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1월 6일 주일[(녹)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2년 11월 6일 주일[(녹)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삶과 죽음에서 복된 희망을 품고,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성자의 말씀을 착한 행실로 열매 맺는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입당송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대영광송>
본기도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마카베오기 하권의 말씀입니다.7,1-2.9-14
그 무렵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 그들 가운데 하나가 대변자가 되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심문하여 무엇을 알아내려 하시오?
우리는 조상들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둘째가 9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하였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10 그 다음에는 셋째가 조롱을 당하였다.
그는 혀를 내밀라는 말을 듣자 바로 혀를 내밀고 손까지 용감하게 내뻗으며,
11 고결하게 말하였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12 그러자 임금은 물론 그와 함께 있던 자들까지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 젊은이의 기개에 놀랐다.
13 셋째가 죽은 다음에 그들은 넷째도 같은 식으로 괴롭히며 고문하였다.
14 그는 죽는 순간이 되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
○ 계명의 길 꿋꿋이 걷고, 당신의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
○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입니다.2,16─3,5
형제 여러분,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3,1 끝으로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 받고,
2 우리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지시하는 것들을 여러분이 실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행하리라고 믿습니다.
5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비나이다. 아멘.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7-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34-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목자이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주님의 진리로 이끌어 주시고, 특히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교회와 사회 복음화에 힘쓰게 하소서.
2. 세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세계 지도자들의 마음에 생명의 소중함을 불러일으키시어, 인간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보살피고, 창조된 모든 것을 조화롭게 지켜 나갈 수 있게 하소서.
3.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자이신 주님, 우울증이나 과로로 지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어, 그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 새 삶을 열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굽어보시어, 위령 성월의 의미를 되새기고 깊이 묵상하며, 참된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5.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의 주님,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이들과 유가족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세상을 떠난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며,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떠나 보내고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주소서.
예물기도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이영근 신부님 묵상
221106. 연중 제 32주일.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오늘은 연중 32 주일, 평신도 주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전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곧 율법으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게 맞서서 일곱 형제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며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요.”(2마카 7,9)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있었던 ‘반대자들과의 논쟁’(20,1-21,4)의 일부입니다. 여기에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먼저, 사두가이파의 질문(루카 20,28-33)은 한 부인이 과부가 되어 다른 시동생 여섯 명과 차례대로 결혼하여 살다가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을 경우에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가상적인 예를 듭니다. 이는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숙혼’의 율법,(“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야 하고. 그래서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에 따른 주장인데, 사실 이 질문은 그들이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부활한 사람들의 삶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지상 삶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20,34-36)에서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답변(20,37-38)은 사두가이파들이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서인 <탈출기> 3장 6절을 통한 대답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 모든 이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루카 20,38)
이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삭은 씨앗이 죽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발전한 것이듯이,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주는 몸은 주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러니, 오늘 우리는 파스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두가이가 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사두가이는 누구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니고 있는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만 할 일입니다. 과감하게 바리사이적인 고착과 완고함을 깨고,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2.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거룩하고 아름다운 평신도(성인聖人)의 삶
-찬미, 감사, 섬김-
올해의 단풍은 유난히 곱습니다. 참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봄꽃보다 더 아름답고 고운 가을단풍입니다. 초연한 아름다움이 마음에 깊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참 마음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봄청춘보다 더 아름답고 황홀한 가을노년의 삶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 34년 동안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대자연 성전에서 아름다운 미사를 봉헌하기는 처음입니다. 어제는 아랫집 수녀님의 부탁으로 ‘성 바오로 호스피스 센터’에서 돌보다 돌아가신 분들의 위령미사를 아랫집 수녀원 아름다운 만추의 뜨락에서 봉헌한 날이었습니다.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만추의 가을에 아름다운 자연성전에서의 잊지 못할 미사였습니다. 지상의 아름다움이 이럴진대 천상의 아름다움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천상행복을 미리 맛보는 지상천국의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미사도중 뒤에서 그분도 함께 미사드리는 기분이라 햇살 환한 제대 뒤를 가만히 돌아보니 가을 빛나는 태양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흡사 하느님께서도 함께 미사드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미사에 참석한 분들이 모두 성인들처럼 보였고, 세상 떠난 영혼들도 함께 미사드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마지막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으니, 천상영혼들, 연옥영혼들, 그리고 지상영혼들인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인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17년전인 2005년 만추의 단풍 아름다운 위령성월, 성인성월에 써놨던 “마침내 별들이 되어”라는 시도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주저함없이 11월 위령성월은 성인성월聖人聖月이라 부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의 삶을 살라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思慕의 정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이요, 이런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의 진입인 천상탄일입니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보다 남은 이웃들에게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평신도의 삶”으로 정했는데 ‘평신도’ 대신 ‘성인’을 넣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마침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오늘 12일(토) 오전 10시, 주교좌 명동 대성당에서 ‘기억하다-빛과 소금이 된 이들’ 두 번째 미사로 ’선우경식 요셉 원장 기림 미사를 봉헌한다 합니다.
