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13일 월요일[(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13일 월요일[(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쳐라.
○ 하느님,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땅을 부르시네.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헐뜯고, 네 친형제에게 모욕을 준다.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후배 신부님들과 텍사스 끝자락에 있는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뉴욕에서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어서 시카고에서 경유하였습니다. 엘파소에는 제가 30일 피정을 지도했던 신부님이 교포사목으로 왔습니다. 환영과 격려의 차원으로 방문했습니다. 이제 미국에 온지 1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은 멀리서 온 신부님들을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방을 정하면 제게 제일 좋은 방을 정해 주었습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막 1달이 지났는데 후배 신부님은 마치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같이 간 신부님들은 모두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건강이 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내라고 해 주었습니다. 겨울에 온 신부님은 이제 엘파소의 모래폭풍과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 낼 것입니다.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을 지닌 신부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건강하고 기쁘게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평소에는 일찍 잠자리로 들어가지만 이렇게 후배 신부님들을 만날 때면 좀 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모임이 1년에 한 번 있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대표 신부님도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명목상의 대표신부님도 필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도와주는 대표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교포사목으로 미국에 온 신부님을 방문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격려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휴가를 가면 대신 미사를 봉헌해 줄 수 있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골의 작은 도시에 있는 신부님들과 규모가 작은 성당의 신부님들의 고충도 들어주고, 함께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지구장 제도처럼 북미주에도 지구장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기에 어차피 신문홍보를 다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담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와 함께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와 함께 살았던 생명들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동생을 죽였으면서도 발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생명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카인처럼 적반하장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기껏 구해 주었더니 마치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하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2. 연중 제 6주간 월요일 -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 김찬선 신부님 강론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오늘 저의 강론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렵니다.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인간만 잘못이 있고 하느님은 없으신가?
카인의 죄악에 하느님의 잘못은 없으신가?
저는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원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고.
인간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는 얘기지요.
자식의 모든 죄에 부모의 원죄가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유전자적으로 그런 자식을 낳았고,
그렇게 양육했기에 자식이 그리된 것이 아닙니까?
똑같습니다.
낳은 분은 하느님이나 부모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부터 하느님의 원죄이니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지은 것에 관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또 사랑하시기에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며,
자유를 주신 이유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다시 말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그 사랑에 관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간의 원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카인의 죄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원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습니까?
제물을 안 바쳤다면 모를까 바쳤는데 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이 분명 잘못하셨고 카인의 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는 잘못이 없다면 창세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지 않은 이유를,
굽어보시지 않은 것이 편애가 아니라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창세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친절하게 그리고
다 설명하지 않고, 다 설명해준다 해도 인간이 다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신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제물을 하느님께서 맘에 들어 하시느냐 그것을 창세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든, 그것도 우리 인간의 자유입니다.
죄를 짓는 데 쓸 수도, 사랑을 하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은 할 수 없고 죄만 짓게 만드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이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며 죄의 핑계나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미성숙이지요.
성숙하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고,
성숙하다면 자유의지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것이고,
성숙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잘 다스려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 데 쓰지 않고 사랑하는 데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힘을 쓰게 할까요?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쓰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사랑을 위해 쓸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230212. 연중 제 6주일.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24)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15,1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를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혜’는 <복음>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과 맺었던 십계명은 차차 613항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삶을 율법으로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고,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라 3,34-35)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고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곧 ‘사랑’이야말로,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옛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실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마태 6,22)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예”할 것은 “예”(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다.”(1요한 3,18)
그러니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응답 곧 원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의인이, 성인이 되는 길
-지혜, 선택, 훈련-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이런 이들이 의인들이요 성인들입니다. 어제는 배나무들의 거대한 뿌리를 보며 믿음의 뿌리에 대한 깨달음을 나눴습니다. 오늘 새벽 배밭 산책중 소스라친 깨달음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바로 배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배밭 땅의 흙입니다. 배밭 땅의 흙이 없으면 어디에 뿌리를 내립니까? 바로 똑같은 이치가 우리가 믿음의 뿌리를 내린 배밭 땅의 흙같은 공동체에도 적용됩니다.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은총은 절대적입니다.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매사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이요, 사랑과 겸손이요, 마음의 순수와 자유로움입니다. 제 집무실 커다란 게시판에는 2년전 써놨던 깨달음의 글이 지금도 붙어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의 고백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0.
