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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4월 19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4월 19일 수요일[(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8(17),50; 22(21),23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8-9(◎ 7ㄱ)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16.1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부제 또는 사제가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어제부터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어느덧 28년 전입니다.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교우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성지순례를 신청했습니다. 친한 동창신부님들도 8명이 함께 신청했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고, 성지순례에 대한 이해도 적었습니다. 성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공생활을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곳(Holy Land)을 뜻합니다. 베들레헴, 나자렛, 갈릴래아, 가파르나움,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사도들이 선교한 곳, 교우들이 순교한 곳, 성인과 성녀들이 살았던 곳(Holy Place)도 성지가 되었습니다. 해외에도 성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도 성지가 많습니다. 교우들이 순교한 곳, 순교한 교우들이 묻힌 곳, 성인과 성녀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들이 있습니다. 절두산, 새남터, 미리내, 솔뫼, 치명자 산과 같이 한국에서 성지가 많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왜 성지순례를 가는 걸까요? 저는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과로를 했으면 얼굴의 모습이 까칠 할 것입니다. 직장의 일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자녀의 문제로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할 것입니다. 분노와 불만이 있다면 화난 모습일 것입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 생기가 가득한 모습일 것입니다. 감사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얼굴은 환한 미소가 보일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자선을 베풀면 온화한 얼굴이 될 것입니다. 성지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생각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의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듬뿍 안고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를 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기에 앞서서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9일 기도를 하면서 특별한 기도 지향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왜 성지순례의 목적을 이야기할까요? 28년 전에 저는 거울을 보는 심정으로 성지순례를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9일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동창신부님들과 함께 간다는 즐거움에 성지순례의 목적과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면서 주변의 경치는 보았지만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의 마음은 몰랐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수위권 성당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은 찍었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 주님탄생 성당에서 경배하면서 저는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께 봉헌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서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기보다는,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기보다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23년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 성지라는 거울에 비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잡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자캐오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 한걸음씩 걷겠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처럼 저도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부활의 영광으로 올리셨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 성당에 있는 글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당신이 이곳에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십시오. 당신이 이곳에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십시오.” 주님!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 하시어 순례에 함께한 모든 이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 2.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18.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숨겨져 있는 저의 생명이 당신과 함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날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삶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등잔밑이 어둡다고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바로 내 가까이 수도원에서 잘 살아가는 형제들이, 또 세상 한 복판에서 잘 살아가는 내 잘 알고 있는 지내는 형제자매들이 바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임을, 교회의 살아있는 성인들임을 요즘 새롭게 깨닫습니다. 

 

제가 어제 예로 들었던 분들은 물론, 여기저기 세상 곳곳에서 살아가는 도반들이 바로 그분들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 교황님의 주일 강론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후반부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부활하신 분을 공동체에서 찾으십시오. 공동체 없이, 예수님을 발견하기는 힘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토마스에게 주어진 초대는 우리 모두에게도 타당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어디서 찾습니까? 어떤 특별한 사건에서, 특별하고 놀라운 종교적 현상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서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공동체에서, 교회에서, 비록 완전치 않더라도 거기 머물면서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합니까?

 

우리의 한계들과 실패들, 즉 그 모든 한계들과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머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거기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우리에게 충격으로 와닿는 그분 사랑의 가장 큰 표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이름으로, 예수님 상처의 이름으로, 우리의 팔을 쾌히 벌려 삶에 상처받은 이들을 껴안고 있는지, 하느님의 자비로 어느 하나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환영하고 있는지 묻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모두를 환영하는 것처럼 한 형제, 한 자매로서 모든 이를 환영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십니다(God welcomes everyone). 자비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모두를 환영하는 가정이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그렇습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분을 만난 것은 그가 몸담고 있는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였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크든 작든 내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 공동체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교회 공동체의 롤모델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아마도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기보다는 이상의 표현일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우리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하신 주님께, 성령님께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협조해드리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은총으로 날마다 새롭게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행전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대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작은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롤모델입니다. 늘 읽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말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공산주의 원리는 바로 여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이 꿈꾸는바, 지향하는 바는 자유와 평등이, 사랑과 정의가 조화롭게 실현된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순전히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날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 주님을 닮아갈 때 가능한 하느님 나라 교회 공동체입니다. 정말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분투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는 물론 우리를 향해 다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을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같다.”

 

참으로 이런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처럼, 성령따라, 사랑따라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를 이뤄주는 미사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새삼 우리 삶의 중심은, 늘 바라보고 일치를 지향해야 할 분은 다음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석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위로부터, 영에서 새롭게 태어남으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4/19(수) 부활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부활의 영광으로 올리셨습니다.(조재형 신부)

 

2.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숨겨져 있는 저의 생명이 당신과 함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수님은 니코데모는 물론 우리를 향해 다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을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같다.”(이수철 신부)

 

 

[4/19(수) 부활제2주간 수요일, 제116일 기도] 

 

하느님!

위로 부터 태어나게 하소서.

영에서 태어나게 하소서.

바람처럼 살게 하소서.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며 살게 하소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오직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4월19일(수) 6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