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14일 월요일[(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신부님강론 4개

마르티나 2022. 11. 14. 08:22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 요한 묵시록의 시작입니다.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묵시 2,7ㄴ 참조)
◎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리라.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8,1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3(72),28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14일 월요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부터 두 주간에 걸쳐 제1독서로 요한 묵시록을 읽습니다.

유사 종교에서 그릇된 해석으로 혼란을 일으키고는 하는 요한 묵시록은 과연 어떤 책일까요?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책이 어떤 문학 유형인지 파악한 다음 그에 맞추어 읽어야 합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뉴스드라마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뉴스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야 하고드라마는 허구의 내용으로 시청자에게 감동과 공감을 끌어내며,

코미디는 과장된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합니다.

각각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시청하려면우리는 각각의 장르마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묵시 문학이라는 특별한 문학 유형으로 집필된 책입니다.

묵시 문학은 악의 세력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박해세상 권력하느님과 반대되는 가치가 현실에서 득세함으로써

독자가 절망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상황에도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묵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위로의 메시지이며,

독자들이 고통 받는 현실을 꿋꿋이 견뎌 내며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한편 묵시 문학은 환시상징적 숫자와 짐승우주적 재앙 같이 추상적이고 모호해 보이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묵시 문학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러나 묵시 문학을 마치 미래를 점치거나 길흉화복을 알려 주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유사 종교에서 그러하듯 요한 묵시록을 잘못 이해한다면,

신자들은 구원의 길이 아닌 혼돈과 파멸의 길로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성경을 문학으로 보는 것은 매우 하느님의 계시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묵시 속에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아닌하느님의 뜻을 알아 가야지요.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아이티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생생한 현장감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왜 나만이었습니다. 매일 50여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새로운 입소자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기쁜 마음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이번에는 망설여졌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치안이 워낙 불안하고, 몇 달 전에는 강도를 만나서 죽을 뻔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환자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면허가 없고, 그렇다고 수녀님들이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비포장도로를 5시간 달려서 환자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환자는 차를 타면서 아기처럼 잠이 들었고, 도착해서는 성가를 부르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아이티에서 전쟁과 같은 선교를 하는 신부님의 왜 나만이라는 말은 불평과 불만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나만이라고 말하는 신부님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천국에 쌓을 보화를 미리 마련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삶으로 실천하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중에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어려서 소아마비가 왔고, 평생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다리, 허리, 갈비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30번 이상의 수술을 해야 했고,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왜 나만이라는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생생한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모두 멕시코의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도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억압과 탄압에 맞서는 혁명가였으며, 낡은 관습과 제도를 벗어나는 자유인이었으며, 고통 앞에 굴복하기보다는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열정의 여인이었습니다. 작품의 삼분의 일이 그녀의 자화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애정이 있었고, 자신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열정과 저항정신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에도 멕시코 인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멕시코 인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 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3. 이영근 신부님 묵상

 

221113. 연중 제 33주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한 해도 기울어 가고,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손길이 계절의 등을 떠밀어, 가을도 끝자락에 떠밀려 왔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가을의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이리저리 달을 따라 흐르는 밀물과 썰물처럼 바람을 따라 밀려다닙니다. 넘어지고 부서진 날들의 잎사귀들이 바닥에 온몸을 부벼대고 바스러지며 침묵의 강물로 흘러듭니다. 그야말로, “침묵 속에서 일년 사계절은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고 한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말을 떠올려줍니다.
 
이곳 사무장님께서 제게 말했습니다. 이곳은 ‘하지 않는 말을 듣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곳 성지는 ‘숨어 사느라 표현하지 못한 말을 듣는 곳’입니다. 곧 ‘침묵의 언어’를 듣는 곳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곳 신앙인 교우촌의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사랑의 외침’을 들으러 왔습니다. 이제 이곳의 고요한 침묵 안에 팔딱거리며 살아있는 신앙의 숨결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연중 33 주일로, 전례주년의 연중시기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세상의 끝자락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의 날’에 있을 의로운 이들의 승리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악인에게는 검불이 되어 불살라지겠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리라’(말라 3,19-20)
 
‘불’이라는 상징은 정화시키는 동시에 구분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검불’은 불 속에서 타서 재가 되는 반면, ‘금’은 불 속에서 더욱 빛나게 단련됩니다. 이와 같이 불꽃이 의인에게는 축복의 표지가 되고, 악인에게는 저주의 상징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루카 21,7)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일어날 징표와 함께 3가지 지침을 주십니다.
 
<첫째>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루카 21,8)고 하십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때가 가까웠다’고 말하는 사이비 메시아에게 속지 말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남에게도 속지 말아야 하겠지만, 재물에게도 속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재물’이나 ‘자기 자신’을 사이비 구세주로 섬기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티모테오 전서>에서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그러니, 순교자들이야말로 자기자신과 물질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긴 분들이었습니다.
 
