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11일 토요일[(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세계 병자의 날)]/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11일 토요일[(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세계 병자의 날)]/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는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한다.
입당송
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본기도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9-24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 산들이 솟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생기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시옵니다. ◎
○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빵과 포도주를 마련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셨으니
이 예물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또는>
마태 5,4.6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대화는 신선하고, 달달합니다. 너무 달달하다 못해 닭살이 돋기도 합니다. 멀리 출장을 떠난 연인에게 “자기 어디에 있어!”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요? ‘응 난 늘 자기 마음에 있어’가 정답이 아닐까요?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출장을 어디로 간 것이 궁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디에 있어도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마음에는 사랑하는 이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 정답은 “저는 뉴욕에 있습니다.”는 아닐 것 같습니다. 정답은 “저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둘이나 셋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담아 너는 무슨 일을 하였느냐?”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질문에 아담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제가 알몸이라서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네가 알몸인 것을 어찌 알았느냐?” 아담은 또 변명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으로 주신 이 여인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열매를 먹고 나니 제가 알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열매를 먹었느냐?” 여인도 변명을 하였습니다. “뱀이 저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해서 먹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아담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 노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여인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출산의 고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며칠 동안 먹지 못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이 있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보리떡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몇 개나 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도 살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가 가진 보리떡 일곱 개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자신들이 가졌던 보리 떡 일곱 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보리떡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굶주린 백성 4000명이 충분히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체험이 아주 강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충분히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도 했습니다. 보리떡이 몇 개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이 충분히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바구니가 남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분열과 갈등을 키우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미루고, 남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이 책임을 하와에게 미루지 않았다면, 하와가 책임을 뱀에게 돌리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회개를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용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변명에는 책임이 주어지지만 나눔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2절)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주님께서 지금은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신다. 군중들은 사흘째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셔서 굶겨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제자들도 난감하였다. 그리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많은 군중을 먹이려 하니 빵을 한 덩어리씩 나누어준다고 하더라도 돈이나 그 부피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4절).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3절)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난감해하는 것이다. 아직은 주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 문제를 빨리 잊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의를 하고 계시며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는지 내어놓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일곱 개 있습니다.”(5절) 대답하면서 그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다. 빵 일곱 개는 그 많은 군중 앞에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빵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했다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제자들의 나눔과 주님의 축복이 그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의 축복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나누지 못할 때 절대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상하 성당에서 이 기적을 자주 체험할 수 있었다. 처음에 부임하여 음향을 고치면서 신자들이 주님 앞에 봉헌할 수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때까지의 성당과 강당의 음향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신자들 모두가 만족하는 음향이 된 것과, 엘이디 전구로 성당 건물 전체를 교환하여 전례의 공간으로 변화될 수 있어서 성당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라자로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원회원들의 일곱 개의 빵이 라자로 마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그대 있음에” 음악회의 빵 일곱 개가 해외의 한센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라자로 마을의 가족들까지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10.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는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된 영적 삶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대구 사수동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보 축일이라 대축일로 지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네딕도 오빠와의 오누이 관계가 신비롭습니다. 산같은 정주의 대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 오빠와의 관계도 참 흥미롭습니다. 이들의 주님 안에서 영적우정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는지 서로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생몰生沒연대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두분이 쌍둥이였고 두분 다 480년 같은 해에 태어나 547년 같은 해에 선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녀 사후 얼마 지난 그해에 돌아가셨던 듯 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두분의 영적우정(33장)과 성녀의 죽음(34장)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인의 몬테카시노 수도원 가까이 수녀원에서 살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수녀는 일년에 한 번, 오라버지 베네딕도를 만나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했던 듯 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성녀는 세상을 떠나던 해, 성인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셨으나 총총히 떠나려는 매몰찬 오라버니가 원망스러워 성녀는 간절히 기도하셨고 갑자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로 인해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에 못 돌아가고 밤새 대화를 나눴다는 전설적인 내용이 베네딕도 전기 33장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남매가 만난 삼일후 성녀는 세상을 떠났고, 이어지는 묘사가 아름다워 34장 대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삼일후에 성인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에 모셔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
얼마나 열린 수도생활에 주님 안에서 아름답고 깊은 영적우정을 나눈 오누이 관계였는지요! 지금은 잘 부르지 않지만 33장과 34장을 바탕한 복음전 라틴어 부속가도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시간되면 번역된 우리말 부속가를 한번 불러 보려합니다. 이런 성녀 축일을 배려한 오늘 말씀의 배치도 참 적절합니다. 저는 오늘 성녀 축일과 말씀들을 통해 참된 영적 삶의 세부분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첫째, 경청과 환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은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의 우선적인 바램이 바로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베타니아 이들의 집에 들리셨을 때 주님의 마음을 알아챈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합니다. 마르타의 항의를 일축하시며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마르타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베네딕도 규칙 첫 마디 역시, “들어라, 내 아들아, 스승의 가르침을. 그리고 그 가르침에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라.” '들어라'로 시작되는 규칙서 첫 말마디입니다.
