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4일 금요일[(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2. 11. 4. 09:59

[매묵]2022년 11월 4일 금요일[(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1538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오 4세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주님,
복된 가롤로 주교에게 심어 주신 굳센 정신을
주님의 백성에게 부어 주시어
교회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저희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우리는 구세주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2(121),1-2.3-4ㄱㄴ.4ㄷㄹ-5(◎ 1 참조)
◎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
○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

복음 환호송

1요한 2,5 참조
◎ 알렐루야.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 알렐루야.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로마 12,3-13)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목자의 열성과 뛰어난 덕행으로 복된 가롤로 주교를 들어 높이셨으니
그를 기념하여 주님 제대에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이 제사의 힘으로 저희도 복음을 실천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가롤로처럼 형제들을 충실히 섬기며
온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인성월(聖人聖月)

-성인이 되십시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을이 참 좋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의 가을은 그대로 기도의 계절입니다. 정말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회개하고, 많이 사랑과 겸손과 지혜를 배워야 하는 만추晩秋의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이 깃들 여지가 없는 기도의 계절, 은총의 계절, 빛의 계절인 가톨릭 교회의 가을입니다.

 

11월1일, 위령성월의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마침 어제 성녀처럼 사시다가 성녀처럼 미사중 선종하신 어느 수녀님이 이날 입관식을 했고, 11월2일 위령의 날에 장례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정말 성녀처럼 사신 수녀님이구나!’ 깨달음처럼 스친 생각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감동했습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요즘 자주 권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제 소박한 소원도 성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며, 누구나 믿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성인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으며,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되었을 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는 참자유, 참기쁨, 참평화, 참행복의 하늘나라 삶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서에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우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라.”(성규4,62)

 

사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1월 위령성월慰靈聖月을 성인성월聖人聖月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만추의 가을, 성인이 되도록 특별히 노력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1월은 위령성월이자 성인성월입니다. 11월1일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은 곡도 가사도 아름답고 흥겨워 11월 한달동안 끊임없는 노래 기도로 바치려합니다. 책상 앞에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펼쳐 놓았습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또 하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는, 제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참 자주 인용하지만 늘 읽을 때마다 힘이 나고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선종의 복된 죽음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만46세로 선종하기 까지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던 성인이요, 그의 삼촌은 비오 4세 교황입니다. 비오 4세 교황에 이어 강력한 교황의 후보였지만 성인은 겸손히 사양했고 24년 동안 밀라노 대교구장이 되어 눈부시게 활약했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말년 행적을 소개합니다.

 

‘1576년,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성인은 병자들을 돕고 시신을 매장하는 데 온갖 도움을 제공하였다. 귀족들이 흑사병을 피해 모두 도망쳤을 때도 성인은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흑사병이 유행하는 중에도 병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하며 병자성사를 주었고,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며, 예방법을 주지시켰다. 

성인은 오랜 극기와 과로로 핍진되어 1584년 11월3일 밀라노에서 46세로 선종하였고, 1610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이 선종 직전 마지막 남긴 말, 임종어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

얼마나 멋진 임종어인지요! 늘 주님 앞에서 깨어 살았던 삶임을 입증하는 성인의 임종어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라 하시며, 먼저 세상 맛에 자기를 잃고 난잡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개탄한후 우리 모두 하늘의 시민으로 성인답게 살 것을 격려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도의 마지막 주님을 대신한 격려 인사는 참 고무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약은 집사의 비유를 통해 성인이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미래를 대비하는 약은 청지기의 민첩하고 신속한 대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인 주인은 이 불의한 집사의 죄를 추궁하기는커녕 칭찬합니다. 사실 주인은 내심으로는 묵인하며 흡족해 했을 것입니다. 

 

왜냐,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제가 알아서 스스로 살길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부자에게 이런 손실은 새발의 피일 것입니다. 새삼 어떤 부자인 주인이 상징하는바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얼마나 멋진 주님이요, 기민하고 과감하게 위기를 타개한 약은 집사인지, 순진한 바보가 되지 말고, 그의 처신을, 현실적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세상의 자녀들 못지 않게 영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빛의 자녀, 성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의 설명이 명쾌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러분, 집사의 비양심적인 면은 일단 덮어둡시다. 다만 그가 얼마나 민첩하게 실직 대책을 세우는지 눈여겨 봅시다. 과연 그는 약삭빠르게 실직 위기에 대처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종말의 심판이 곧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집사마냥 민첩하게 대책을 세우시오. 어서 회개의 결단을 내리라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가 성인이 되게 합니다. 회개 은총과 더불어 뛰어난 위기 대처의 지혜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지혜를 겸비한 빛의 자녀로 성인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에서 “아버지고 동생이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세요” 내용입니다. 조 변호사는 좀 특이한 소송을 맡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건물에서 나가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소송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동산 소유주는 누나이며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서울에 있는 자기 건물 2층에서 아버지와 남동생이 살 수 있도록 별도의 보증금이나 월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10년째 그 건물에서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누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합당한 보증금과 월세를 내라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 체결을 요구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기존의 무상 임대차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을 나가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소장 내용만 보면 아버지와 남동생은 6개월 이내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나가면 마땅히 잠잘 곳도 없는 상황인데 누나가 이렇게 갑자기 매몰차게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데 대해 아버지와 남동생은 누나에게 크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나는 돈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엄동설한에 바깥으로 내몰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오갈 데도 없는 아버지를 추운 겨울에 내쫓는다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법은 천륜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조 변호사가 더 깊은 내막을 알고서는 누나가 아닌 천륜만 고집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누나와 형욱 씨는 10살 터울입니다. 아버지는 외항선을 타는 뱃사람이라 집에서 자녀들과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더는 배를 타지 못하고 노름과 술에 빠져 어머니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을 참다못한 어머니는 누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출했고 이후 누나는 아버지와 형욱 씨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형욱 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덕분에 형욱 씨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누나는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고 형편이 조금 안정이 되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의정부에 두 채의 건물 소유주가 됩니다. 누나는 사업을 해보겠다는 형욱 씨를 위해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형욱 씨는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결혼을 아버지와 동생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남자의 학력이 고졸이고 분명 누나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달라질 줄 알아서 남자 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면전에서 면박까지 주었습니다. 