<둘째>는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루카 21,14)고 하십니다.
 
이는 그때가 오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 당하게 될 터인데, 그때에 그 어떤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는 증언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적대자들의 입을 막아주실 것이니,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당하면, 오히려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장 위기의 순간이 사실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순교자들에게 박해와 고문이 오히려 신앙의 증거의 순간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셋째>로는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고 하십니다.
 
사실, 박해받을 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일은 아마 배신당할 때일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믿는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고 거부되고 배신당하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루카 21,16)라고 예고하시면서,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보호해주고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이요, 당신 이름 때문에 배척받고 배신당하고 죽게 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께 희망을 두고,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는 오시는 그분께 희망과 믿음을 두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충실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곳 선조 교우들의 신앙촌을 방문하면서 바로 그들의 믿음과 희망, 그리고 비록 세상이 미워한다 하더라도 꿋꿋하고 굳세게 지킨 그들의 인내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

-이를 타개打開하기 위한 구원의 6대 요소-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참조)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자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요 한해도 막바지에 이른 느낌입니다. 참 절묘한 위치에 있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8,9참조) 제하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이 감동적입니다. 다음 대목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난 5월15일, 저는 샤를 푸코 수사를 시성하였습니다. 푸코 성인은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가난한 형제가 되어 준 사람입니다. 다음 푸코 성인의 말을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노동자들을 업신 여기지 맙시다. 그들은 하느님 안의 우리 형제자매일뿐 아니라, 외형적 삶에서 예수님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자렛의 노동자 예수님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뽑힌 이들 가운데 맏배들이며 구세주의 구유로 부름받은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분과 어울리곤 하였던 친구들입니다. 그들을 공경합시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거룩한 양친을 공경합시다. 끊임없이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제자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됩시다.”-

 

인간의 본질이 가난이요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 모두가 가난한 이들입니다. 병고病苦나 죽음 앞에 참으로 얼마나 가난하고 가련한 존재의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참으로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가 언제나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였지만 작금의 시대는 기후위기와 더불어 노령화, 그리고 증가하는 자살자들, 여전히 생존경쟁 치열한 삶에다가 끊임없는 전쟁, 빈부격차의 심화, 온갖 분열과 갈등으로 시련과 대혼란의 위기 시기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요? 타개를 위한 구원의 6대 요소를 제시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참으로 가난한 마음 안에 다음 처방을 마음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첫째, 희망의 삶입니다.

종말은 심판과 더불어 구원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말라기서에서 제시되는 종말은 우리의 천박한 삶에 회개를 촉구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희망에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심판과 구원이 엇갈리는 묘사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기지 않으리라.”

 

새삼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한없이 가난한 존재, 겸손한 존재가 되어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심판과 더불어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희망에로 눈길을 향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향해야 할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삶을, 지상천국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질서의 삶입니다.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기도와 노동의 질서 있는 삶입니다. 영성생활의 원흉이 무질서의 게으른 태만한 삶입니다. 무질서의 삶중에 점차 내적으로 무너지고 망가지는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져 얻어 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 먹도록 하십시오.”

 

참으로 묵묵히 제 소임에 충실하며 건강하고 질서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선승 백장 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말씀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셋째, 영원의 삶입니다.

피상적 삶이 아니라 본질 직시의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삶입니다. 보이는 외관의 것들에 마음 뺏겨 허영과 교만의 헛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주님은 이들의 환상을 깨며 지나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경각심을 줍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것이다.”

 

안이 깨끗하고 진실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하고 빛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영원을, 영원한 하느님을 향할 때 저절로 거짓과 위선이 없는 가난과 겸손, 순수와 단순, 진실과 투명의 삶입니다. 보이는 것들의 외관 넘어 영원하신 하느님께 눈길을 두며 본질 직시의 영원의 삶,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한결같은 건강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튼튼한 영혼으로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의연하고 품위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정주의 삶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하느님 중심 안에 뿌리 내린 안정과 평화의 삶, 정주의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 같은 안주가 아니라,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 말씀대로 주변의 이런저런 말들에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자리에 깊이 뿌리 내리는 정주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이들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그러니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정신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에 충실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증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의 상황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일이 제자들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니, 미리부터 겁먹지 말고 주님께 맡기라 하십니다.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 이런 노골적인 박해는 없을 것입니다만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정신으로 매사 단단히 영적 무장할 일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한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언변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모두를 주실 것이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증언하는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인내의 삶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마지막 영적승리를 거둡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둘 때 한결같이 기다릴 수 있고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 인내의 겸손, 인내의 사랑, 인내의 희망, 참으로 인내의 덕이 모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절정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인내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이 말씀 마음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도 우리 영혼을 다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확산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어지럽게 하지 마라’는 모든 수도자들이 좋아하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영시가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

 

오늘날이야말로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강론을 통해 이를 타개하기 위한 구원의 6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우리의 빈 마음에 가득 채워 지는 미사은총의 선물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6,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