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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0년 8월 6일 목요일[(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라파엘로 <거룩한 변모> 성화 및 해설 1점

굿뉴스 추천 성가

입당 성가  72번 다볼 산의 예수 (1절) 영성체 성가  500번 평화의 하느님
예물준비 성가  219번 주여 몸과 맘 다 바치오니 영성체 성가  175번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예물준비 성가  212번 너그러이 받으소서 영성체 성가  160번 하느님의 어린양
파견 성가  72번 다볼 산의 예수 (2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입당송

마태 17,5 참조
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저희를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16-19
사랑하는 여러분,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7(96),1-2.5-6.9(◎ 1ㄱ과 9ㄱ)
◎ 주님은 임금이시다.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다.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주님, 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 모든 신들 위에 아득히 높으시옵니다. ◎

복음 환호송

마태 17,5
◎ 알렐루야.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 바치는 예물을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로 거룩하게 하시고
찬란한 그 빛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9 : 변모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모습이 온통 찬란히 빛나게 하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온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1요한 3,2 참조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광스러운 변모로 보여 주신 아드님의 그 빛나는 모습을 닮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라파엘로 <거룩한 변모>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8.6.“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자가 환시를 통해 본 장차 벌어질 사람의 아들의 영광된 모습과 통치를 미리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베드로가 직접 본 예수님의 변모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의 변모를 통해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0)

 

해처럼 빛나는 얼굴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난 모세의 모습(탈출 34,30)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의인의 모습’(마태 13,43)을 연상시킵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심을 해처럼 빛나는 얼굴로 드러내셨다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빛처럼 하얘진 옷은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마태 28,3)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묘사는 예수님이 한 순간이나마 천상의 모습으로 변모하셨음을 시사해줍니다.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심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데,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마태 17,5). ‘빛나는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는 이들을 현존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예수님의 변모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벌어진 일도 함께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께 변모가 일어났듯이, 제자들에게는 변모될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와 함께 우리의 변모에 대한 이 가르침도 함께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빛나는 구름은 제자들을 변화에로 부르십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고”(루카 1,35), 변화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빛나는 말씀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은 것입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구름으로 덮고,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하시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아버지의 권위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 건물(초막)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1-22)

 

그렇게 우리는 말씀의 영으로 변모해 갑니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2코린 3,18)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진정 거룩해지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을 믿고 순명하라!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도록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아멘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변모變貌의 여정

-예닮의 삶-

 

삶과 죽음은 함께 갑니다. 멀리 있는 죽음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는 죽음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합니다. 이렇게 살 때 환상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삽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새벽 일어나니 카톡 메시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장익 주교님이 선종하셨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지납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합니다. 얼마전 바오로 수사님이 돌아가셨고 지난 밤에 장익주교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기도와 일입니다. 관상과 활동입니다. 침묵과 말입니다. 존재와 소유입니다. 오아시스와 사막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입니다. 영적 삶에서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말전도, 주객전도가 되어선 안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의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의 은밀한, 내밀한 주님과 함께 하는 곳, 바로 외딴곳의 오아시스가 오솔길이 있어야 합니다.

 

-“너 밖에든 안에든 오솔길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님과 나만이 아는 오솔길

님이 그리워 목마를 때 찾는 오솔길

님과 함께 걷는 오솔길

늘 걸어도 늘 그립고 아늑한 오솔길 너 있는가”-1998.7.28

 

아주 예전에 써놓은 오솔길이란 시입니다. 분명 혼자가 아닌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지만 주님과 함께 홀로만의 오아시스, 오솔길의 은밀한 시공은 필수입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토마스 머튼은 말했습니다. 고독과 연대는 함께 갑니다. 고독과 더불어 깊어지는 삶입니다. 어제 홀로 먹이를 찾다 멈춰 물끄러미 바라보는 물오리 사진에 ‘삶’이란 제목으로 수도형제와 나눴습니다.

 

-“무슨 삶입니까?”

