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7월 2일 수요일[(녹) 연중 제1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본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21,5.8-20
5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9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가르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10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11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언짢아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13 그러나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14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
하가르에게 주어 어깨에 메게 하고는, 그를 아기와 함께 내보냈다.
길을 나선 하가르는 브에르 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다.
15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는,
16 활 한 바탕 거리만큼 걸어가서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았다.
‘아기가 죽어 가는 꼴을 어찌 보랴!’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17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가르를 부르며 말하였다.
“하가르야,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18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9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하가르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
20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는 자라서 광야에 살며 활잡이가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
○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
○ 아이들아, 어서 와 내 말을 들어라. 주님 경외를 가르쳐 주리라. 삶을 즐기고 복을 누리려, 장수를 바라는 이 누구인가?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8-34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본당에는 주재원으로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한국 본사에서 미국 지사로 파견된 이들입니다. 한국의 본사에서 미국에 지사를 만들고, 지사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파견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재원이라고 합니다. 주재원 중에는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주재원을 끝마치고 미국에 남기도 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좋기도 해서 남는 때도 있고, 대부분은 이미 미국 생활에 익숙해진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남기도 합니다. 주재원은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가족은 미국에 계속 남는 일도 있습니다. 주재원이라는 직책을 내려놓고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새로운 직장을 찾아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봅니다. 이분들에게 신앙은 큰 위로가 됩니다. 이분들은 신앙을 통해서 용기를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지켜 주셨듯이, 그분들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한국 교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교구 설정 150주년과 103위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한국 교회는 박해받던 교회에서 선교의 교회로 나갔습니다. 사회의 억눌린 목소리를 품어주는 ‘피난처’가 되었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그 어둠 속의 등불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당시 교회는 넘쳐나는 사람 때문에 본당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1980년에 제가 다니던 본당도 2개로 나뉘었습니다. 새로 분가된 본당은 상가를 얻어서 시작했습니다. 같이 성당 다니던 친구들도 새롭게 분가된 본당으로 다녔습니다. 그렇게 분가된 본당이 지금은 6개가 넘습니다. 낙성대, 인현동, 신림성모, 성현동, 쑥고개, 행운동이 있습니다. 이 본당의 모 본당은 모두 중앙동(봉천동) 성당입니다. 하느님께서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지켜 주셨듯이 분가된 본당을 지켜 주셨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뿌리내리는 이들, 그 속에는 늘 눈물과 결단, 그리고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물 한 병과 빵을 들고 나아간 하가르처럼, 우리도 빈손 같지만, 하느님을 신뢰하며 걷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다른 이야기,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고을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귀 들렸던 자가 고침을 받았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눈앞에 기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익숙했던 삶의 질서를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이 찾아오셔도, 내 삶의 틀이 흔들릴까 봐 오히려 그분을 떠나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부릅니다. 익숙한 삶의 틀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면, 그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치유와 생명을 가져오셨지만, 고을 사람들은 그 변화보다 지금의 질서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하가르는 다릅니다. 낯선 광야 속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라는 명령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광야에서 희망을 붙드는 용기, 변화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가르처럼 절박한 상황에 있는 분들도 있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두려워하고 밀어내는 고을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우리가 지닌 작은 믿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 마을에서, 가정에서,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가르처럼 그분을 믿고, 자녀를 붙들고, 믿음을 붙들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8,28-34: 가다라인들 지방의 마귀 들린 사람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듣고 기분이 섬뜩해지는 표현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 거기다 그들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생명의 하느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죽음의 세력, 죽음의 세상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록 살아있지만,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참삶을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희망이 없는 상태가 곧 죽음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마귀의 세력이 창궐합니다.
틈만 나면 폭력을 휘두르고, 분열과 전쟁을 획책하는 무리들이 곧 악령입니다.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살살 꼬드겨 벗겨 먹고 삶아 먹는 사이비 교주들이 곧 이 시대 사탄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세력, 사탄의 권세 안으로 들어가,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잘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가까운 이웃들이 저리도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만, 우리 가정만, 우리 공동체만 별 탈 없으면 그만이라며
희희낙락하는 이기주의도 큰 악입니다.
반민족적이고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끝도 없이 유포시켜 선량한 백성을 악으로 끌어들이는 매체들도
반드시 배척해야 할 이 시대 악령입니다.
숱한 죽음의 세력과 사탄의 무리에 꿋꿋이 맞서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오직 우리 주님에 대한 굳센 믿음,
그리고 그분 현존에 대한 강력한 확신, 그분에게서 퍼져나오는 강력한 구원의 빛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피정 센터이야기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8,28-34:
<우리 안에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 지역 나들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마귀 들린 이들은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바다의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사실 당시에 마귀들과 악령들이 추방되는 사건은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라는 마귀들의 외침은 종말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종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혹 우리도 하느님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나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우리 안에 누가 있어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사실 우리 안이 빛이라면 빛을 반겨 맞아들일 것이고, 어둠이라면 어둠을 반겨 맞아들일 것입니다.
