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18일 주일[(자) 대림 제4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2년 12월 18일 주일[(자) 대림 제4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본기도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7,10-14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시작입니다.1,1-7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희망이신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교회를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세상 사람들이 삶의 기쁨과 희망을 교회에서 찾고 교회로 모여 오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된 통치자이신 주님,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들을 돌보아 주시어, 참사랑과 주님의 정의를 굳게 믿으며 불의에 용감히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3. 미혼모와 미혼부 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미혼모와 미혼부 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희 사회가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하며 돕게 하시고, 청소년의 생명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며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샘이신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모든 가정에 강복하시어, 함께하지 않는 가족까지도 기억하며 그 소중함을 되새기고, 주님의 거룩한 탄생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성자를 잉태하게 하셨으니
제대 위의 이 예물도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성탄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도와주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오늘의 묵상
1. 12/18(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언제 임마누엘, 예수님을 원하게 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야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사실은 너무 명확합니다. 팀 호잇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마라톤을 하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눈만 껌뻑일 수 있는 모습의 아들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달릴 때 장애를 잊은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이것에 감동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줍니다. 그래서 대학도 졸업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창조자와 머물면 이전의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달려주면 자신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만을 따를 것을 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안 오십니다.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엄마보다, 엄마가 원하는 공부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마트폰을 빼앗고 게임을 지우고 엄마를 바라보게 해야 할까요? 물론 그러면 아이는 살아남아야 해서 어느 정도는 엄마를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마트폰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거의 게임 중독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고 오직 스마트폰에만 의지하려 하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가 나옵니다. 다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이가 스마트폰을 향한 욕망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때 금지하면 아이에게 게임에 대한 욕망을 더 증폭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모 먼저 죄와 집착은 고통임을 알아야 이렇게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질리도록 하게 내버려 두고 부모는 아이를 잠시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불안하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정말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인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인지. 아이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그것을 빼앗고 부모와 억지로 머무는 것이 좋은 것임을 강요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 없이 스마트폰만 보는 것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신학교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혼하지 못하는 삶을 평생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제 서품식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집에 남았습니다. 집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좋지 못한 비디오를 보며 게으른 짐승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매우 비참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야 다른 것이 행복하게 보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만지려고 할 때 엄마는 아이의 손을 살짝 데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거부만 한다면 아이는 그것에 대한 환상을 계속 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키워나갑니다. 만약 그 환상이 믿음이 된다면 고통스러워도 자기 믿음을 바꿀 마음이 없어서 중독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일찍 일찍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고통임을, 심지어 부모를 잃어버리게 됨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미지근한 사람을 뱉어버리십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하늘과 땅의 중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듭니다. 법을 통해서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다가와서 명령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죄를 짓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주님과 머물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더 신앙을 갖기 어렵게 만듭니다. 지옥까지 갔다 오게 해야 합니다. 무책임한 것 같지만 이것이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식입니다. 그 지옥에 있는 이들만, 그 어둠에 있는 이들만 빛의 소중함을 압니다.
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초등학교 때 술과 담배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술은 쭉 하고 있고 담배는 그때 맛을 보고는 맛을 느끼지 못해서 피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였습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놓아주면 아이들은 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참기 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술과 담배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부모님이 그것을 말렸다면 저는 지금도 술 주정뱅이와 담배에 찌든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맛의 향수를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술도 마시지만,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담배는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렸을 때 술과 담배였지만, 이것이 결혼이나 돈을 버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아이들은 압니다. 하나를 실컷 해 보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임을, 별 게 없음을, 그래서 최대한 이른 나이에 아이들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것과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하.사.시.를 통해 저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이 더 믿어졌기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을 해 보지 않아도 술과 담배를 피우는 것과 그때 생각한 결혼의 환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끝장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죄의 쓴맛을 톡톡히 보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하지 책임질 수 없는 상태로 막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위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때 반발 심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매춘과 대마초와 같은 마약이 합법입니다. 술집에 들어가면 대마초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길을 지나가면 빨간 불 밑에 아가씨들이 유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계에서 범죄율이 거의 최저인 나라가 네덜란드란 것입니다. 오히려 합법화 시키니 그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춘이 불법이기는 해도 네덜란드보다 성범죄가 훨씬 많습니다.
네덜란드는 마약, 매춘, 동성애, 안락사, 공원에서 성관계 허용 등을 합법화해서 그것을 통제 못 하면 범법자가 아닌 아픈 사람으로 여기고 치료해줍니다. 그것을 한다고 범법자로 만들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아픈 사람임을 깨닫고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범죄자에서 갱생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아픈 사람이 치료 받으러 오는 것이 어려울까요? 당연히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여기는 사람이 갱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부모가 자꾸 자녀에게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은 자녀를 아픈 사람이 아닌 범죄자로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갱생이 더 어렵습니다.