“고독한 삶입니다. 그래요. 저는 불쌍한 삶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습니다. 저는 불쌍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고 ‘고독한 삶’으로 생각했는데 수도형제는 ‘불쌍한 삶’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장마에 시냇물 흐르는 모습도 소리도 좋고 시냇물에서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일하며 노는 물오리들 구경하는 재미도 참 큽니다. 저만의 은밀한 관상터요 쉼터입니다. 아침 먹자 마자, 점심 먹자 마자 잠시 저만의 외출길, 오솔길의 여정에 오릅니다. 요즘 며칠은 이 행복에 삽니다. ‘푸른잔디’, ‘파란마음 하얀마음’, ‘시냇물’ 동요를 맘껏 힘차게 부르며 오솔길을 걷듯 이 길을 걷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여정중에 있는 사랑하는 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외딴곳의 높은 산에서 당신의 변모를 체험시키십니다. 당신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시켜 주십니다. 순전히 주님과 만남의 관상체험의 은총입니다. 주님 변모의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엉겁결에 소원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윈하시면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시공은 초월하여, 승천하시어 영광중에 있는 모세와 엘리야와 우정의 친교를 나눴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두 제자들 역시 분명코 주님 변모 체험과 더불어 내적으로 변모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신원은 이미 다니엘서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거룩한 공교회,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주님의 나라, 하늘 나라입니다. 변모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제자들도 주님을 닮아 참나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새삼 우리 삶은 변모의 여정이자 예닮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물론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삶의 장場’이 ‘변모의 장場’임을 깨닫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관상은 ‘봄觀’과 더불어 ‘들음聽’으로 이뤄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는 주님의 현존입니다. 바로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관상체험을 통해 변모되는 우리들입니다.

 

참 행복은 이런 관상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대화하듯 내 마음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고백하는 마음으로 신망애信望愛 가득한 정신으로 시편을 기도함이 정말 좋습니다. 시편만 아니라 수시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모르게 점진적으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하는 우리들입니다.

 

“마음이 예쁘면 얼굴은 저절로 예쁩니다. 예수님 십자가 밑에 서서 예수님과 함께 사진을 찍으셔요.”

 

가끔 집무실을 찾는 분들에게 주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드리며 하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마음과 더불어 예뻐지는 얼굴임이 틀림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드릴 때 마다 하나하나 아름다운 면모面貌에 감탄하곤 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다시 일어나 두려움 없이 평범한 일상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늘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이 바로 삶의 방향이자 목표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심을 주님의 변모체험을 통해 깊이 깨달았을 제자들입니다. 이런 주님 방향을, 목표를, 중심을, 의미를 잊어 버려 뿌리없이 방황하는, 표류하는, 하여 ‘일상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는 무감각한 무의욕의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그대로 변모의 여정입니다. 무의미한 허무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방향이 뚜렷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삶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송아지 동요를 부르며 예닮의 여정에 충실할까 합니다. 얼룩소 엄마를 닮은 송아지처럼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닮은, 닮아가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동요입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두-귀가 얼룩귀 귀가 닮았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죄가 되나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꼭 외모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 판단해야 합니다. 종교에서는 보통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스탠퍼드 대학’이 설립되게 된 계기입니다.

 

외아들 스탠퍼드가 일찍 죽자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다니던 하버드 대학에 그의 동상을 세워줄 것을 청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 답례로 건물 하나를 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의 행색이 초라했기에 총장은 만나주지 않고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부부는 “그냥 우리가 아이 이름으로 학교를 하나 세웁시다.”라고 말하고 하버드를 나와 ‘스탠퍼드’라는 대학을 세웠습니다. 분명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려 해도 잘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절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외모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생존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식동물이 맹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습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일도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아있는 동안 저절로 일어납니다.

 

‘시부야 쇼조’의 『외모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심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는 책에 외모를 중시했던 한 유명한 인물이 나옵니다.

“아저씨가 수염을 기르신다면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 보여서 사람들이 모두 아저씨한테 투표할 거예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링컨은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열한 살 소녀에게 이런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깔끔한 외모를 버리고 수염을 기릅니다. 물론 압도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전에는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쑥 들어간 볼 때문에 매우 날카롭게 보였지만, 수염을 기르니 그런 특성이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일화가 또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급하게 내각을 구성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일이 사람들을 검토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참모가 한 사진을 들고 와서 “이 사람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음, 인상이 안 좋아. 안 되겠네!”라고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참모는 “외모만 가지고 사람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이때 링컨은 우리가 잘 아는 한마디를 던집니다.

