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2일 수요일[(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첫째 미사]/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2. 11. 2. 22:26

[매묵]2022년 11월 2일 수요일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첫째 미사]

 

오늘 전례

(『로마 미사 경본』: 943-946면 / 『미사 독서』3: 460-470면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 모든 사제는 세 대의 위령 미사를 거행할 수 있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입당송

1테살 4,14; 1코린 15,22 참조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듯이,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가시리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리라.

본기도

주님,
성자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저희의 믿음을 깊게 하셨으니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고
저희도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굳건한 희망을 지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7과 8ㄷ과 9ㄱ.13-14(◎ 1ㄱ 또는 13)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또는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자비를 베푸시어 응답하소서.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25,3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의 빛이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밝히고, 구원의 희망을 전하며, 참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물의 주님, 온 인류가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는 지구를 굽어보시어, 인류가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며 더욱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게 하소서.

3.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보살피시며, 특히 거리의 아이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전쟁의 피해자가 된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보장받고 가정의 사랑을 되찾도록 도와주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위령 성월을 맞은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살펴 주시어, 공동체를 위하여 일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다 함께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성자께서 세우신 사랑의 큰 성사로 하나 되어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이 성자와 함께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위령 감사송 1 :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부활의 희망>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1,25-2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을 위하여 파스카의 신비를 거행하고 비오니
그들을 빛과 평화의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위령의 날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어떻게 살아야 하나?

-“슬기롭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25-26)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바로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이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였습니다. 얼마나 신랑이신 주님을 만나길 갈망한 죽음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느 자매가 들려준 남편의 마지막 유언,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마지막 임종어에 모든 앙금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죽어서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이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이냐?”의 질문에 대한 답에 흡족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물어도 이와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의지대로 될 수 없는 은총이지만 간절한 소원은 오늘부터 남은 동안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정말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하루하루 전 일상의 평범한 삶자체가 죽음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어 11월 위령성월 둘째 날 위령의 날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올해는 며칠전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6명의 희생자들로 인해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위령의 날이 되었습니다. 

 

8년전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312명이 희생됐던 날이 사순시기 성주간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가톨릭의 성주간의 전례시기 중이라 잊혀지지 않는데, 이번 이태원 참사는 위령성월을 앞둔 참사라 또 길이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이 되겠습니다. 새삼 마음 아파하는 희생자들의 모든 어머니들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인 가톨릭 교회는 종파와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보편적 어머니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과 직결됩니다. 한마디로 하루하루 깨어 ‘슬기롭게’ 사는 것이며, 슬기로운 삶의 위한 네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삶은 끝이 있습니다.

엄연한 삶의 진리입니다. 삶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끝은 시작입니다. 겨울후 부활의 봄이듯 죽음이후에는 부활의 새로운 삶입니다. 아니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이미 살아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이미 영원한 파스카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이 참 영원한 희망입니다. 위령감사송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둘째, 삶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삶의 중심이 없어 혼란이요 방황이요 뿌리없이 표류입니다. 주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내릴수록 내적평화와 안정이요, 믿음의 뿌리가 얕고 빈약할수록 점증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이래서 삶의 중심인 주님이 고마워 저절로 나오는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어지는 제 행복기도 고백도 주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하루이옵니다.”

 

셋째,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많이’ 햇수의 양量이 아니라 ‘참으로’ 사는 햇수의 질質입니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찬미하며 사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서 말씀이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넷째, 깨어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깨어 준비하며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기름등잔에는 신망애信望愛의 기름이 늘 채워져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의 영혼 등잔들에는 기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었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확인도 안했습니다. 이건 이태원 참사처럼, 천재天災가 아니라 순전히 인재人災입니다.

 

영혼등잔의 신망애의 기름은 각자 평생 하루하루 마련해야 하는 것이지, 일순간에 마련되는 것도 아니고,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깨어 준비하며 등불은 환히 켜들고 있다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입장이 좌절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나중에 기름을 채워 왔지만 문은 닫혔고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닫힌 문을 두드립니다만 주인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요지부동 단호합니다. 이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보속하라, 대속하라, 찬미하라, 사랑하라, 섬기라, 기뻐하라,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죽어서는 회개도 보속도 대속도 찬미도 사랑도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죽음의 문이 닫히면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평상시 삶 전체가 죽음 준비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있다가 주님과 함께 천국잔치에 입장합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 오실 날을 대비하며 살게 합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

 

+주님, 세상 떠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옥의 존재 이유: 우리 안에 다 자라지 못한 십자가가 있다.

 

영화 ‘사일런스’(2017)는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선교하러 갔던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듣고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도 일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카오에서 그들을 안내해 줄 기치치로라는 일본인을 만납니다. 그도 천주교 신자였지만, 가족이 다 화형당하는 것을 보고는 배교하고 마카오로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배로 일본에 도착하자 그는 도망쳐버립니다. 다시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행히도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은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 보호를 받게 되고 그들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줍니다. 

