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4월 5일 수요일[(자) 성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네.
본기도
성자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에게 부활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
○ 제 마음이 모욕으로 바수어져, 저는 절망에 빠졌나이다. 동정을 바랐건만 헛되었고, 위로해 줄 이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저에게 먹으라 쓸개를 주고,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
○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복음 환호송
○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만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나이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또는>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은 아버지께 순종하셨나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시나이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봉헌하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이 제사로 성자의 수난을 신비로이 기념하고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이 가까이 왔나이다.
옛 원수의 교만을 꺾어 승리한 구원의 성사를
새롭게 거행하는 축제가 다가왔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이 거룩한 신비로 선포하는 성자의 죽음을 통하여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교구청에서 8년을 지냈습니다. 가끔씩 ‘투서’를 보내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본당 사목자에 대한 비난과 비리를 밝혀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전 신축 과정에서 비리가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단체에 대한 불목과 불화가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여성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강론 내용에 대한 비난도 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잘못이 있다면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억울한 이가 있다면 그것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투서’를 이용한 모함과 비난이 있다면 그것 또한 바로 잡아야 합니다. 투서를 보내는 이들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투서를 보낼 일도, 이유도 없습니다. 본당 사목자와 친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정이 애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본당 사목자와 가까이 있었기에 본당 사목자의 장점과 단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사목자와 교우들이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2000년 동안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유혹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모함하는 것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함과 비난은 기득권을 지녔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악으로부터 온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단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배반의 절정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만일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었던 제자의 배반,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을 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는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목자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 습관으로 건강을 해치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돌보지 않고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하지 않고 개인적인 취미활동에 빠져 있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탓으로, 시대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하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돌보지 않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드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도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이웃의 눈에 있는 티를 들쳐 내는 신앙인도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이를 외면하고, 지금 아파하는 이를 외면하고, 지금 외로운 이를 외면하는 신앙인도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저는 아니겠지요?”라며 애써 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감추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다음에 하지 머’라고 하면서 지금 해야 할 책임을 뒤로 미루었을 때 저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머’라고 하면서 저의 잘못을 합리화 했을 때 저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며 현실에 안주하였을 때 저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서, 사목자를 위해서, 그런 신앙인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주님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그렇습니다. 무도한 우리의 행동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를 기다리십니다.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곧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거룩하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2. 김찬선 신부 강론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성주간 독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가 이어지는데
오늘은 세 번째 노래로서 제자의 귀와 혀에 관해 얘기합니다.
제자의 혀란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혀인데
하느님께서 그런 혀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의 귀에 관한 얘기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귀를 가진 사람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더 나아가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자의 귀를 가지면 어찌 거역하지 않고,
어찌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겁니까?
즉시 떠오르는 말이 귀가 순하다는 뜻으로 공자가 가르친 이순(耳順)입니다.
귀가 순하다는 것은 귀에 거슬리는 말도 거역치 않고 순히 듣는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한 말과 같은 뜻이겠고요.
물론 아무 말이나 순히 듣는 것이 아닐 것이고,
주님의 말씀만 순히 듣는다는 뜻이겠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들으려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이것 절대 쉬운 것이 아닌데 그래도 하느님께서 귀를 일깨우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고 이해도 되지만,
그다음 단계 곧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난해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정말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까?
모욕과 수치를 주는 사람을 주님께서 없애주시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자를 주님께서 없애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내맡긴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와주시길래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사랑하면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이제 어떻게든 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는
곱던 얼굴이 망가질 정도로 시장에서 장사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강아지 소리 들으며 딸 고쳐주려던 이방 여인도 수치 당하지 않았지요.
사랑하면 나의 시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수치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한 것이고 사랑으로 한 것이지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동냥에 대해 얘기할 때 오늘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그도 처음 동냥하러 다닐 때는 부끄러워했는데 극복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은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주님께서 ‘차돌처럼 당신 얼굴빛 변치 않으셨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욕을 줄 때,
그 받은 모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큰 영예를 받게 될 것이니,
그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모욕은,
모욕을 받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탓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시선이 모욕하는 사람에게 가 있지 않고, 주님께 가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주님이 옆에 계시면 부끄러울 것도 모욕당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역시 사랑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모욕당하는 겁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04. 성주간 화요일.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걸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예수 그리스도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친구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지난 주일 오후 입원중인 분에게 병자성사를 드리려 외출했고 방문명단에 기재했습니다. 환자와의 관계란에 저는 지인知人이라 쓰니 담당 간호사가 친구親舊로 바꿨고 즉시 감탄했고 공감했습니다. 진작 친구라 썼으면 좋았을 것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입원해 계셨다면 저는 지체없이 관계란에 친구라 기재했을 것입니다. 마침 “예수님은 나의 참 친구”라는 개신교 어린이 성가가 좋아 나눕니다. 검색하다 은총처럼 발견하고 참 기뻤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참 친구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해
어디서나 어느 때나 나와 함께 해
저기 우주보다 더 넓게
푸른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다 말씀하시네
내게 힘주시네”
요즘 제가 부쩍 자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말마디는 예수님은 나의 절친이란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가 예수님의 절친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 모든 이가 주님의 친구이듯 믿는 이들 모두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15,12-14)
새삼 제 작은 사랑이 부끄러워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님-우리는 주님의 제자이자 친구이다-”로 정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곤궁중에 있는 모습이 제1독서의 이사야서 둘째 “주님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처지와 참 흡사합니다. 그대로 우리 친구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하는 듯 하며, 새삼 우리의 신원도 이렇겠구나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예수님은 분명 이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참 이스라엘로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원도 마찬가지 똑같습니다. 답답하고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고, 주님의 영광을 발하는 예수님의 친구로서 자신의 고귀하고 존엄한 신분을 새롭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이 얼마나 곤궁한 처지인지 잘 드러납니다. 참 마음의 기복이 변화무쌍하지만 곧장 자신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붙잡고 분연奮然히 일어납니다.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이 이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 베드로의 배반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배신자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 합니다. 당신의 측근 제자들중 하나인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의 심중도 그대로 밤처럼 어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중에 환한 빛으로 자신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새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자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다.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속에서 찾아 낸 영광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문득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진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토가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이 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자주 되뇌어 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하느님 그대의 영광이듯 그대 하느님의 영광이어라.”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고 예수님의 친구인 우리가 바로 그러합니다. 유다의 배신에 이어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뒤따르지만 예수님은 세 번이나 그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예고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배신의 가능성을 지닌 우리를 부단한 회개에로 이끄는 우리의 삶에 평생 반면교사가 됩니다.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파멸을 자초했고 베드로는 처절한 회개로 주님의 으뜸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어둡고 착잡했을 것이나 흔들림없이 영광의 빛과 힘으로 어둠을 통과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친구인 우리가 평생 배우고 따라야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생략된 주님의 유언같은 새계명입니다. 유다의 배신 예고와 베드로의 배반 예고 사이, 참 절묘한 자리에 위치해 있는 주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제자이자 친구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당신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이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너희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 것입니다. 아멘.
[4/5(수) 성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조재형 신부)
2. 시선이 모욕하는 사람에게 가 있지 않고, 주님께 가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주님이 옆에 계시면 부끄러울 것도 모욕당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역시 사랑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모욕당하는 겁니다.(김찬선 신부)
3.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걸을 것입니다.(이영근 신부)
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이수철 신부)
[4/5(수) 성주간 수요일, 제 102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동행하시니....
수치와 모욕,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4월5일(수) 6시5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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