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1월 18일 금요일[(녹) 연중 제33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2. 11. 18. 05:02

[매묵]2022년 11월 18일 금요일[(녹) 연중 제33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0,8-11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 요한에게 8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11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14.24.72.103.111.131(◎ 103ㄱ 참조)
◎ 주님, 당신 말씀 제 혀에 달콤하옵니다.
○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 ◎
○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 ◎
○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 ◎
○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
○ 당신 법은 제 마음의 기쁨, 영원히 저의 재산이옵니다. ◎
○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3(72),28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의 묵상

1. 2022년 11월 18일 금요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이 일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적 의미에서 가리키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력 쟁취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의 왕권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올바르고 합당하게 섬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은 이사야서 56 7절의 인용입니다.

곧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 1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람들이 성전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마침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인들을 꾸짖으신 일과 성

전에서 가르치신 일이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힘들이지 않고 기도 오래 할 수 있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성전은 분명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우리 내적 성전에서 기도가 충만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사는 게 기도이니 특별히 기도 시간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내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있다면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욕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먼저 내가 기도의 집이 되려면 우선 기도를 오래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쇠붙이가 자석에 오래 붙어 있어야 자기에게도 자성이 생깁니다. 쇠를 풀무 불에 잠깐 넣었다 빼면 속까지 뜨거워지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오래가 결국 모든 삶이 기도가 되면 그제야 삶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로 한 시간을 합니다. 그래도 어떤 때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전의 기도를 생각해보니 내가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가 아닌 내 뜻을 하느님이 아시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청하면 기도가 길어질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 어떤 신자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굉장히 외로운 삶을 사시는 할머니셨습니다. 저와 면담하자며 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성당 직원분은 신부님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면담할 시간은 안 될 것이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꾸리아 강복을 주고 점심에 맞춰 올라오는데 그 자매님이 저를 잡았습니다. 면담하고 싶은데 점심을 드셔야 해서 안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내용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으로 치자면 10분도 안 되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오래 당신 말씀을 하지 못하실 것을. 고해성사에 들어오셔서 일사 후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셔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오래 하지 못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렇게 금방 지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여섯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자녀 간의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 거짓말 안 하기, 음식물 방으로 가져가지 않기, 형제간의 서열 지키기 등 몇 마디 하니 회의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금쪽 처방받고는 오래 회의가 지속되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지 눈치를 보며 아주 천천히 말합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자 오랜 대화가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형제들 간에도. 

 

    기도를 오래 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 됩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수학자처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미 다 아시고 계신다고 가정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한마디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아무리 길어져도 지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발표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결과였습니다. 이들이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상대의 희망에 내 희망을 걸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래서 깊어질수록 말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해서 자신이 먼저 제사를 지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왕위에서 쫓아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되도록 나의 뜻을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아듣지 못해도 주님의 기도만 바쳐도 굉장히 유익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면 금방 끝납니다. 하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섀클턴을 기다렸던 선원들이 기다리던 나를 살리는 한마디여야 합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2014 4 16일 성주간 수요일에 참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많은 승객들이,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는데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호 사고 8년이 지난 10 29일 토요일 또 다시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또 다시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하시어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억울한 죽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성장과 발전도 필요하지만 정부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4.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11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며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아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신 적이 있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요, 회개의 결단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이요,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루카 19,41)
 
주님!
도시를 보고, 세상을 보고,
비난할 줄은 알아도 울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범죄와 불의를 보고,
울지도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관심과 패배의식에 갇혀 당신의 뜻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안정과 편리를 도모하며 이기심과 타협 했습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에 눈물을 주소서.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울 수 있는 사랑의 눈물을 주소서. 

우는 이들과 함께 울며 당신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김상우 신부)

 

2.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되도록 나의 뜻을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전삼용 신부)

 

3.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조재형 신부)

 

4.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이영근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74일(74/100) 기도]

 

주님!

강도의 마음이 아닌 기도의 마음을 제게 주소서.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아멘.

 

-2022년 11월18일(금) 5시...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