놓아주고 풀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부모와 머물기를 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죄의 지긋지긋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게 됩니다. 죄가 싫고 나로 사는 게 싫어졌다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2. 12/18(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오늘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두 번째 이야기 ‘사라예보’ 사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라예보는 탁구의 이 에리사 선수가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라예보는 세계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사라예보에서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저격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당시 세계는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서 끔찍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류의 지성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무기의 시험장이 되었고, 인류는 하느님의 모상을 버리고, 동생을 죽였던 카인처럼 이웃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한 청년의 총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만나서 탐욕과 정복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는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고유한 문화는 말살되고, 자원은 수탈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국주의의 탐욕은 끝나지 않았고, 20년 후에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또 한 번 참혹한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은 대림 제4 주일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제국을 만들고, 세계를 정복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탐욕과 욕망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약소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원을 착취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념, 세대, 혈연, 학연, 지연, 종교로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을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갇힌 이들, 아픈 이들, 세리, 창녀, 이방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시는 베들레헴은 하느님의 나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한 사람은 신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직책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으로 오셨던 임마누엘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겸손과 비움의 구유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3. 12/17(토), 이영근 신부 강론
221217. 2022년 12월 17일.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라고 마음을 모아 노래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본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혀줌과 동시에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곧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4. 12/17(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하느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영원한 순례자’이시다-
오늘 12월17일(토)은 주님 성탄에 앞서 저녁 성무일도시, 또 복음 환호송을 통해 장엄한 O후렴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예수님 탄생이 점차 가까워짐을 실감합니다.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탄생 하실 지혜 자체이신 주님께 슬기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애절한 소망이 담긴 감동적 노래입니다. 저는 이미 8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을 통해 이미 슬기의 길을 배웠습니다. 매일 강론을 쓴 후 4:00-4:30 까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위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수도원 배밭을 돌아 정문에까지 걸어갔다 옵니다. 그대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살아있는 날까지 계속될 순례여정입니다.
늘 강조합니다만 다시 각자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요약하면 오후 몇시쯤,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요약하면 또 어느 계절 어느 시점時點에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저는 늘 말씀드리다시피 오후 4시, 초겨울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검이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환상이 걷힌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 모처럼 내려 쌓인 흰눈길을 걸을 때 생각난 23년전 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님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 눈 내리 하얀 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긴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완성된 족보라기 보다는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족보라 생각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예수님 족보에 편입되기 때문이며 인류가, 교회가 지속하는 동안 계속될 예수님의 살아 있는 족보입니다.
흡사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은 “영원한 순례자”처럼 생각됩니다. 족보에 나오는 하나하나 사람마다 늘 함께 하시며 지금까지 순례 여정 중의 영원한 순례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긴 족보가 굽이굽이 이어진 하느님의 발자취처럼 느껴집니다.
구원자 예수님 탄생하기 까지 얼마나 긴 인내의 기다림이 요구되었겠는지요!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부단한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족보에 나오는 면면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모습도 감동입니다. 누구하나 배제시키거나 소외시킴이 없이 잘났는 못났든 믿음 하나만 있다면 당신 구원 역사의 일꾼으로 활용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믿음이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족보같습니다. 이런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이 하나하나의 존재이유와 존재의미를 밝힙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도구라는 것, 바로 이게 한사람 한사람의 존재의미가 되며, 바로 우리도 여기에 속합니다. 바로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하느님 믿음의 끈으로 연결된 족보를 볼 때마다 저는 하나의 끈에 연결된 묵주알을 연상합니다. 묵주끈에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 뚜렷한 존재의미이지 만약 떨어져 나가 이리저리 뒹구는 고립단절의 혼자의 묵주알 같은 존재라면 완전히 존재의미의 상실이며 곧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홀로 단절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죽는 고독사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의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있기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귀한 구원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야곱의 축복을 통해 예언된 대로 유다의 구원 섭리중 역할이 참 대단합니다.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탄생하실 예수님을 통해 유다에게 준 야곱의 축복은 실현될 것입니다. 참으로 신실하신 하느님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하지만 다윗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며, 아브라함 역시 결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의 하느님 사랑과 믿음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네 여인의 기구한 운명도 깊은 충격을 줍니다. 다말, 라합, 룻, 다윗의 아내이자 솔로몬의 어머니 바세바, 다 이방인들이었고 네 여인들 참 기구하고 불행한 여인들이었지만 눈밝은 하느님은 이들을 당신 구원의 도구로 활용하십니다. 사람 눈에는 불가사의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누구도 차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적재적소에 위치시켜 그 몫과 역할을 다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진실하고 한결같은 믿음과 책임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리아를 통한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에서 족보는 절정을 이룹니다. 여기서 하느님 구원 섭리에 결정적 도움 역할을 한 분이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다.”
마침내 하느님의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하느님의 무한한 기다림의 인내의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새삼 구원의 길에는 요령이나 비약이나 도약은 불가함을 봅니다. 하나하나의 과정에 충실하며 서두르지 않고 사람 눈높이에 맞춰 끝까지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려온 하느님의 사랑이 영원한 감동입니다.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일을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응답의 협조가 절대적입니다. 불림받은 이들이 각자의 제자리에서 믿음으로 응답했기에 마침내 구원자 예수님 탄생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됨을 믿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교회 공동체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역할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저 달이 다할 그날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디스리게 하소서.“(시편72,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