고 선우경식 요셉 원장(1945-2008)은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요셉의원’을 설립하고 평생 불우한 환자들을 보살피며 헌신적 삶을 살았던 성인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평신도 주일에 걸맞는 평신도의 모범, 고 선우경식 요셉 원장입니다.
‘기억하다-빛과 소금이 된 이들’은 한국 근현대사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고 신앙의 모범을 실천하자는 취지로 마련됐으며, 첫미사는 지난 3월, 안중근 토마스(1879-1910) 의사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평신도의 삶을, 성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저절로의 표현이 찬미입니다. 영혼의 본능이 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할 때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지상에서 이런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 찬미의 행복,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이렇게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의 삶을 살 때, 죽어서도 천사와 같은 찬미의 삶을 삽니다. 이들에 대한 복된 운명을 소개하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사들과 같아져서 찬미의 기쁨을 살아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인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고 아름다운 찬미의 삶, 성인다운 삶에 전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감사의 삶입니다.
영혼의 양날개가 찬미와 감사입니다. 이미 지상에서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나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께 감사로 인생 마친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너무나 감사를 잊고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이요 은총에 대한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감사의 기쁨, 감사의 축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평이요 불행이지 살 줄 알면 감사와 행복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감사하는 삶, 역시 발견이요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훈련, 감사생활의 습관화입니다. 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는지 바오로 사도가 잘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축복이 참 큽니다. 행복기도중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물하시나이다.”
셋째,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라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주님이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당신의 수도승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교’로 정의합니다. 평생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법을 배워 실행하는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섬김을 통한 겸손과 순종입니다. 섬김 또한 선택이요 영성훈련입니다. 섬김의 삶을 생활화, 습관화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참으로 부활의 파스카 신앙이, 희망의 샘솟는 섬김의 원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마카오베오 상권에 일곱 아들의 순교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하느님 섬김의 삶에 충실했는지, 또 부활희망이 생생했기에 섬김의 삶에 항구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며 일곱 아들의 순교에 이어 어머니까지 순교합니다. 이렇게 죽기까지 섬김의 삶에 충실할 수 있음의 비결은 바로 부활신앙, 부활희망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의 마지막 고백, 임종어만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신앙과 부활희망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한결같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인다운 삶을, 찬미와 감사,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시편17;8,15). 아멘.
3. 전삼용 요셉신부님 묵상
부활을 안 믿는 자에겐 부활이 없는 이유
영화 ‘47m’ (2017)는 상어가 가득 찬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진 두 영국 여성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케이트와 리사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7m나 되는 상어들을 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합니다. 리사는 들어가기 전까지 겁을 먹었지만,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신나서 감탄합니다. 한창 재밌던 중 케이지를 매달고 있던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미터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떨고 있는 리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무전을 하기 위해서 수심 4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무전에 성공합니다. 케이지에 다시 매달아 들어 올릴 고리를 가지고 구조하러 온 사람은 리사의 눈앞에서 상어에게 잡아 먹힙니다. 리사는 상어를 피해 하비에르의 가방에서 작살과 케이지에 매달 인양용 줄을 가져옵니다. 리사는 무전으로 구조 대원의 사망과 인양 줄 확보를 알려주고 케이지에 줄을 묶고 케이지에서 기다리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0미터 지점도 넘어 둘은 구조되는 듯했지만, 줄이 가늘어서 또 끊어져 다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리사의 다리가 케이지의 철근에 깔려 리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위에서 공기탱크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동안 질소중독에 걸릴까 봐 내려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케이트는 산소통을 집어 케이지로 잽싸게 이동하려 하는데 순간 상어에게 물립니다.
