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11일 주일[(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신부님 강론 5개
[매묵]2022년 12월 11일 주일[(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신부님 강론 5개
오늘 전례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또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 주일입니다.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야말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었던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의 사랑으로 더욱 많은 이가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입당송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본기도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오니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35,1-6ㄴ.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희를 구원하러 오소서.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7-10
7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11
그때에 2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사랑이신 주님, 세상 속에 머무르며 주님을 전하는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현대의 풍요 속에서도 가난으로 힘겹게 생활하는 이들을 먼저 찾으며, 주님의 자비를 실천하게 하소서.
2.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군의 주님,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일상이 바뀌는 세상을 살펴 주시어, 모든 이가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어려움을 잘 이겨 내며 평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하소서.
3.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경제적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굽어살피시어, 건강을 지켜 주시고 마음을 위로해 주시며, 복음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대림 시기를 지내는 저희 본당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인내와 끈기로 열심히 살아가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성탄을 잘 준비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신비의 거행으로
저희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의 진짜 본성은 낳고 키울 때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당연히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면서까지 제자들을 당신께 보낸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사람 중에서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는 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개 중에 가장 훌륭한 개는 인간 중에 가장 작은 인간보다 귀한 존재일까요? 당연히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 중 가장 작은 이도 개의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며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곧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파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꿀벌이 될까요? 만약 파리가 꿀벌이 되었다면 그 중간에 꿀벌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투머로우랜드’(2015)란 공상 과학 판타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아테나란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주인공 남자는 그 여자아이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아주 먼 미래입니다. 아테나는 시간 여행을 시켜줄 수 있는 여자아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미래로 가는 것은 본성을 바꾸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서 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 태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본성으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의 본성을 가진 이를 태어나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영화 ‘킹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노예 소년이 대장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노력한 결과 그냥 싸움 잘하는 노예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 준 이가 왕이 되자 그의 지위는 그대로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낳는 이의 본성이 왕이면 자신도 그와 대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도 제자들을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게 만들기에 그 본성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한 거지에게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태석 신부는 돌아가셔서도 아이들을 의사로 키워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한 거지를 그리스도로 볼 수 없고 믿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면 의사로 키워낼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본성을 바꿔주는 일입니다. 만약 나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제직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사제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당신과 같은 비천한 종도 하느님을 낳으셨다면 우리도 모두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내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들어 높일 수 있는 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뱀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본성에 머물러 있게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뱀과 그 말을 따르는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인 이는 모두 신이 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마치 난자처럼 정자를 받아들이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믿음을 전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되고 내세에 어디에 살지, 어떤 위치에서 살지가 결정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산보를 하면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머리, 허리, 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말은 다른데 끝에 말은 모두 ‘리’로 같습니다. 앞의 말은 우리 몸의 특정 부위를 뜻하는 것 같고 뒤의 말은 그냥 붙이는 접미사 같습니다. 비슷한 말로 예수님, 선생님, 임금님, 사장님의 ‘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며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제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접미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마르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우산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는 경우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글에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던 날입니다.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날씨도 흐리고 추웠다고 합니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됐습니다. 그 말이 변형되어서 1957년 국어사전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입니다. 70년에 걸쳐서 4번의 큰 박해가 있었고 만 명 이상이 순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교회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것처럼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은 신앙을 증거했던 ‘성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경기도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해미, 갈매못, 줄무덤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베론 성지가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한티성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신앙을 지켜온 곳들이 성지가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여의도에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집전하였습니다. 30년 후인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광화문에서 124위의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을씨년스러운 날을 광명의 날로 바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삶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하던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 했던 말들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이웃의 비난과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에서 야고보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항상 기도한다면, 언제나 기뻐한다면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찾아 올 것입니다.
3. 2022년 12월 11일 일요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됩니다.
마태오 복음 11-12장은 10장의 파견 설교에 이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을 의심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엿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물으시면서 그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가십니다(루카 7,18ㄴ-23; 7,24-30도 참조).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여기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은 헤로데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는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른 채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대조됩니다(마태 3,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질문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이며
동시에 예언자보다 더 큰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로서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에서 예고된 하느님의 약속을 완성한 인물입니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에서 사용된 일인칭(‘내’, ‘나’)은
마태오 복음 11장 10절,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에서 이인칭(‘네’, ‘너’)으로 수정되었는데,
복음서 저자는 이러한 편집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늘은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대가 한층 커져 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하나로 합쳐지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강론 지침』, 90항 참조).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마태 3,2.7-12 참조)를 귀담아들으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례자 요한은 기쁜 소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4.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21210. 대림 제2주일 토요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5.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예수님은 참 메시아이시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기도하시면 마음에 깊은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미 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집회서를 읽을 때 마다 아주 오래전 90년대 초반 어느 수녀의 편지글에 잠시 행복했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집회서 마지막 구절입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48,11)
바로 엘리야를 지칭한 당신인데 바로 저로 착각해 이해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 번역이 더 친근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집회서는 온통 엘리야 예언자의 찬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은 엘리야 예언자인지 다음 집회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이나 불을 내려 보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48,3-4.9)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48,11)
여러분은 이런 당신같은 분이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이런 당신으로 삼아 관계를 깊이할 때 참 행복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여러분이 이웃에 이런 당신같은 존재처럼 사랑의 향기를 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세례자 요한을 이런 엘리야의 재림으로 믿었습니다. 바로 구약 가장 끝 구절, 말라기서의 예언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의 이 역할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메시아 예수님곁에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도 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예수님의 자상한 해명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해명을 듣고서야 무지의 눈이 열려 비로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아 알게 된 제자들입니다. 엘리야, 세례자 요한에 이어 당신의 고난을 예감한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했던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4.6). 아멘.
[12/11(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되새김 구절]
1. 내가 자녀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믿음을 전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되고 내세에 어디에 살지, 어떤 위치에서 살지가 결정됩니다.(전삼용 신부)
2.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조재형 신부)
3.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진만 신부)
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5.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했던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4.6). 아멘.
(이수철 신부)
[9.6~12.14일 100일기도 중 제97일(97/100) 기도]
주님!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11일(일)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