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7월 24일 주일[(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전삼용-조재형-이수철-이영근 신부 강론
[매묵]2022년 7월 24일 주일[(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전삼용-조재형-이수철-이영근 신부 강론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도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성령을 내려 주시어, 우리가 아버지를 굳게 믿으며 꾸준히 기도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8,20-32
그 무렵 2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
○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
○ 주님은 높이 계셔도 낮은 이를 굽어보시고,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알아보시나이다. 제가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원수들의 분노 막아 저를 살리시나이다. 당신은 손을 뻗치시나이다. ◎
○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2,12-14
형제 여러분,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13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청하는 교회를 굽어보시어, 언제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좋은 것을 베풀어 주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통치자이신 주님, 정치인들에게 주님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시어, 의로운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며 공동선을 찾고 실현하게 하소서.
3. 노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협조자이신 주님, 민족의 뿌리와 기억의 상징인 노인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이 경험과 지혜로 젊은이들을 도움으로써, 젊은이들이 희망과 책임감을 가지고 미래를 만들어 나가게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애로우신 주님, 조부모와 손자 손녀가 한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들을 보호해 주시어, 사회의 편견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소외되지 않게 하시고, 온전한 공동체로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예물기도
이 거룩한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힘으로
저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
마침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또는>
마태 5,7-8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으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성자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이 선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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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뇌물과 선물 구분법
영화 ‘선생 김봉두’(2003)의 내용입니다. 김봉두 선생은 촌지를 밝히는 못된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을 차별합니다. 그러다 봉변을 당합니다. 이런 사실이 공공연하게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과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사정을 하여 아무도 가기 꺼리는 폐교 직전의 강원도 산골 학교에서 몇 년동안 지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 촌지를 받던 것과는 사뭇 다른 시골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다섯 아이의 부모가 차려주는 술자리도 고급 주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담배 살 곳도 없습니다. 그러다 어떤 할아버지에게 담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지만 양담배만 찾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다섯 아이 중 양소석이란 아이는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먹던 라면을 그 아이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에게 급식을 주게 됩니다. 이에 아이들은 자습만 시키는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김봉두 선생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봉투 하나씩을 주며 편지와 감사의 마음을 채워오라고 합니다. 부모님과 꼭 상의해서! 그런데 받은 봉투 안에 든 것은 아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과 더덕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김 선생은 산골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아이들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발견하여 아이들을 다 도시로 전학시키면 학교가 폐교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찾아 발전시켜 주는 선생님에게 감동합니다. 부모들도 감사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듣고 도시에서 부잣집 아이가 이사를 옵니다. 그 부모는 선생님에게 촌지를 줍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물들어버렸는지 그 촌지가 썩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자 김봉두 선생은 자신을 짜증 나게 하는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립니다. 서울에서 이사 온 아이가 시골 아이들을 깔보며 그들 탓을 하자 싸움이 붙습니다. 서울 아이의 엄마는 이게 알아서 해 주는 것이냐며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탓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유 없이 선생님에게 맞았음에도 선생님 편을 들어줍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봉투에 써 왔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봅니다. 순수하게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각성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 물들어갑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것들을 선생님에게 가져다 바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소석이는 자신이 일해서 번 3만 원을 선생님 집 문에 꽂아둡니다.
김봉두 선생은 소석이를 찾아가서 종아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안아줍니다. 자신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타락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폐교 결정이 내려집니다. 눈물의 졸업식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진정으로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안 받으려고 했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환에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도시에서 촌지를 주었던 부모나 학생들은 선생님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강원도 시골에서 있던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만이 선생님에게 조문을 옵니다. 김봉두 선생은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받는 선물에는 선물을 주는 이의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누구다”라는 말이 쓰여있는 것입니다. 촌지를 주는 사람들은 “당신은 쓰레기야. 돈을 줘야 내 자녀 잘 봐줄 거 아냐?”라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선물을 받으면 정말 쓰레기가 됩니다. 이런 선물을 ‘뇌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뇌물을 줄 수도 있고 뇌물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김봉두 선생처럼 타락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주기 위해 주는 선물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고 그저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란 믿음이 들어있고 이것을 받으면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재로 믿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 있는데 이것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심이고, 둘째 부분은 벗이 왔다고 빵 세 덩이를 잠자는 친구에게 귀찮게 청하는 내용이며, 세 번째 부분은 성령을 청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 부분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정받았습니다. 에덴동산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덜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교만해졌고, 더 육욕에 빠졌으며, 더 소유하려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 은총을 거저 주지 않으시고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밥을 안 주면 주인을 무는 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물리는 것이 두려워서 개에게 음식을 준다면 이는 그 개를 겸손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더 소유욕-식욕-지배욕에 빠지게 만듭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간절히 청하기 전까지는 주인이 주면 안 됩니다. 갑과 을이 바뀌면 개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성령의 선물을 청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러하셨듯이 청빈-정결-순명의 세 빵을 갖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이 세 개의 빵을 갖지 못하면 친구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꾸준히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을 청해 복음삼덕을 키워야 합니다.
