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2년 12월 27일 화요일[(백)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2년 12월 27일 화요일[(백)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본기도
저희에게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1서의 시작입니다.1,1-4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 주님은 임금이시다. 땅은 즐거워하고, 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 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 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
복음 환호송
○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모임이 주님을 기리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거룩한 만찬에서 복된 요한 사도에게 계시하신 영원한 말씀의 신비를
저희가 이 성찬의 잔치에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요한 사도가 선포한 분,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언제나 저희 안에 머무르시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주님의 애제자
-사랑의 사도, 성 요한-
"당신은 드높은곳 오르시어서, 하늘의 그신비를 보시었으며
천주의 어린양과 교회의 신비, 크옵신 은혜입어 통찰하셨네."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 아침 성무일도 아름다운 찬미가 한연을 나눕니다. 엊그제 성탄 밤미사시 성체를 영할 때 177장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성체 성가를 들으며 제 가장 좋아하는 성가를 확정지었습니다. 그동안 가끔 들을 때 마다, “참 좋다!” 생각했는데 새롭게 각인되었고 어제는 하루 종일 틈틈이 불러 보았습니다. 3절까지 내용도 다 좋습니다만 1절만 다시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며,
저 광야의 험난한 길 사십년을 걸어갔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올해는 제가 수도원 입회후 만 40년이 되는 해라 더 각별한 느낌입니다. 얼마나 위로와 평화가 넘치는 멋진 가사에 곡인지요! 말씀이 살이 된 것이 성체요 바로 우리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체를 영하면서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참사람임을 확인하는 참 은혜로운 성가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축일을 지내는 주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이 된 느낌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이었고 오늘은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 요한 축일입니다. 두 성인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요한이라는 뜻은 ‘주님께서 은혜로우시다’인데 참으로 천수를 누리며 은혜로운 삶을 살았던 요한 사도였습니다. 6년경 베싸이다에서 태어나 에페소에서 100년경 선종하셨다닌 무려 90대 중반까지 장수했던 사도였습니다. 12사도중 유일하게 피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순간마다 대동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고, 바로 이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은 그의 주님 사랑이 탁월했음을 제자들도 인정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요한의 상징은 독수리인데,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구세 사업만 기술한 반면, 그의 저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인생 말년, 90대 중반 나이에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 합니다. 성 예로니모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항상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래도 신도들이 같은 설교 내용에 대해 불평하자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좌우간 사랑의 사도 요한답습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끈질긴 도전이 영지주의입니다. 신종의 영지주의는 여전합니다. 아마도 세상 끝나는 날까지 영지주의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육이원론, 성속이원론의 뿌리 깊은 이단입니다. 물질세계나 인간 몸을 죄악시 했습니다. 육신은 감옥이요 무덤으로 구원은 육신의 무덤에서 감옥에서 탈출이라 생각하여 육신을, 물질세계를 천시했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결정적 답이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정녕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사셨다.”
이 한 말씀이 결정적으로 영지주의 이단을 끝장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인간의 몸도, 물질세계도 구원받아 거룩해 진것입니다. 영육(靈肉) 이원론이, 성속(聖俗) 이원론을 일거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어디나 성(聖)과 속(俗)이 하나인 성속일여(聖俗一如), 강생의 신비로 거룩해진 몸이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래서 성체성가 177장이 그렇게 고맙고 반갑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1서 요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 또한 영지주의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진리에 대한 애제자다운 요한의 고백입니다. 생략할 것 없이 전부 인용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유령이나 투명인간이 아니라 참사람이자 참 하느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적으로 와닿는 사도 요한의 증언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에 참여함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 그분의 첫째 증인들과의 친교, 그리스도인들과의 친교로, 친교의 끈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친교중에 살아감으로 충만한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친교의 교회를, 친교의 기쁨을,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애제자 요한의 주님 사랑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수제자 베드로 보다 빠른 사랑의 발걸음이었지만 그의 겸손한 사랑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빈무덤에 입장합니다. 베드로와 달리 애제자 요한은 말끔히 정리된 빈무덤을 일별(一瞥)하는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 주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보고 믿었다” 요한 사도의 믿음의 눈, 사랑의 눈이 바로 빈무덤의 상황을 일별하는 순간 주님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재미있는 주석을 읽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비교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뵈러 갈때는 너울을 벗었지만 나와서는 빛나는 얼굴의 광채때문에 백성들 앞에서는 너울을 썼다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이제 인성의 너울, 얼굴을 쌌던 수건 아마포는 쓸모없게 되어 그대로 신성의 얼굴로 아버지께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예수님 얼굴을 반영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는 날, 우리 모두 인성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처럼 신성에 빛나는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를 뵈올 것입니다. 의인이자 마음 바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은 화답송 아름다운 시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시편97,11-12). 아멘.
