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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씀의 초대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사람임을 깨닫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세관인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이 그분과 함께 자리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부르러 당신께서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히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 사울이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9,1-4.17-19; 10,1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기 위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 그분과 함께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의인으로 여긴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함께하시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단언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식탁에 함께할 수 있는 복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의 몫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자비를 절실하게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은총을 넘치게 주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주님을 찾으려 하는 모든 시대의 어떤 처지의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좋은 모범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불멸의 명저 『고백록』에서 그는 투명한 열정으로 독자들을 “일상은 고양, 위로, 관조가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의 체험이며, 그것은 낙담과 절망의 경계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진실과 대면시킵니다. 또한 이러한 죄인의 아파하는 마음에서 어떻게 은총의 광채가 빛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마음이 구원의 시작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제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갈림길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도 역시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 초대하고 싶다면, 먼저 오만함을 버리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가운데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예수성심상

 


 

2014-01-18 오전 7:58:11추천수16반대수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Mk.2,16-17)
 
 
제1독서 1사무 9,1-4.17-19; 10,1
복음 마르 2,13-17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매 학년 담임선생님께서는 저의 장래희망을 물어보았지요. 그때마다 제가 말했던 장래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신부님? 아니었습니다. 저의 장래희망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일찍 결혼을 해서 많은 자녀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교리 선생님이 “너 나중에 신학교에 가라.”고 하셨을 때에는, “선생님! 신부님 되면 결혼 못하잖아요. 저는 꼭 결혼해야 해요.”하면서 저의 진로를 명확하게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때의 말과 다짐들을 지금 현재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되지도 못했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선생님이 되어 일찍 결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었지요. 오히려 결혼하지 못하는 신부님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일이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했었던 장담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연인들끼리 연애를 하면서 이런 말들을 한다고 하지요.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야.” 그런데 어떻습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을까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사랑도 부딪히면서 조금씩 변화지요. 결국 서로 타협하고 수정하면서 또 다른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관련된 장담 역시 완벽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장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인간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으로 인해서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겉으로 짓는 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짓는 죄도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 모든 죄 하나하나를 따져 물으시고 벌을 주신다면 우리들은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 인간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 때문에 당신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시면서, 당신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큰 죄인이라고 불리었던 세관장 레위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시면서 하신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명확해집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앞서 부족함이 너무 많아서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부르러 오신 것일까요? 자기가 생각했던 사람들만이 아닌,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인간 모두를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내 자신이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내 자신을 더욱 더 깊이 낮출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도록 합시다.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떄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다(김어준).

 
사랑의 열쇠를 걸어놓는 곳. 녹슨자물쇠가 불안한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바쁘면 황제를 그만두세요.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길을 가는데 어떤 여인이 앞을 막아서며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말하면서 해결해주길 청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자기가 지금 너무 바쁘다고 말하면서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하네요.

“그렇게 바쁘다면 황제를 그만두세요.”

황제의 자리는 백성의 아픔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지요. 단순히 자신의 편이만을 생각하고 백성의 아픔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쁘다는 말을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하루하루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바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상황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말로 해야 할 것을 하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바치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이지요. 우리 역시 이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항상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눔보다는 소유를, 희생보다는 욕심을, 일치보다는 분리를, 사랑보다는 미움을 더 앞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앞세우지 않고 살아가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시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불멸의 명저 『고백록』에서 그는 투명한 열정으로 독자들을 “일상은 고양, 위로, 관조가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의 체험이며, 그것은 낙담과 절망의 경계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진실과 대면시킵니다. 또한 이러한 죄인의 아파하는 마음에서 어떻게 은총의 광채가 빛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출처]매일미사

 

 

부르심에 대해 찬미와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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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은 늘 깨어 새롭게 상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번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뤄지는 인생여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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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보다

부르심을 새롭게 강화하는데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출처]김명준 작성 묵상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이 없는 엄격함과, 자비가 없는 정의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참된 평화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출처]조재형 작성 묵상글

 

정말 우리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랑을 먹어야 살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3시간에 한 번씩 아니 30분에 한 번씩 그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출처]양치기 신부님의 말씀 산책

 

 

사무엘이 걸었던 삶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이 세상 것들을 삶의 목표로 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걸었던 삶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걷는 사람들... 그분들은 많은 경우 재물의 축척하지 않고 살기에

가난한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아마 그러했기에 세상적 가난이 싫어서 사무엘의 아들들(요엘, 아비야)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의 반대

길을 걷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작 하느님의 정의의 길을 걸었던 사무엘은 주님 안에서

행복했지만 정작 그로인해 세상적 가난에 살았던 아들들은 행복하지 않았나 봅니다.

 

내 안에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내 온 몸을 얼음처럼 굳게 만들어서 긴장하게 만들고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치유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얼음이 되어버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풀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 해주어야 합니다. 얼음이 되어버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손을 대 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되어주신 의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참으로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의사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따듯한 마음으로 누구의 얼어있는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왜 그러느냐고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출처]요셉신부님의 매일복음 묵상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에로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출처반신부의 복음묵상

 

부처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 안에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내 온 몸을 얼음처럼 굳게 만들어서

긴장하게 만들고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얼음이 되어버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풀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 해주어야 합니다.

얼음이 되어버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손을 대 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되어주신 의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참으로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의사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따듯한 마음으로 누구의 얼어있는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왜 그러느냐고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에로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3시간에 한번씩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님.....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응답을 드리게 하소서...아멘.

 

- 2014년 1월18일 토요일...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