“남자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걸세!”

 

외모에 이렇게 중요성을 두고 산 사람이 그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외모를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잘’ 판단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판단을 ‘100%’ 믿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서류 가방을 들고 차가 지나지 않을 때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 청바지 차림에 흩어진 외모로 건너보는 것입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몇 명이나 그 사람을 따라서 건너는지 보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누구를 따라 사람들이 더 많이 무단횡단을 하였을까요? 당연히 정장 차림의 남성입니다. 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따라 해야 자신도 안전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판단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권위 있는 사람을 판별하는 데 노력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편하고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혼은 ‘빛’을 보려 합니다. 자신을 살리는 것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외모에서 빛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영혼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이고, 세속적인 면을 보려는 사람은 육체를 살리려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농구장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아무리 돌아다녀도 농구경기에 열중한 사람들은 그 고릴라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은 그래서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오늘 당신 자신이 빛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들 안에서 어둠과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빛을 보는 사람은 ‘높은 산’에 오른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볼 수 있었을까요? 이는 시편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육체도 살려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야 하고, 이는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웬만하면 빛을 많이 품은 사람과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안에서 빛을 보기 위해서는 ‘산’ 위에 오른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올바르고 마음이 깨끗하여 육체적인 욕망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 사람만이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지 않습니다.

 

 

국가기밀정보의 98%는 이미 공개된 정보들을 정리 종합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의 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98%는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빛에 가까운지, 어둠에 가까운지 구별해야 합니다. 다만 나의 눈을 맑게 하여 빛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하느님과 함께 40일을 머문 뒤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합니다.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98%만 신뢰하고 2%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최종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산디에고 가는 길을 읽으면서 그 길이 사이클 경기의 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사이클 경기입니다. 20여 일 동안 4000킬로를 달리는 경기입니다. 저는 엄두를 못 내지만 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선수는 1999년부터 일곱 번이나 우승했던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입니다. 또 한명의 선수가 있는데 독일의 얀 울리히 선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2등에 머물렀던 선수입니다. 2003년 다섯 번째 대결을 할 때입니다. 역시 1등으로 달리던 암스트롱 선수가 응원하는 사람의 가방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울리히가 그냥가면 이번에는 그토록 바라던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울리히는 넘어진 암스트롱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암스트롱이 달리기 시작할 때 따라 달렸습니다. 울리히는 이번에도 2등에 머물렀습니다. 독일 국민은 울리히 선수의 모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지 못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빠르게 달릴지는 모르지만 바르게 달리지는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암스트롱은 빠르게 달렸고, 울리히는 바르게 달렸습니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은 빠르게 달렸던 암스트롱보다 바르게 다렸던 울리히에게 더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2012년 암스트롱은 지속적으로 금지된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암스트롱의 모든 우승 실적은 취소되었습니다. 2003년 진정한 우승은 바르게 달렸던 울리히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될 것 같지만 세상은 바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일하던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은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위험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친일은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고,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친일하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친일했던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 운동가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빠른 길을 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지방의 관리가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암행어사는 임금이 파견하였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평범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암행어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암행어사는 지방 관리의 잘못을 밝혀내고,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암행어사는 임금이 하사한 ‘마패’를 보여주었습니다. 마패는 임금으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표시’였습니다. 마패를 본 지방 관리는 암행어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그가 바로 임금을 대신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암행어사의 활동을 보았고, 임금을 칭송하였습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암행어사 이야기를 읽으면 통쾌했습니다.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암행어사와 같은 사람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암행어사처럼 ‘마패’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였습니다. 불의한 권력을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의 선포를 존중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산 위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로부터 10계명을 받았던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친 예언자였습니다.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예언자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른길을 걸었던 예언자였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빛났고,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모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천막 셋을 지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외모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넘어지고 넘어져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시는 모습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빠르게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바르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 길이 주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5. [매일미사 결론 기도문]

 

2020년 8월 6일 목요일[(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세상은 빠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될 것 같지만...

세상은 바르게 달리는 사람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