마귀 들린 이는 자신 안에 마귀를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요, 우상 숭배에 빠진 이는 우상을 받아들인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이라는 우상’에 빠진 이는 자기 자신의 이기와 편리를 따르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치던 이들은 거룩한 권능을 보고 오히려 달아납니다.
그리고 그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은총을 반겨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품고 말씀의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만이, 사랑이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러워져 있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러워져 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태 8,34)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진정 제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7.1.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창세19,15-29 마태8,23-27
주님과, 도반들과 함께 하는
“믿음의 여정”
2025년도 반은 지났습니다. 오늘은 후반부 7월 첫날입니다.
7월이 오면 그냥 떠올라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이육사(1904-1944;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는 수감번호,
만40세 옥사)의 <청포도>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만해 한용운처럼 시와 삶이 일치되었던 안동 출신의 애국시인이었습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꿈꾸듯 아늑한 분위기에 젖습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수도원을 찾는 반가운 분들을 맞이할 때 마다, “오늘은 자매님 수도원 방문 축일입니다”
환대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제부터 대부분 고달픈 몸으로 수도원의 쉼터를 찾는 분들 모두를 청포를 입고 찾아온 손님들처럼
그리스도를 맞이하듯 따뜻이 반가이 환대해야 겠다는 마음을 새로이 합니다.
예나 이제나 믿는 이들 너나할 것 없이 믿음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믿음의 여정과 더불어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요 바로 이것이 삶의 모두입니다.
그냥 무의미한 반복의 허무한 일상이 아니라 한분한분이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한권의 살아있는
미완의 성경같은 믿음의 여정, 고유의 인생을 살아 갑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믿음의 여정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자승자강(自勝自强), 예의란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이겨내는 자세다.”
“고난은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다. 어른이 단단한 꺄닭은 겪어온 무수한 고난을 주름에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근육만 돌볼 것이 아니라 영혼의 근육, 마음의 근육도 돌봐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신망애의 삶, 온유와 겸손,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을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튼튼해지는 영혼의 근육,
마음의 근육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의 손길을 막아보려 하느님과 최종 담판을 하듯 기도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임했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의인 열명은 커녕 한 사람도 없어
불과 유황으로 파멸된 이 도시들을 바라다 볼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마지막 부분의 장면이 뇌리에 선명히 부각됩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서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서 내보내 주셨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의인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믿음의 아브라함 덕분에 롯은 구출되었고, 이런 일련의 엄청난 비극적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도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중에 믿음으로, 믿음의 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믿음의 빛이 삶의 의미를, 삶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힘이 샘솟는 열정으로 지치지 않고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에 결코 좌절할 것이 아니라 믿음 성장과 성숙의 계기로,
전환점으로 삼아 믿음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될 믿음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함께 계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깊어졌을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풍랑속의 일엽편주, 풍전등화같은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은 믿음의 여정중에 겪게 되는 제자들인
우리의 시련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와 흡사한 위기를 겪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제자들의 기도와 주님의 개입이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아주 고요해집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평생 잊지 못할 이런 위기 통과의 기적 체험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은 결코 혼자가 아닌 주님과, 도반들과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밖의 풍랑보다 더 위태롭게 하는 것은 내면의 마음속 두려움과 불안의 풍랑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일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고
믿음의 여정중 우리 마음속 풍랑은 물론 밖의 풍랑까지 고요히 해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요셉수도원
7/2(수) [(녹)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우리가 지닌 작은 믿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 마을에서, 가정에서,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가르처럼 그분을 믿고, 자녀를 붙들고, 믿음을 붙들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반민족적이고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끝도 없이 유포시켜 선량한 백성을 악으로 끌어들이는 매체들도
반드시 배척해야 할 이 시대 악령입니다.
숱한 죽음의 세력과 사탄의 무리에 꿋꿋이 맞서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오직 우리 주님에 대한 굳센 믿음,
그리고 그분 현존에 대한 강력한 확신, 그분에게서 퍼져나오는 강력한 구원의 빛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태 8,34)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진정 제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아주 고요해집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평생 잊지 못할 이런 위기 통과의 기적 체험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은 결코 혼자가 아닌 주님과, 도반들과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밖의 풍랑보다 더 위태롭게 하는 것은 내면의 마음속 두려움과 불안의 풍랑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일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고
믿음의 여정중 우리 마음속 풍랑은 물론 밖의 풍랑까지 고요히 해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신부)
7/2(수) [(녹)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태 8,34)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진정 제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7월2일9수) 7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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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묵]2025년 6월 29일 주일[(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 주일)]/신부님 강론 4개 (4) | 2025.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