히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자라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아멘.

 

- 2014년 1월17일...금요일...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