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2년 12월 17일 토요일[(자) 12월 17일]/신부님 강론 5개

마르티나 2022. 12. 17. 06:07

[매묵]2022년 12월 17일 토요일[(자) 12월 17일]/신부님 강론 5개

입당송

이사 49,13 참조
하늘아, 즐거워하여라. 땅아, 기뻐하여라. 우리 주님이 오시어, 가련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본기도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왕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9.1-2.8-10
그 무렵 1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들 오너라.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
2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 와 들어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라.
8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목을 잡고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9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10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2(71),1-2.3-4ㄱㄴ.7-8.17(◎ 7ㄴㄷ 참조)
◎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산들은 백성에게 평화를, 언덕들은 정의를 가져오게 하소서. 그가 가련한 백성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에게 도움을 베풀게 하소서. ◎
○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
○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혜 만물을 힘차고 아름답게 가꾸시는 분, 어서 오소서. 저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치소서.
◎ 알렐루야.

복음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1,1-17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저희가 이 신비로운 제사에서 받는 천상 양식으로 다시 힘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2 :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두 가지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하까 2,7 참조
보라,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들어오리니, 주님의 집은 영광으로 가득 차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천상 양식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늘 이 양식을 바라며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등불을 밝혀 들고 마중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오늘의 묵상

1. 12월17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오늘부터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닌,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깨어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회개를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니 기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오늘부터 전례는 말씀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렇습니다. 나침판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알려주듯이,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품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들 역시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언자는 허위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을 가지고 있다면, 허위와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불의와 거짓에 맞서야 합니다. 예언자는 탐욕과 욕망에 맞서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을 일삼는다면, 탐욕과 욕망에 젖어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는 동정 성모님의 순명을 배워야 합니다. 순명의 반대말은 불순명일 수도 있지만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은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원죄는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교만은 죄를 잉태하였지만, 동정 성모님의 순명은 구세주를 잉태하였습니다. 법대로 살았던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순명의 삶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원래 4명이었다고 합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굶주린 이들에게 가져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져간 보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4번째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보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4번째 동방박사는 시간이 흘러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4번째 동방박사도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신부 강론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마태오 1,1-17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 족보!

 

살아생전 제 선친께서 마치 보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시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족보책이었습니다.

총 두 권이었는데, 엄청 두꺼웠습니다.

족보는 언제나 황금빛 보자기에 고이 싸여 장롱 속 제일 안전한 곳에 보관하셨습니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다닐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른 것은 다 처분하셨지만, 족보만큼은 제일 먼저 챙기셨습니다.

 

명절 때마다 제사가 끝난 다음 선친께서는 저희를 앉혀놓은 다음, 족보를 꺼내 드시고 일장훈시를 하셨습니다.

우리 남원 양씨가 얼마나 대단한 성씨인지, 우리 가문에서 얼마나 많은 위인들을 배출했는지,

그러니 가문에 먹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하루는 선친께서 하도 강조하셔서 족보 첫 장부터 쭉 넘겨본 적이 있습니다.

족보 안에는 시조가 되는 분부터 시작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해 높은 공직에 오른 사람들은 따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족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존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 사가 역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저 낯설고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들만 쭉 나열되어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신의 복음서 제일 첫머리에 소개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족보상에 등장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은 곧 이스라엘의 산 역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 축복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흥망성쇠, 기쁨과 희망, 고통과 상처의 흔적이 곧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

 

물론 족보 안에는 감추고 싶은 이스라엘의 흑역사, 오점을 남긴 이름들도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기 위해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신 것입니다.

완벽하게 인간 세상 속으로 육화강생하신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고상하게 계셔도 아무 문제 없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굳이 사람이 되셔서,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상처투성이, 오물투성이인 인간 세상 안으로

완벽히 진입하셨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마태오 1,1-17

 

영성의 세 단계

 

저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그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늦게 결심해서 들어온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동기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만약 형이 하느님께 가면 하느님은 잘 살았다고 칭찬해 줄 거야.