기도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성령으로 삼구가 죽고 복음삼덕이 피어난 에덴동산과 같은 마음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러려면 내 동산을 망치는 세속-육신-마귀를 죽여야 하는 데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기도를 끈질기게 바치는 일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창세기에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때가 되어 비가 40일 동안 내리고 물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면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몇 번을 청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있다면, 45명만 있다면, 30명만 있다면, 20명만 있다면, 10명만 있다면 심판을 하지 않도록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단 한명의 의로운 사람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지만 외면했습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배가 12척 있습니다.’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우리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이 있을지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IMF’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국가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문들 닫아야 했고, 실직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금모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2007년 태안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로 기름을 닦아 냈습니다. 20년이 넘어도 오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년 만에 청정한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위기는 파도처럼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본당이나, 시설에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사목적인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결실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통합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듯이, 무한 경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열정, 신념, 헌신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야기한대로, 열정적인 사목자가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교회에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실 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세상은 좀 더 환하고,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냉담하는 신자들은 다시금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활력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다시금 교회의 그늘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름이 지나면 입시철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에는 많은 분들이 치성과 정성과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청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가 다르다고 입시철이 끝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볼일 다본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사찰과 교회 그리고 성당은 피서 끝난 바닷가처럼 썰렁함을 봅니다. 매달림과 청원의 기도가 있다면,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무엇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인가! 저는 아브라함 링컨의 다음 말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두 팀 모두 성호경을 그으며 게임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기도는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리라, 내가 하느님 편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때로 외롭고 힘든 골고타 언덕길이라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기쁨으로 따라나서는 것이 참다운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2.7.24.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창세18,20-32 콜로2,12-14 루카11,1-13
기도와 삶
-사랑, 항구한 기도, 주님의 기도-
참 빠르게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벌써 7월도 막바지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이자 제2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관심과 배려가 주효했던 기념일입니다. 교황님은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리라”(시편92,15)는 주제로 아름답고 깊은 담화문을 발표하셨고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조부모와 노인은 이 세상에서 ‘온유의 혁명’을 이루는 장인匠人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노년은 항해를 포기하고 돛을 접어야 하는 때가 아니라, 여전히 열매를 맺는 시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닌 가장 소중한 도구이며 가장 어울리는 일인 기도를 더욱더 언제나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배워 이 혁명을 이뤄가자. 그리하여 기도의 시인이 되고, 고유의 말을 찾아 나가는데 맛들이고, 하느님 말씀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잘 받아들이자.”
누구나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년에 죽음입니다. 어떻게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과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온유의 혁명을 이루는 것, 기도의 시인이 되는 것은 바로 기도의 은총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입니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의 꼴을 형성해 주는 것이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이뤄주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제가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바로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반드시 우선순위가 지켜져야 합니다. 바로 첫째인 하느님 믿음이요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진정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의 궁극 목표인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닮았나 우리 얼굴을 검사하실 것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인지요.
그러니 말 그대로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기도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졸업이 없는 사랑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기도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봉헌회 형제자매님들의 신원이요 정체성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이자 봉헌회 회보, 첫표지의 글자입니다. 마침 2022년 7월, 220번째 회보를 읽어봤습니다. 알찬 내용, 꽃같이 환한 얼굴들로 가득한 사진들이 참 아름답고 풍요로웠습니다. 1면 ‘여름휴가’라는 서경윤 알베르트 신부님의 컬럼 마지막 말마디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매일 열심히 성무일도를 바치는 봉헌회원 여러분, 존경합니다.” 저는 이에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말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참 좋은 기도와 삶을 위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참으로 기도만이 인간의 고질병인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궁극의 답이기도 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와 더불어 순수와 열정도 샘솟습니다. 참으로 기도를 잘해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시며 도반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대가, 기도의 대가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세례의 은총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닮아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삶을 살 수 있고, 저절로 사랑 안에서 기도와 삶은 하나가 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항구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만이 성덕의 잣대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 하나인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참으로 권위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기도와 믿음, 삶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백절불굴, 칠전팔기 영적탄력 좋은 파스카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입니다. 흡사 하느님과의 줄다리기 싸움처럼 참 집요한 아브라함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참 깊고도 깊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느님의 벗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려 여섯 번의 반복된 물음에서 불쌍한 중생들을 살리려는 아브라함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말그대로 감동입니다. 의인 50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옵니다. 마지막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 열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열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아브라함이 바로 의인입니다. 이번 피정에 참여한 50명 봉헌회원님들이 바로 의인들입니다. 가라지밭같은 현실에서도 세상이 존속하는 것은 세상 곳곳에 의인들이, 성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서 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무엇이 필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달아 압니다. 바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 선물 하나 받으면 필요한 선물들이 줄줄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는지요.
셋째,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전 성경의 요약이자 예수님 삶의 요약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당신의 노하우 기도방법을 전수하십니다. 예수님의 단순소박한 본질적 깊이의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보다 두 청원이 빠졌지만 충분합니다. 아버지라는 정다운 호칭으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1.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2.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5.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는 일방적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무책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 숙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을 단순소박하고 투명하게 해줍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관상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의 선물에 응답하여,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을 위해,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또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자 훈련이고, 특히 기도도 선택이자 영적훈련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를 선택하여 훈련하듯 끊임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사랑의 기도가 우리를 주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의 삶으로 이끌어 주어 나날이 주님을 닮게 합니다. 기도의 시인으로, 온유의 혁명을 이루며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4. 이 영근 신부님 강론
220723.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 13,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5)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