리사는 케이트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케이지 바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새 공기탱크를 가져오기 위해 케이지에 걸려있던 작살총을 쓰기로 하는데 작살은 억지로 안으로 가져오려다 방아쇠가 바깥 나사에 걸려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왼손을 찌르고 맙니다. 피가 나고 공기 게이지는 0바입니다. 겨우 공기탱크를 작살로 가져오는 데 성공해서 교체합니다.
그때 무전으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어에게 공격받아 상처는 입었지만 살아있었습니다. 리사는 자기 조끼를 낀 곳에 넣어 부풀려 다리를 빼내고 케이트를 구하러 갑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다리가 심하게 물려 피가 흐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더 꼬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30미터 위치에서 잠수병 예방을 위해서 5분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신호탄을 키는데 사방에 상어가 천지입니다. 그리고 이 신호탄도 얼마 못 가서 꺼지고 둘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구명 링에 매달려 둘은 사는 듯했지만 리사가 상어에 물려 수면 밑으로 사라집니다. 리사는 상어의 입을 꽉 막고 상어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풀려나서 다시 구조됩니다. 이렇게 둘은 구조되어 배 위에서 상어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안도하고 있던 리사의 다친 손이 피가 흐르지 않고 물속인 듯 공기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리사가 물속에서 공기탱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질소중독으로 환각이 나타났고 그 영향으로 혼자 남은 리사가 겨우 공기통을 건져 다리가 아직 케이지에 낀 채로 케이트가 죽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구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무장한 멕시코 해양 구조대가 도착해서 리사를 구조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닷속과 같습니다. 우리 생명은 각자의 산소통에 든 산소의 양에 달려있습니다. 산소가 충분한 바다 위로 올라가면 더는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산소가 다 떨어져 가는 것만 겁낸다면 바닷속은 지옥이 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누군가가 계속 산소통을 내려줄 수 있고 언젠가는 구조대가 와서 바깥세상으로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현세주의자들입니다. 마치 바닷속이 전부이고 산소,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서로 산소를 빼앗으려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서로 살려고 남을 해치는 지옥이 됩니다. 사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리사는 서로 돕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이 가득 차서 이 지상에서는 각자의 산소통 하나로 살지만 굳이 산소통이 없어도 영원히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으로서는 인간들이 각자의 산소통으로 바닷속에 있어도 곧 죽을 인간들이 아닌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든 산소통을 넣어줄 수 있고 또 질소중독에 걸리기 전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산소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이는 그래서 산 이들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는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산소통이 고갈되면 언제나 끌어올려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이들만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들은 상어에게 물립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리사는 다행히 케이지에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서 살았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제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우리를 구하라고 구세주를 보내주실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실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사랑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도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상이심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믿어서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이 표징입니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누군가를 보낸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지 안에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케이지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 타냐가 자기 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꼬마로프라는 사람이 타냐의 어머니인 라라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타냐를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우리에겐 하늘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산소통도 보내고 양식도 보내고 상어에게 물릴 것을 알면서도 아드님까지 보내신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안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허둥대다 상어에게 결국 먹힙니다. 믿으면 케이지 안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산소가 떨어져 가더라도 케이지에 안에서 기다립시다. 예수님께서 케이지에 줄을 연결하셨고 산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끌어올려 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하는 이유는 그래야 안전한 케이지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가톨릭교회에서 꼭 믿어야 하는 4가지의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 삼위일체, 상선벌악, 강생구속’입니다. 천주존재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자연 속에, 예언자들의 말에, 성경에, 인간의 마음에 담아 두셨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정과 정의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비와 연민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불의와 억압입니다. 하느님께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독선과 교만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의 영혼에 하느님의 모상을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배우지 않았어도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알게 됩니다. 마치 새가 배우지 않았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는 3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믿음입니다. 시간과 공간에서 3가지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물리적으로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본질이 같다는 믿음입니다. 같은 본질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우리는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얼음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 강물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 구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의 본질은 같습니다. 나비는 애벌레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 고치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 하늘을 나는 나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모습일 때도 있고, 사람이 되시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일 때도 있고, 성령이 되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 현대의 물리학은 같은 존재가 각기 다른 모습을 같은 공간에서 보여준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빛은 파동과 물질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양자역학에서 물질은 관찰자의 시각에서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상선벌악은 인과응보, 회자정리, 사필귀정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풀면 축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다는 이치입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이 유한하기에 자연의 섭리를 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선을 베푸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풍족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루살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상선벌악’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들 역시 죽음으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상선벌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집니다.
강생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이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고통과 수난가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바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징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큰 표징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 바로 ‘강생구속’의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