그러나 누구와 함께 왔느냐고 물으면 뭐라 할 거야?

동료들이 옆에서 쓰러져가고 있는데 혼자만 왔느냐고 하면 뭐라 대답할거야?

쓰러지는 친구들과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고민하는 친구와 함께 고민해 줄 수는 있지만 함께 쓰러지는 것이 사랑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내가 굳건히 서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든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병을 더 잘 알기 위해 자신도

병이 드는 의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잘 산다.’는 말을 여러 번 듣다보니 스스로도 내 자신이 좀 냉혈인간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혼자만 열심히 살려고 하는

가슴이 차가운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신학교 3학년 마치고 유학 나올 때 여러 친구들이 눈물을 흘려주었지만

저는 눈시울을 적신 적이 없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슬픈 영화 볼 때는 많이 울면서도 정작 눈물이 나와야 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가슴으로 지나치게 머리만 쓰며 산다는 느낌을 항상 받습니다.

그러나 다시 감정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가슴이 뜨거운 것인지 착각할 수도 있는데

가슴으로 사는 것이 겉보기에는 감정적으로 사는 것과 비슷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도 이 구조를 따릅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감정은 호수의 표면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좋았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의 표면과는 다르게 영혼의 단계에 이른 이들은 육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성은 육체의 감정을 조정하여 평정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평화는 아닙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 단계가 바로 하느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단계입니다.

성인들이 이 단계에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도 다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예수님도 라자로의 죽음을 보면서 또 예루살렘을 보면서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또 어떤 때는 유다인들을 심하게 질책하시고, 어떤 때는 성전을 뒤집어엎으며

분노를 폭발하고 폭력까지도 쓰십니다. 이 감정의 변화는 육체의 감정이 아니라 마음의 감정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룩한 분노이고 거룩한 질책이고 거룩한 눈물입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나오는 감정은 모두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심장은 썩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하트 모양으로 유리 상자 안에 넣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한 부분이 불에 그슬린 자국이 있습니다.

바로 천사의 불화살로 맞은 자리입니다.

 

천사가 사랑의 불화살로 데레사 성녀를 찌른 이후에 그 심장은 항상 사랑에 불탔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을 가지면 원수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총망라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유다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고집으로 메시아를 믿지 않으려 했고

마태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길게 나열한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신의 고집쟁이 민족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마태오의 따듯한 가슴과 눈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정적인 사도들을 이성적으로 만들고 또 영적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심장을 갖는 날까지 (물론 그 이후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합시다.


 

4. 221216. 대림 제3주일 금요일.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요한 5,35)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에 대한 4중의 증언, 곧 세례자 요한의 증언(요한 5,33-35), 하느님의 증언(5,30-32), 예수님 자신의 일의 증언(5,36), 성경의 증언(5,38-47) 중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예수님 자신의 일의 증언을 들려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다 광야에서 설교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요한 1,19) 그가 “진리를 증언”을 하였음을 전해주면서, ‘그러한 증언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구원받게 하려는 것’(요한 5,34) 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요한 5,35)

그렇습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으며, 그것은 ‘켜서 비추는 등불’이었습니다. 곧 “등불”은 저녁 때 방 안을 밝히기 위해 켜는 등불처럼, 빛 자체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달과 별과 같은 ‘발광체’를 나타내는 단어(마오르)와 ‘빛 자체’를 나타내는 단어(오르)가 있는데,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등불”(뤼크노스)은 어두운 세상을 잠시 비춘 ‘발광체’(마오르)로서의 등불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요한 5,36)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감옥에 갇혀 있단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하신 말씀, 곧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6)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그리고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선민으로서의 특권은 그들의 완고함으로 도리어 최대의 정죄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믿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깨닫는 것은 어떤 훌륭한 교육적 환경이나 지적 수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증거를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라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에페소서>는 이렇게 들려줍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에페 2,8)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인지를 들여다 볼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는 일을 실행을 통해 완수하는 일이요, 바로 지금 하는 일이 그 일이 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5. 12/16(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진리의 증언

