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2월 7일 수요일[(백)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마르티나 2022. 12. 7. 07:13

[매묵]2022년 12월 7일 수요일[(백)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트레비리(지금의 독일 트리어)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었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본기도

하느님,
복된 암브로시오 주교를 가톨릭 신앙의 스승으로 세우시어
사도의 용기를 보여 주게 하셨으니
교회 안에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뽑으시어
용감하고 지혜롭게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8과 10(◎ 1ㄱ)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 알렐루야.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8-12)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암브로시오를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주님의 영광을 널리 전하게 하셨으니
이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저희의 믿음도 성령의 빛으로 밝혀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2-3 참조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사의 신비로운 힘으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복된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
마침내 영원한 잔치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일 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안식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희랍어로 안식은 ‘아나파우시스’, 곧 ‘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 마음은 쉬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압제에서 일한 것처럼 계속 일하고 지쳐갑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게 피곤한 것이 외부의 요인이지, 나의 마음 때문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학대 받고 비참하게 버려진 채 발견된 개는 며칠 동안 벽에 머리를 박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앙상한 몸, 피부를 장악한 옴, 온몸에 묻은 오물까지 심한 학대를 견뎌왔음이 확실시되었습니다. 개는 세상을 등졌고 사람을 등졌습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고 그냥 벽만 바라보았습니다. 녀석은 지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심지어 우는 것도 할 수 없는 끝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개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언어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녀석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열쇠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클리프라고 이름 붙인 이 개와 비슷한 처지의 유기견을 발견하여 데려온 것입니다. 이 녀석도 돌봄을 받지 못해 굉장히 야윈 상태였지만 비교적 씩씩했고 그래도 인간을 믿고 따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엔젤은 클리프를 보자 구석에서 나와 녀석을 반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녀석과 함께 뛰놀았습니다. 구조단체는 클리프가 엔젤과 피부색,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둘의 사이를 보곤 엔젤의 형제견이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클리프는 엔젤에게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란 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엔젤은 조금씩 클리프에게서 이 마음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6개월쯤 지나서 엔젤은 이제 완전히 자기 껍데기에서 벗어나 클리프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맛있는 음식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을 되찾았고 곱디고운 빛깔의 털을 맘껏 뽐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마음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파라오의 종살이였습니다. 힘들고 지치면서도 이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바꿔줄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지옥도 행복이라 여길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란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제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그분은 좋으신 분이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 마음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제가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다’가 그분의 ‘마음’임을 압니다. 그분의 마음을 받으면 이제 무거운 짐이 사라집니다. 휴식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었습니다. 에사우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멍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멍에가 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 믿으면 그분의 마음이 나에게 장착됩니다. 엔젤이 자신도 클리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클리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하면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고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가 됩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무꾼이 그러했습니다. 나무꾼은 따듯한 심장을 가지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의 마음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겨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러면 내 안에 그분의 심장이 생성됩니다. 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참 차갑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따듯한 심장을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마치 엔젤처럼 예수님과 사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이 하.사.시.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장착할 때 나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렇게 덜 피곤하게 되고 비로소 휴식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제 사제서품 성구가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나의 마음이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임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 심장을 주시고 우리는 뱀과 파라오,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참된 휴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2. 2022년 12월 07일 수요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마태오 복음 11-12장은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각 장의 마무리(11,25-30; 12,46-50 참조)는 긍정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13 1-8절에서 소개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11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앞선 25-27절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11 25-30절은 같은 문학적 형식을 가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은 주제(하늘나라의 역설적 가치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되는 특권)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잠재적 제자들곧 아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사람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규제하려는 율법 학자들의 요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3,4 참조).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들을 초대하시며 그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식을 누리려면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5,5; 21,5 참조).

 

율법 학자들이 토라(율법)의 멍에로 사람들을 얽매고 구속하였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그 관계는 배움으로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그 초대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면무엇이 선택과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지요?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도 물으셨습니다. 갈릴래아에 혜성같이 등장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하느님나라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그분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시켜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만큼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달랐습니다. 기존의 권위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심판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예스 맨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좋아요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는 아이라서 말을 못 합니다.’라고 응답했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응답했습니다. 예언자는 앞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사명과 표징을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권능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 예언자로부터 위로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제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장거리 운전할 때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적막감과 외로움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용기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닌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물처럼 여기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불기둥, 재물이라는 불기둥, 명예라는 불기둥에 뛰어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적어 놓은 글인데,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일, 홍보를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는 일, 강의를 준비하는 것들은 제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좋아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0221206. 대림 제2주 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것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떨 때 기뻐하는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뻐하는가? 

 

 

   < 오늘의 말 · 샘 기도 >

 

“아버지의 뜻”

(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착한 목자 영성

-하느님 닮기-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궁극의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이 그 전형적 모범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한 목자 영성-하느님 닮기-’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위로의 책이라는 제2이사야서는 “위로하여라”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40,1) 고린토 2서에서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2코린1,3-5)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궁극의 위로는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나 격려이겠습니다. 어제 절식을 중단한 저에게 도반 형제의 따뜻한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몸에 안맞는 단식하느라고 생고생만 하셨네요. 예, 쉬시고 내일부터 영양식사로 기운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정의의 하느님입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평화롭고 차별없는 공정한 사회를 이루라고 우리 모두를 격려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상징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40,3-5)

 

 

얼마나 고무적인 격려인지요. 대림시기 주어진 과제가 이처럼 “정의의 사람”입니다.

 

셋째, 연민의 하느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져갈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짧고도 슬픈 인생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지닌 “연민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 버리나이다.”(시편90,10) 

 

어제 수원에 사는 어느 모르는 자매님의 부탁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친척 오빠의 갑작스러운 비보 소식에 미사신청합니다. 원인은 심근경색입니다. 56세로 비신자이며 외아들이고 정말 착한 오빠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연상되는 바 연민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풀같이 덧없는 인생임을 생각하노라면 저절로 겸허해지고 동료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지닐 것입니다. 60대 부부가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가 고마워서 산다는 것도 이런 연민의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풀같은 우리 존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인 파스카 예수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넷째,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기어히 찾아나서는 하느님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길이신 예수님을 잃었다는 것이니 이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을 때 마다 우리를 찾아나선 주님을 생각할 때 정신이 번쩍 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참 단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마태18,13)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어 주님은 모두에 대한, 특히 작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심전심”이 아니라 “하심예심:입니다. 하느님 마음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교회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 특히 대통령은 이런 사랑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후반부 이사야서 말씀도 착한목자 하느님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역시 하느님의 기쁨은 길잃은 양 하나도 없는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참으로 기쁨 가득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이런 임마누엘 사랑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착한목자 영성은 비단 공동체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유의 참나의 실현이며 이것이 참행복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위로의 사람, 정의의 사람, 연민의 사랑,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평생 깨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12/7(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믿음은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 마음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제가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전삼용 신부)

 

2. 율법 학자들이 토라(율법)의 멍에로 사람들을 얽매고 구속하였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그 관계는 배움으로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정진만 신부)

 

3. 끊임없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불기둥, 재물이라는 불기둥, 명예라는 불기둥에 뛰어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조재형 신부)

 

4.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이영근 신부)

 

5.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참으로 기쁨 가득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이런 임마누엘 사랑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주님을 닮아 위로의 사람, 정의의 사람, 연민의 사랑,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평생 깨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이수철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93일(93/100) 기도]

 

주님!

임마누엘 사랑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늘 저와 함께 계시니 감사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감사합니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감사합니다.

주님 닮아...

위로의 사람, 정의의 사람, 연민의 사랑,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7일(수)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