수도원 식탁에도 큰 산봉우리 셋을 배경한 그림의 천에 씌어있는 글자가 “들어라”입니다. 산같은 침묵과 경청의 정주 수도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묵묵히 침묵중에 바라보며 듣는 정주의 불암산은 말그대로 정주의 스승입니다. 새삼 참된 영적 삶에 경청의 환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관상과 활동입니다.
둘은 참된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둘은 우열관계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둘의 균형과 조화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인 것은 관상의 경청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베네딕도회의 모토가 둘간의 우선순위와 균형을 말해 줍니다. 저는 일컬어 목운동의 영성이라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 보고 땅 보고, 하느님 보고 사람 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이 우선순위를 절대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환대가 우선이고 음식의 환대는 다음입니다. 이래서 미사구조도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입니다. 바로 이점을 마르타는 몰랐습니다. 마르타 역시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요! 음식접대 사랑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는 마리아 같은 관상가도, 마르타 같은 활동가도 필수입니다. 마리아만 있어도 안되고 마르타만 있어도 안됩니다. 두부류의 형제자매들의 균형과 조화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둘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밖으로는 활동가 마르타, 안으로는 관상가 마리아의 두 측면을 지니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에 마르타는 크게 회개하여 깨닫고 배우며 우선순위를 바로 잡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는 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셋째,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영적우정에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입니다.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깨달음과 더불어, 배움과 더불어 마음은 순수해지고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질 것이니,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영적우정도, 보이는 도반 형제들과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다음 말씀은 광야 인생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덕목들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파트너로, 협력자로 삼아 당신과의 영적우정을 깊이하겠다는 주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참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사이든지 형제간의 사이든지, 참된 영적우정을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할 필수적 덕목이,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경책 말씀의 가르침에 마리아는 경청의 중요성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을 것이며, 마르타도 활동을 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경청의 관상에 각별히 유의해야 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오늘 앞서 소개한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영적우정은 얼마가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웠는지요!
마리아와 마르타도,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도 주님 안에서 수직적 차원에서 주님과의 영적우정을 깊이하며 더불어 상호간 수평적 차원의 우정도 깊이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주님 안에서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간의 우정도 함께 가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영적 삶을 위한 세요소를 공부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영적 삶의 중심에 이 거룩한 미사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참된 영적 삶을 훈련, 습관화하여 우리 모두 참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어제 써놓은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외딴곳”이란 자작 깨달음의 잠언성 글을 나눕니다.
-“답은
내안에 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적초월의 자리 외딴곳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적 깊이와 높이의
본질추구의
내적초월의 삶을 살자
주님 만나러
외딴곳 찾아나설 것 없다
언제 어디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초월적 거점의
내적공간이 형성되고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이 된다
참 겸손
은총의 열매다”-아멘.
[2/11(토) 연중 제5주간 토요일(세계 병자의 날),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변명에는 책임이 주어지지만 나눔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조재형 신부)
2.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참된 영적 삶을 위한 세요소를 공부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영적 삶의 중심에 이 거룩한 미사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참된 영적 삶을 훈련, 습관화하여 우리 모두 참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수철 신부)
[2/11(토) 연중 제5주간 토요일(세계 병자의 날), 제 49일 기도]
하느님!
나눔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나누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소서.
늘상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2월11일(토)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