-주님의 반사체(反射體)로 살고 싶다-

 

어제 오후 내내 많은 첫 눈이 내려 온누리가 하얗습니다. 이 또한 하늘이 내려 준 은총의 선물입니다. 자주 산책중 부르는 ‘파란마음, 하얀마음’이란 동요중 2절이 생각납니다. 동심(童心;어린이처럼으로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돌아가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아주 오래전 함박눈 내리는 겨울에 써놨던 ‘님의 편지’란 짧은 애송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이심전심, 하늘님 마음과 통하는 느낌에 쓴 시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님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님의 편지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하느님의 시詩’인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에 ‘시詩처럼 살고 싶다’란 다음 짧은 자작시의 심정은 2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합니다.

 

“시詩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餘白의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담백淡白한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담백淡白의 뜻을 찾아보니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발광체發光體라면 우리 신자들은 진리의 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反射體입니다. 이를 깊이 깨달을 때 참된 겸손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 또한 진리의 증언자가 됩니다. 

 

‘진리의 연인戀人’이라 명명되는 성 아우구스티노, ‘진리의 협력자’란 묘비명을 원한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언급도 생각납니다. 진리의 증언자로 일관된 진리의 반사체 삶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시詩’같은 삶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한 시편을 매일 평생 성무일도시  노래로 바치는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의 시’처럼, 주님의 반사체로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들면서 유익하고 적절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물론, 예수님 삶전체가 진리를 증언합니다. ‘진리의 빛’인 주님을 반사합니다. 진리의 증언은 끝나지 않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로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진리의 빛’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진리의 증언자로 파견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이며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진리의 발광체라면 우리는 주님 진리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입니다. 반사체가 무지無知의 죄악罪惡과 병病으로 녹이 슬어있으면 반사체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늘 한결같은 수행으로, 영적 훈련으로 심신을, 영육을 깨끗이 하여 무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반사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가 그 구체적 처방을 제시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길이요, 주님 진리의 빛의 반사체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대림시기 아주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행복하여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놀랍게도 이사야의 예언은 거룩한 하느님의 산, 불암산佛巖山 기슭, 주님의 집, 기도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지 않습니까! 참으로 한결같은 수행을 통해 주님 진리의 반사체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살아갈 때 주님의 축복 가득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진리의 빛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오늘도 진리의 반사체로, 진리를 증언하며 살게 된 복된 우리들입니다. 온전히 진리의 증언자로 살고 싶습니까? 다음 고백처럼 살면 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진리, 저의 빛,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의 반사체로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12/17(토) 12월17일, 되새김 구절]

 

1. 4번째 동방박사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4번째 동방박사도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2. 그냥 편하게 고상하게 계셔도 아무 문제 없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굳이 사람이 되셔서,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상처투성이, 오물투성이인 인간 세상 안으로

완벽히 진입하셨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길게 나열한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신의 고집쟁이 민족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마태오의 따듯한 가슴과 눈물을 보았습니다.(전삼용 신부)

 

4.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선민으로서의 특권은 그들의 완고함으로 도리어 최대의 정죄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5. 주님이 진리의 발광체라면 우리는 주님 진리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입니다. 반사체가 무지無知의 죄악罪惡과 병病으로 녹이 슬어있으면 반사체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늘 한결같은 수행으로, 영적 훈련으로 심신을, 영육을 깨끗이 하여 무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반사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이수철 신부)

 

[12/17(토), 100일 기도후 제3일차 기도]

 

하느님!

이미 와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소서.

저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소서.

제가 하는 일을 통해 하느님이 드러나게 하소서.

하느님의 반사체 역활에 충실하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17일(토)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