 

    조 변호사는 변호를 의뢰한 형욱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욱 씨, 제가 하자는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제가 이 사건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욱 씨에게 이러한 글을 재판할 때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소송을 진행하다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에게 누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 컸습니다. 특히 매형 될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따뜻함을 그분에게서 느꼈을 텐데 이를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나는 평생 누나에게 짐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번 사건의 결과에 상관없이 더 이상 누나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초안을 읽어본 형욱 씨는 난처해 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소송은 지게 되어 있고 방법은 이것 뿐이었습니다. 형욱 씨는 못내 불안해하면서도 이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3주 뒤 재판 당일, 누나 측 변호사는 “재판장님, 원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구적인 무상사용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한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누나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돈을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이 야속했던 것입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살고 있던 건물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가족 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 비유입니다. 결론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입니다. 나를 맞아들일 친구를 불의한 재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의롭지 않은 재물이란 나의 것이 아닌 재물을 의미합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여긴 데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핑계로 누나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책과 같은 것에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처럼 누나의 재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것입니다. 누가 나의 것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다고 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가족도 필요 없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아버지가 아이가 드라이버로 자기 스포츠카에 낙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쳤습니다. 아이의 손이 부러졌고 아버지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무슨 낙서를 했나 보았습니다. 

    “LOVE U DAD”(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어떤 물건에 ‘나의 것’이란 표를 해 놓으면 나는 가족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의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맞아들일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나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평생 거처를 다시 얻었습니다. 나의 것이란 생각만 없애도 그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스님은 자신이 아끼던 난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니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소유의 자유를 말하며 가진 것을 최소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난을 선물하였다면 그 난에는 아직도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미련이 남거나 상대에게 보답을 기대합니다. 불교에서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안 계시는 것이니 가지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무소유는 가진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면 많이 갖건 적게 갖건 내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내가 가졌지만, 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 위에 ‘주님 것’이란 이름을 써 놓아야 합니다. 

 

    유학시절 함께 방을 쓰던 아프리카 친구가 저의 것을 자꾸 자기 것처럼 쓸 때 짜증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어떤 분이 “내 것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내 것이라는 말을 안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꾸 “내 것”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외톨이가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면서도 “어차피 내 거 아냐!”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롭지 못한 것”, 곧 주님의 것을 내가 유용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나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소유이지 나의 것을 다 내어주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나의 것이 애초에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다 주님 것을 맡겨 놓은 것으로 여기고 가지고 계십시오. 그래도 무소유입니다.욥의 이 말을 새깁시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욥 1,21)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사와 사도적 실천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여러 성사가 있었지만 제게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신품성사였습니다. 사제에게 술을 사드리고, 음식을 사드리는 것이 사제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끔은 사제를 핑계로 대고 늦은 시간까지 유흥을 즐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사제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 사제에게 쓴 소리를 하는 것도 신앙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사를 집전하고, 사목하는 것이 사제 본연의 사명이기에 사제가 놀 수 있도록 배려하기 보다는 사제가 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신앙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소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기도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제게 도전을 주고, 사제 직무를 수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신앙인 보다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신앙인을 더 가까이 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견진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성령의 은사를 생각하고 그 중에서 특히 용기와 지혜의 영을 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병자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숙지하고 전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백성사에 대한 가르침으로는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고, 나의 잘못도 용서를 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혼인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배우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혼자된 사람이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부부는 가정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성체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미사참례를 성실하게 준비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사생활을 충실히 하고, 그 의미를 삶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는 성사와 준성사가 있습니다. 성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사는 그에 따른 은총이 주어집니다. 성사의 은총은 집전자와 참여자의 인품이나 신앙에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햇빛이 골고루 비추듯이, 비가 골고루 내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은 성사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준성사는 교회에서 만들었습니다. 준성사는 그 자체로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준성사는 집전자나 참여자의 정성과 갈망이 필요합니다. 안수, 축복, 성호경과 같은 것들이 준성사입니다. 폐차장의 주인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축복을 받은 차들은 사고가 났어도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성호경을 정성껏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전교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안수기도는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밀림이 우거지고 물이 많은 것은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메마르고 삭막한 것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의 의미를 삶으로 실천하고, 교회가 세운 준성사를 가까이 하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영적으로 풍요로운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리한 집사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는 증권, 부동산, 은행업무와 같은 것을 잘 모릅니다. 저는 음악, 미술, 건축 분야도 잘 모릅니다. 저는 성사와 사목 분야에서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세상의 것들로 경쟁하기 보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와 준성사의 삶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이영근 신부님 강론

 

221103.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명심하고, 그분처럼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것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만46세로 선종하기 까지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던 성인이요, 그의 삼촌은 비오 4세 교황입니다. 

 

성인이 선종 직전 마지막 남긴 말, 임종어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 얼마나 멋진 임종어인지요! (이수철 신부)

 

2. 신앙인은 ‘나의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소유는 가진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 위에 ‘주님 것’이란 이름을 써 놓아야 합니다. (전삼용 신부)

 

3.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4.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60일(60/100일) 기도

 

주님!

모든 것은 주님의 것 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1월4일(금) 12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