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1년 8월 11일 수요일[(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성녀 클라라 대성당의 성 다미아노 십자가 경당 모습 사진 등.

마르티나 2021. 8. 11. 10:41

오늘 전례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다. 1253년 선종한 그녀를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입당송

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님의 화관, 영원한 동정의 화관을 받았네.

본기도

하느님,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끄시어 가난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삼십 일 동안 애곡한 뒤에, 모세에게 안수받은 여호수아의 말을 따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타이르라고 하시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4,1-12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6(65),1-3ㄱㄴ.5와 8.16-17(◎ 9ㄱ과 20ㄷ 참조)
◎ 제 영혼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찬양 노래 울려 퍼지게 하여라. ◎
○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입으로 그분께 부르짖었으나, 내 혀 밑에는 찬미 노래 있었네.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필리 3,8-14)와 복음(마태 19,27-29)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동정녀 클라라를 기리는 저희가 놀라우신 주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 엎드려 청하오니
그의 공로를 기꺼워하셨듯이
저희가 바치는 제사도 기쁘게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5,6 참조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
<또는>
시편 27(26),4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클라라를 본받아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클라라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감동받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보면 당시 수도 생활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며 가난과 기도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클라라 성녀의 침실은 맨바닥에 약간의 풀을 모아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녀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가난함을 얼마나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가 숨을 거둔 자리에 있는 장식 없는 십자가는 그녀가 한평생 얼마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관상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1240-1241년 사라센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심한 병 중에 있던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들과 수도원을 구하고자 성광에 성체를 모시고 나가 적군 앞에 섭니다. 성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흘러 나와 사라센 군대는 그만 두려움에 도망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성녀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한 생활입니다. 40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일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단장하십시오.”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성녀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놀라운 겸손과 비할 수 없는 가난을 배웁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바라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거울 삼아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신부님 강론>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강론

 

멋지고 아름다운 삶

-기도가 답이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 4)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얼마전 8월 기도의 지향을 발표하셨습니다. 즉 모두를 교회의 변형을 위한 작업에 초대하셨습니다. 성령에 영감받아 기도와 애덕, 그리고 섬김을 통한 “우리 자신의 개혁(a reform of ourself)”을 시작하는 작업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새삼 무엇보다 우리의 개혁에, 내적혁명에 기도보다 우선적인 것은 없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기도가 답입니다. 늘 기도에 늘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기도의 대가大家이자 달인達人인 모세를, 예수님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클라라를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도반이었던 성녀 클라라 축일입니다. 성녀 클라라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61세를 사셨습니다. 성녀에 대한 약전略傳입니다.

 

-성녀는 40여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섬기며 살았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성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성녀를 찾았다.

성녀는 42년의 수도생활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으며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여 모든 일을 이루어냈다. 1253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 임종어인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신 주님은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선종 2년만인 1255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성녀를 칭송했다.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참고로 오늘 화답송,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자.”(마태25,6)는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였습니다. 클라라의 거룩한 삶은 순전히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할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점차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어제 방문한 도반道伴 사제에게 준 기도에 대한 조언이 생각납니다. 더불어 자기 본당 신부를 ‘보좌신부의 수호성인’이라 칭찬하던 모습이 기분 좋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신부님의 서품상본 성구가 기막히게 좋습니다. ”아빠! 아버지!“(마르14,36) 성구를 호흡에 맞춰 들숨시 “아빠!” 날숨시 “아버지!”하고 끊임없이 되뇌이며 바치면 저절로 참 좋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호흡하며 살 때 서서히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될 것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작품이, 기도의 작품이 오늘 모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로서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오경이 끝납니다. 그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신명기 마지막 34장 모세의 죽음이 감동적입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참 멋지고 아름답게 살았던 기도의 달인, 모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34,10ㄴ)란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 길다 싶지만 모세를 기리는 마음으로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에서 죽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모른다.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일 동안 곡하였다.‘(신명34,4-8)-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살다가 떠나는 모세의 장엄한 죽음이 참 부럽습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벗으로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살다가 떠나야 할 때 공동체의 애도속에 자취없이 잘 떠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이 또한 잘 살아 온 결과에 대한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실은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와의 관계입니다. 흡사 릴레이 경주시 바톤 텃치를 연상케 합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신명34,9)

 

말그대로 여호수아는 ‘신의 한 수’입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여호수아입니다. 하느님의 뜻, 공동체의 뜻에 따라 제 바톤을 이어 받아 원장직에 충실한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제 사랑하고 신뢰하는 후배이자 현재의 원장인 파코미오 수사를 대할 때 마다 하느님 은총의 섭리에 놀라움과 더불어 연상되는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필시 모세 역시 인간적으로 서운하고 아쉬운 점이 있었겠듯이 저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섭리의 사랑이 하늘같이 크기에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 감동, 감탄하게 됩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모두가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요즘 제게 절박하게 와닿는 것은 삶에서의 떠남인 죽음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모세를 롤모델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분들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모세보다 위대하신 예수님이심을 히브리서는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세우신 분께 충실하셨습니다. 그러나 집을 세우신 이가 집보다 더 존귀하듯이, 예수님도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셔야 마땅합니다.”(히브3,2-3) 

 

바로 2천년 이상 계속되는 주님의 집인 가톨릭 교회가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기위해 모든 절차를 밟으며 최선을 다해 해결할 것을 권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공동체의 문제아 형제들에 대해서는 처벌이 아닌 화해와 치유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겸손과 분별의 지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서 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갈 때 이런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입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 기도에 충실할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공동체를 원하십니까? 모세를, 예수님을, 클라라를 닮고 싶습니까? 기도가 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 예수님과 함께 기도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여 당신은 좋으시고 인자하시며, 당신께 비는 자를 크게 어여삐 여기시오니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이 간구하는 소리를 귀여겨 들오소서."(시편86,5-6). 아멘. 