2.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려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기도, 관상기도.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관상하는 단계에까지 올랐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요한 1,17-18)
요한은 그리스도와 3년을 함께 하였고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어 비밀스러운 것까지 물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뵈니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고 정확히 기록한 이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보는 것을 우리는 ‘관상기도’라 합니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그분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신성, 곧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굳은살을 관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부모님을 보는 것과 그분이 고생한 흔적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님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 곧 부모님의 영광을 보아야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의 영광, 곧 사랑의 표현, 어쩌면 표징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1코린 3,17-18)
이는 분명 관상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변하는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세처럼 얼굴에 너울이 씌워져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어땠어야 할까요? 부모님의 영광, 곧 부모님의 사랑을 보았어야 합니다. 처음에 부모님을 의심할 때는 부모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리 밑으로 진짜 어머니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굳은살을 통해 부모님의 영광을 볼 때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 사랑을 믿고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도착합니다. 물론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궁금하기도 했을 테지만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보고 나서야 요한도 들어갑니다. 요한도 분명 무언가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장으로 뽑아주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이 능력이 오히려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관상기도는 사실 원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지 못하면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보면 애정결핍으로 부모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부모를 괴롭히는 금쪽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히는 이유는 단 하나, 불안함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녀임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모는 더 지쳐갑니다. 그래서 더 조를수록 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을 혼자 키울 때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힘들게 자신을 키운 부모의 손을 잡아주고 발톱을 깎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줍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힘이 납니다. 그렇게 더 높은 사랑의 표징이 나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표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은 지칩니다. 그러면 그들을 관상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관상기도는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더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먼저 지금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영광은 발밑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발을 만져보고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면 그 영광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볼 때는 라면 한 그릇도 그분들의 살과 피가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께서 주시는 모든 사랑 안에서 그분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두 분이 써 보내신 편지는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모의 영광은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따라서 내가 겸손하여지지 않으면 그분들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위만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그분의 영광을 봅니다. 제가 어머니께 드린 용돈을 어머니는 쓰셨을까요? 저에게 다시 주기 위해 하나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다 모아놓으셨습니다. 감사해야 그분이 지치지 않고 더 큰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무덤은 그저 그분께서 묻혔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무덤뿐입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한없이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 남긴 자취가 무덤뿐이었기에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남겨놓은 사랑에 머무를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 영광을 찾으려 해야 할까요? ‘성체’입니다. 보잘것없는 밀떡이지만 그 밀떡 안에 완전한 하느님 신성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냐고 물으면 신자들은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려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직접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육체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남겨놓고 간 흔적에서 그분을 발견하려고 머물러야 합니다. 이 겸손함이 진정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다른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거나, 읽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복음 말씀인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신부님은 문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동양의 고전을 접목해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자캐오 통장’을 만들었다는 신부님의 강론도 제게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피정이나 특강 때 받은 강사료는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축일에 받은 축하금도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그 통장의 이름은 ‘자캐오 통장’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통장에 있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로 자캐오 통장을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강론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으니 신부님의 강론은 살아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강론을 쓰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 강론의 원천은 ‘복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4개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입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표징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데 있어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아예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만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의 공동체에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었습니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원형인 아담의 후손이며,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4.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2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심으로 얻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이름 때문에~”(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 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아멘.
요한 (사도)(St. John) 사도,복음사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가 요한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는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이다. 이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흥분을 잘 하였기 때문에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예수님의 주요 행적, 예컨데 거룩한 변모, 게세마니동산의 기도와 같은 지극히 중요한 때에 베드로와 함께 자리하였다. 복음서 여기 저기에는 요한이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라는 인상을 주며, 최후 만찬 상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긴다. 또한 그는 부활절 아침에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의 빈 무덤으로 달려 갔으며, 빈 무덤을 보고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 그는 후에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참석했고 사도 생활할 무렵엔 파트모스섬으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 강생에 초점을 두어 자신의 집필 중심 테마로 삼았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 복음과 요한서간 1,2,3,서와 묵시록이 그의 저작, 혹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저작이라고 한다. - 출처: 성바오로딸수도회 성인찾기(https://fsp.pauline.or.kr/?c=saint&m=find) 중에서 - |
[12/27(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되새김 구절]
1. 사도 요한은 인생 말년, 90대 중반 나이에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 합니다. 성 예로니모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항상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래도 신도들이 같은 설교 내용에 대해 불평하자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보고 믿었다” 요한 사도의 믿음의 눈, 사랑의 눈이 바로 빈무덤의 상황을 일별하는 순간 주님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1코린 3,17-18)
이는 분명 관상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변하는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3.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찬가’입니다. 로고스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조재형 신부)
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이름 때문에~”(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 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12/27(화) 제3일차 기도]
하느님!
구유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 하느님!
사랑이신 아기 예수 하느님!
제 삶이 아기 예수 하느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 2022년 12월27일(화) 6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