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21일 토요일[(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신부님 강론3개

마르티나 2023. 1. 21. 08:43

[매묵]2023년 1월 21일 토요일[(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신부님 강론3개

 

오늘 전례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녀는 청혼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된다.

입당송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이들을 선택하셨으니
복된 순교자 아녜스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저희가 한결같은 그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9,2-3.11-14
형제 여러분,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7(46),2-3.6-7.8-9(◎ 6)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복음 환호송

사도 16,1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마태 13,44-4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일찍이 박해와 싸워 이긴 복된 아녜스의 생명을
제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듯이
그를 기리며 드리는 이 예물도 어여삐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묵시 7,17 참조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성인들 가운데 복된 아녜스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전에 동창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창 신부님은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동창 신부님이 'SKY' 대학에 지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본인에게도 좋고, 학교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굳이 서울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대학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설득했지만 동창 신부님의 강경한 주장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벌써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동창 신부님처럼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기에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담임선생님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교가의 내용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움의 목적은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목적은 성공, 명예, 권력을 향한 사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학교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미친 짓을 선택하려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미친 짓을 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미친 짓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친 짓을 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짓을 몸소 행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사제들이 참된 행복을 찾기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미친 짓이 신앙의 기준으로는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거름이 되기보다는 화려한 꽃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는데 세상의 창고에 보화를 쌓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때문에 가슴이 벅차야 하는데 말씀이 바람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촛불이 재가 되어야 하는데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식과 관습의 에 갇혀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세상의 것들에 머물면서 말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제들이 있다면, 자비를 베푸는 사제들이 있다면, 온유한 사제들이 있다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제들이 있다면, 믿음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사제들이 있다면 그래서 미친 짓을 하는 사제들이 행복해 한다면 성소는 다시 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불쏘시개가 없는데 밑불이 없는데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내가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시간이 참된 행복의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은 어떤 행동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행동이 참된 행복의 행동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도에 머물며,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120.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마르 3,13)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의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인(聖人)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성소(聖召)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이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바쿡3,19)

 

아침 성무일도중  하바쿡 찬미가 마지막 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제 저는 1시간 54분 9.1km를 걸었고 열량 소비는 384칼로리라는 만보기의 기록이었습니다. 또 휴대폰 만보기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당신 최고의 날”이라는 말마디가 나왔습니다. 정말 어제는 걷기의 기쁨과 행복을 실감했던 제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2016년부터 8년째 무릎 연골 파열로 하늘병원에서 받은 치료 효과와 더불어 끊임없이 매일 걸었던 효과인 듯 싶습니다.

 

어제 별내 신도시에 소재한 피부과 병원에 마지막 치료차 왕복 80분 걸으면서 제 최고의 운동이자 취미활동은 ‘걷기’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걸으면서 걷기의 유익함에 대해, 또 얼마전 수도회를 퇴회한 형제를 생각하며 성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수도자 신분의, 사제 신분의 옷이, 삶이 그렇게 불편하고 그 짐이 무거웠나 많이 생각했습니다. 

 

삶은 100m 단거리 전력 질주의 경주가 아니라 평생 장거리 걷기입니다. 성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도중하차 하지 말고, 자기 페이스대로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무슨 형태의 삶이든 자유롭고 행복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행복하게, 찬미하고 감사하며, 평화롭고 기쁘게, 자발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자문해봐야 할 물음입니다. 과연 내 성소는 선물인가 짐인가? 선물이라 믿고 생각할 때는 찬미 감사와 더불어 자발적 분투의 노력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무겁고 불편한 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자발적 기도와 사랑의 수행이 절대 필수 조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되기가, 성인되기가, 하느님의 자녀되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인간답게 너무 막연합니다. 존엄한 품위의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아주 분명합니다. 인생 광야 여정 살다 보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성인, 괴물, 폐인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나 괴물이 됩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본인은 폐인인지 괴물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괴물같은, 폐인같은 사람들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생각없이 막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이자 폐인입니다. 특히 정치권을 보면 이런 눈살 찌푸리게 하는 괴물같은 이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참나의 참사람이 되어 성인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평생과제인지 깊이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어제 격정(激情)에 싸여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라는 기도하듯 단숨에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다

옛날에도 성인과 악인이 있었고

오늘날도 그렇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아니 역사의 퇴행이다

 

1회용 소모품처럼 소모품처럼 된 사람들

쓰레기들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쓰레기같은 사람들

너무나 자기를 돌볼줄 모른다

 

날마다 일간신문 일별할 때마다 깨닫는 사실

아,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위로는 괴물들, 아래로는 폐인들뿐이네

 

이렇게 먹고 쓰고 살면

지속가능한 삶은 불가능한데

 

의식없이, 생각없이, 영혼없이, 자기를 잃고 사는

무수한 무지의 사람들

 

사람이 희망이라는데

참 사람 찾아보기 힘드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모르는 참 뻔뻔한 무지의 후안무치의 사람들

정신 바짝 차릴 일이다

 

답답할 때 마다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전사로서 

각오를 새로이 한다

존엄한 인간 품위를 새로이 한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절박한 영적 전투의 삶이다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2023.1.19. 아침

 

오늘 복음에 연관하여 성소에 관해, 또 성인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뿐 아니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가 넓은 의미로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라고 부름받은 우리들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은 열두 사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거룩한 미사분위기가 이 장면과 흡사합니다. 바로 주님 앞에서 우리의 성소를 새로이 하는 참 고마운 미사시간입니다. 새삼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요 평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하루의 시작에 앞서, 사도로 파견되기에 앞서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친교를 깊이하는 관상의 미사시간이 우리의 성소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열두 사도의 면면이 다양하듯 우리 또한 참 다양한 성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성소의 신비요, 평생 언제 어디서나 서로 존중과 배려해야 할 각자 고유의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성소의 완성이 아니라 자발적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생 끊임없이 돌보고 가꿔가야할 성소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우리에게는 경종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 제자중에 괴물같은 유다가 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입니다. 유다의 신비, 악의 신비입니다. 참으로 성소를 가꾸고 돌보는데 태만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바로 배신자 유다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살에 앞서 베드로처럼 철저한 회개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참 큽니다. 우리의 성소에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유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데 복음의 열두 사도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새계약의 중재자 대사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례미야가 예언한 새계약이 대사제 예수님 덕분에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는 예레미아서를 인용한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새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들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깨닫는, 실현된 진리입니다.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의 중재로 인해 실현된 새계약의 은총이 차고 넘칩니다. 복음의 열두 사도가 누리지 못한 우리들의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성소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넘치도록 주십니다. 끝으로 다음 기도문을 들으며 성소를 새로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21(토)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짓’을 몸소 행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이영근 신부)

 

3. 자유롭고 행복하게, 찬미하고 감사하며, 평화롭고 기쁘게, 자발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자문해봐야 할 물음입니다. (이수철 신부)

 

[1/21(토)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28일 기도]

 

하느님!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찬미하고 감사하며, 평화롭고 기쁘게,

자발적으로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월21일(토) 7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