 

 

성녀 클라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의 성 다미아노 십자가 경당 모습입니다. 이곳에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던 십자가 진본이 모셔져 있습니다. 2006년 5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2. 8.11."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것이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강론

 

 마태 18, 15-20(연중 19 수)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방법과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교정방법과 절차를 네 단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여,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과 절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라”는 말을 되새겨 봅니다.

또한, 그는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 때문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한 형제를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교정 받으면서 한갓 잔소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하여 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못한 형제를 위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마태 18,19 참조).

성 베네딕도도 그의 [규칙서]에서 바로 그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그가 내 형제임을 알게 하소서!

형제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게 하소서.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아멘.

 

3.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의 공동체에 꼭 머물러야 하는 이유: 사귐에 원한이 없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둘이나 셋,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말할 자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잘못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죄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말해줄 용기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잘못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상대와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는 나의 감정도 다치기 싫고 상대도 잃기 싫은 복합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줄 용기가 없다면 어차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이고 무관심입니다.

 

    집착과 무관심은 반대 같지만 실상 같은 심리입니다. 애인이 없을 때는 결혼 안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목을 맵니다.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좋습니까? 매우 무섭습니다.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나에게 잘못을 해도 그 잘못을 절대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상대가 나에게 잘못하는데도 그냥 참아내고 있는 것은 다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공동체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가족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살 수 없다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또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니면 더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 안에 고립되는 이유는 더는 아프기 싫어서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해도 그냥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던가를 선택합니다.

    

    김창옥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나와서 ‘학창시절 많이 놀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의한 것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놀던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갈까요? 시집을 잘 간다는 것을 세속적으로 표현해 볼게요.

첫째 남편의 경제력이 매우 좋습니다. 둘째 남편과 너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셋째 그 여성은 이제 놀지 않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회개했습니다. 많이 놀아봐서 원이 없습니다. 오빠들도 너무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러니 더는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만날 오빠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항상 감사합니다. 이것을 자족(自足)이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願)이 없습니다.

 

    놀아봤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원(願)이 한(恨)으로 바뀝니다. 원과 한의 합성어가 무엇입니까? 원 + 한 = 원한. 원한이 있는 귀신은 어디를 떠돕니까? 구천! 현대 사회의 구천이 어디예요. 백화점. 아무것도 안 사면서 그냥 걸어 다닙니다.”

 

    웃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은 언제 원한이 쌓일까요? 사랑받지 못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 원한으로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안에 고립되거나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도 못 하는 집착으로 휘둘리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마치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백화점을 계속 걷는 사람의 모습과 같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의 아픔이 감사함이 됩니다. 그 사람과 계속 사귀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누군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돌아갈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에게 잘못된 것을 말해주고 충고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나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그 안에 머물면 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원도 없고 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용기 있게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꼭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용기 있고 당당하고 또 이타적인 사랑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로마의 성 가비노와 성녀 수산나의 무덤......성 가비노는 수산나의 아버지(축일 2월19일), 수산나의 축일은 8월11일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입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조건을 채우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채울 수 없는 조건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외모, 학력, 재산, 능력, 명예를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땀을 흘린다 해도, 노력한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얻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많은 조건을 채운 사람 앞에 서면 나의 행복은 사라지게 됩니다. 조건은 비교하게 되고, 비교를 통해서는 행복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1등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큰 아파트에서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더’라는 것은 늘 비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조건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아서 결국 방향을 바꾸어야합니다.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울수록 더욱 심한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볼리비아의 가난한 지역에서 선교사로 있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조건으로 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모습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고, 선교사의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비포장 길을 낡고 오래된 차를 몰고 덜컹거리면서 달려도 행복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를 기다리는 공소의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맑게 웃으면서 선교사를 환영하는 신자들을 생각하면 비포장의 덜컹거리는 길도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타는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신문사의 일을 비롯해서,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미사도 해 주고 있습니다. 몸은 피곤 하지만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강론을 듣기 위해서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어느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발견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구름, 들에 핀 꽃, 흐르는 시냇물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봄에 심었던 코스모스가 하얗고, 빨간 꽃망울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제 바람이 불면 예쁜 꽃잎이 나를 위해서 춤을 출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도 행복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선택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발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선택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사람으로 오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이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는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아주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많은 행복을 발견하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거저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클라라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선택한 일에서 행복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성녀 클라라 

 

5. 매일미사 묵상 결론 기도문

 

2021년 8월 11일 수요일[(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성녀 수산나 기념일)

말씀의 초대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삼십 일 동안 애곡한 뒤에, 모세에게 안수받은 여호수아의 말을 따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타이르라고 하시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그가 내 형제임을 알게 하소서!

형제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게 하소서.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아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공동체에 함께 머무르니 감사기도 봉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