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1월 9일 수요일[(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신부님 강론5개
[매묵]2022년 11월 9일 수요일[(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신부님 강론5개
오늘 전례
입당송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았네.<대영광송>
<또는>
묵시 21,3 참조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리라.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대영광송>
본기도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를 배필이라 이르시니
하느님의 이름을 섬기는 백성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따르도록 이끌어 주시어
약속하신 천상 행복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3,9ㄴ-11.16-17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 집을 선택하여 성별하고 이곳에 내 이름을 영원히 있게 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받으시고
이 성사의 힘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너희는 영적인 집을 짓는 살아 있는 돌이니,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09일 수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324년에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사건을 왜 기념할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이 축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미사 가운데 사제가 바치는 고유 기도문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이어서 영성체 후 기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집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랫동안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천상 교회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미미하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지만,
언젠가 천상 교회,
곧 천상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나그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방인입니다(1베드 2,11 참조).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돌로 지어진 성전이 드러내는 이 지상 교회에서 살지만,
천상 교회에서 영원히 살게 될 영광스러운 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 신앙인은 성사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총에 힘입어
하루하루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준비합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 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러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 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저는 신학생 때 학생회 간부를 맞지는 않았지만 자치회장을 위한 ‘지지연설’은 2번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지지했던 후보가 자치회장이 되었고, 저는 덕분에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프로테스탄트의 장점은 자유입니다. 가톨릭의 단점은 변화에 쉽게 대응하기 힘들고, 프로테스탄트의 단점은 구심점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후보는 교회의 전통과 학교의 지침을 잘 따르면서 신학생들의 복지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후보자는 학생을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헌신 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인용하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치회장이라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자치회장을 했던 친구는 교구에서 중책을 맡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계제도와 성전이 있기에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계제도와 성전을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지난 2019년 성주간 월요일에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저도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 유럽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성당입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프랑스는 ‘교회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 불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성당이 불에 타고 있는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당 주변에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당은 화재로 사라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민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 식어가는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건물은 복원할 수 있지만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와 같은 성당의 화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어버린 신앙을 뉘우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 탐욕, 거짓, 분노, 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 질 것입니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히 주인을 섬기는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주님께서 붙들어주는 이, 주님이 선택한 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이’,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주는 이’(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일을 다 하게 하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다 하게 하소서!
다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행복은 선택, 지금 여기가 꽃자리이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올해 가을은 이런저런 사유로 참 긴박했고 힘들었습니다. 9월18일 마지막 시詩를 올린후 11월 8일 되기까지 한편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가을은 명실공히 기도의 계절입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더욱 기도생활에 힘쓰고 싶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지금 여기가 꽃자리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중 저절로 떠오른 고백이 그대로 강론 제목이 되었습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 지금 여기가 꽃자리인줄 모르고 행복을 못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행복의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바로 꽃자리
하늘 나라이다.”-2022.9.18.
바로 마지막으로 올린 시가 꽃자리입니다. 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시가 올 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행복의 꽃자리, 주님을 만나는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 만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기쁨을, 찬미를, 감사를, 평화를 선택하여 훈련하며 살 때 행복입니다. 바꿀 수 없는 부정적인 타고난 것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을 탓하기로 한다면 남는 것은 절망, 원망, 실망뿐이요 거기가 지옥입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편16,2)
하느님은 회개한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또 하느님은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부터 새롭게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하게 살았느냐만 묻습니다. 날마다 행복인 주님을 선택할 때 저절로 감사요 감사요 감탄입니다.
어떻게 구원의 행복한 꽃자리를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이 고맙게도 답을 줍니다. 다만 주님을 겸손히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살면 됩니다. 행복의 비결은 단하나 이것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저절로 매사 주님을 겸손히 섬기는 종으로 살게 됩니다.
이건 겸손이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이 있을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도 같습니다.
저는 ‘봉사’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섬김’이라는 말마디를 좋아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는 이들은 섬김의 일인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업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수도원 초창기 원장직에 일인다역一人多役, 전천후 다목적용으로 살 때, 한밤중 자다가 피정 신청을 받았고 이어 친절치 못하고 퉁명스럽다는 격렬한 항의를 받고 즉시 사과했던 추억입니다. 즉시 깨달은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교회는, 수도원은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1.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2.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되고, 3.안팎의 환경이 좋아 쾌적하고 편안해야 되겠다, 바로 이것이 서비스업의 3대 필수 요건이겠구나! 대표적 서비스업인 음식점과 병원, 학교만 봐도 즉시 알 수 있겠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할 깨달음입니다. 그 어디든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에 충실할 때 거기가 행복한 꽃자리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주님을 겸손히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경각심을 주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대로 다 하고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다만 주님의 종으로써 시종여일 묵묵히 최선을 다해 주님을,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삶이 참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멋지고 행복한 삶입니다. 칭찬이나 비난에 초연하여 한결같을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든 종으로 주님을,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삶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이웃을 섬기는 삶자체가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탓할 것이 있다면 단 하나 한결같이, 진실히, 성실히, 절실히, 주님을, 이웃을 섬기지 못하는 자신뿐일 것입니다. ‘연중 평일 감사송 4’ 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우리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쉬워서, 겸손히 주님을 섬겨야 구원이기에 자발적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사람이 되어 참행복을 살 수 있는 길도 이길뿐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궁극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을 섬기지 않고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섬기겠는지요!
섬김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음도 순전히 은총입니다. 분명히 하면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제1독서 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요, 이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한결같이 주님을,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11/9(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되새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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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65일(65/100일)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