 

    다른 마을에 갔을 때 기치치로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에서 종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믿음이 육체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순사들이 와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기치치로는 순교의 고통을 피하고자 예수님 십자가상에 침을 뱉고 후미에(예수님 모습이 새겨진 동판)를 발로 밟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피신을 하다가 산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이때 기치치로가 그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배교를 한 것에 대해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 묻어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사제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기치치로에게 또 고해성사를 줍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모릅니다. 기치치로가 바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다만 자신은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치치로는 다시 약해집니다.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많은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는 돈 때문에 마치 유다 이스가리옷처럼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아넘깁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배교를 강요받습니다. 한 사제의 배교가 많은 신자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치치로는 감옥까지 와서 또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만약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꾸준히 고해성사를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한데 작은 것입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참히 순교의 고통을 겪는 신자들을 더는 지켜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결국엔 예수님의 얼굴을 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고 공직자로 선교사 색출을 도와주며 평생을 삽니다. 그가 죽어 화장할 때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기치치로처럼.

 

 

    오늘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의 본격적인 시작인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오직 가톨릭 교회만 연옥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옥이 있어야만 하고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가 기도하면 그 고통이 감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해 주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 성녀를 통해 주시는 기도문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오랜 시간 바쳐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신앙의 완성은 내 안에 떨어진 믿음의 씨앗을 얼마만큼 키우느냐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씨앗은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십자가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나를 완전히 매달아 죽일 정도로 성장합니다. 그렇게 커졌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나 기치치로처럼 작은 믿음으로 작은 십자가만 지닌 채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손에 들어올 작은 십자가의 크기로는 나를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옥에 가야 할까요? 하지만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믿음을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십자가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작은 십자가만 가지고 있는 신자를 하느님 나라에 들여보내면 어떨까요? 그는 죄를 지을 것이고 다른 이는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다시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에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를 신앙을 가지고 용서하였다고 합니다. 딸 아이를 낳고 큰맘 먹고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딸도 추행했다는 것입니다. 딸의 상처를 아는 아버지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육체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은 아버지가 뉘우친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안에는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커다란 십자가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작은 믿음만을 지닌 사람을 천국에 보내면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딸은 아버지가 아버지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모습이 보일 때까지 조금 더 고통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형들에 의해 팔려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이집트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재상이 됩니다.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해야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계속 괴롭힙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합니다. 결국 유다가 요셉이 잡아놓겠다던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갇히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용서해 줍니다. 남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용서를 보류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 안에 자라나는 십자가를 완전하게 성장시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못된 장난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연옥은 이런 자비의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기도하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굳이 그러한 고통으로 나아가지 않고 수련의 시간을 충실히 받게 됩니다. 연옥이 우리를 더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는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하지만,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그 믿음의 성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이 쳇바퀴 도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연옥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 지상에서의 상입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1997년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물이 범람하면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홍수가 예측되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강에 쌓아 놓은 둑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범람하는 물의 피해를 줄이고 도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둑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 이 사실을 방송을 통해서 미리 알았습니다. 책임을 모면하려는 장관이 언론에 사실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수 없다며 둑으로 오는 공무원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혼신을 다해서 둑 위에 모래주머니를 높이 쌓았습니다. 결국 둑을 여는 일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시는 물에 잠기는 커다란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둑에 쌓았던 모래주머니로는 범람하는 물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둑을 열지 않았지만 둑은 범람하는 물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전문가의 말을 듣고 둑을 열었다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물에 잠겼겠지만 도시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정부의 약속대로 피해보상을 받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결정이 최선인 것 같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먼저 성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바벨탑이야기입니다. 바벨탑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우상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이웃의 희생으로 쌓아올리는 욕심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리석음의 탑이었습니다. 줄을 세워야 하는 바벨탑은 앞에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있는 사람은 밀쳐버리는 경쟁의 탑이었습니다. 그런 바벨탑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바벨탑을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탑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겸손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강도당한 사람을 기꺼이 치료해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대와 화합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모세가 구리뱀을 세워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부활의 탑입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21101.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잘 익어 가는 11월의 가을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축복과 자비가 잘 익어 성덕의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정녕, 가을은 하나의 변화의 극점입니다. 자신을 찬란하게 꾸며오던 일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일에로의 건너감입니다. 그것은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나뒹구는 낙엽처럼, 매여 있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이끄심에 끌려 다니는 일입니다. 임을 찾아 바삐 달리던 일에서, 찾아 만난 임과의 속삭임에로의 건너가는 일입니다.
 
이제는 뒹구는 낙엽처럼,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기를,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기를,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워지고서야 타인의 존귀함이 보이고, 허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자신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 안의 자신과 홀로 고독할 줄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에 힘입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에 거름으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입니다.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항상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유해 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 제4장 62절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되새김 구절]

 

1.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이수철 신부)

 

2.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그 믿음의 성장을 요구합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조재형 신부)

 

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58일(58/100일) 기도]

 

주님!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천국에 간 그들처럼...

천국에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1월2일(수) 오후 10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