그렇습니다. 공동체 생활도 정말 커다란 은총입니다. 형제들 하나하나로부터 평생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형제들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예수님 얼굴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한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도 수도원 25년 기념감사제가 없었다면, 또 마르코 수사님의 각별한 당부가 없었다면 이 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행복기도 역시 수도원에 잠시 머물렀던 바오로 신부님의 부탁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10여일 동안 순례여행을 다녀온 어느 자매님의 감사메시지도 은총의 고백이었습니다.
“아멘!
주님께 찬미 찬양드립니다!
잘 살아가겠습니다.
순례를 하며 신부님께서 강조하시던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신 말씀을 체감했습니다.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은 주님의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주셨는지 눈물이 납니다!
앞으로 더욱 긍정적이고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고백인지요! 수십년을 한결같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참 사랑스런 성녀같은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의인으로,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바라시는바 우리 모두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여 닮은 참나의 의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줍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지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은총중의 은총이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성령의 은총인 지혜뿐입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참으로 한결같이 사랑해야 할 분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제 행복기도 서두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자유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매일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주님을, 지혜를, 사랑을, 감사를, 행복을,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삶에서 선택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어리석게도 아까운 시간 불행을 선택하여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갑니까?
참 좋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집회서가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내용이라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대로, 선택하는 대로 받으리라.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얼마나 중요한 선택인지 선택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결단이자 선택의 실행입니다. 선택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선택할 때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활짝 열린 좋은 날입니다.
셋째,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깊이를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 할 바 이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의인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심오한 계시입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요, 주님은 이에 대한 근원적 처방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분, 예수님이 권위를 지니고 확신에 넘친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살인에 앞서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하며 무시하고 멸시하는 간접적 살인의 마음부터 깨끗이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바치기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으면 지체없이 용감하게 화해하고 와서 제단에 와서 예물을 바치라 합니다. 간음에 앞서 마음의 간음인 음욕부터 일소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충격요법적 표현을 통해 간음이 얼마나 치명적 죄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성적 문란이 모든 화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 눈이 죄짓게 하면 오른눈을 뽑아버리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오른손을 잘라 버리라 합니다. 말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해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엄중함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호히 죄를 끊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간음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요,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간음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불륜의 죄가 얼마나 관계를, 영혼을 파괴하는지 생각한다면 간음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긴음은 파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죄를 지었을 때는 지체없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맹세의 경우도 철두철미합니다. 무지로 인한, 제 분수를 넘은 맹세는 아예 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시니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 말하는 솔직담백한 답변뿐이니 이 이상의 것은 모두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지난 수요일 마르코 복음 말씀과 묵상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흡사 마음이 더러운 오물 가득한 쓰레기통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과연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고귀한 품위의 인간의 참으로 어둔 측면입니다. 이래서 평생 영적전쟁에 영적훈련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기 영적훈련에는 요령도 첩경의 지름길도 없습니다. 부단히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평생 훈련함으로, 쓰레기통 같은 마음을 뿌리로부터 정화하고 성화하는 길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수도자들은 죽는 그날까지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여,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영적훈련으로 삼아, 하루하루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침으로 아예 우리 마음에 애당초 죄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결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찾는 영적훈련에 항구하게 하시며 당신을 닮은 참나의 의인이자 성인으로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아멘.
[2/13(월)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쓰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사랑을 위해 쓸 것입니다.(김찬선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이수철 신부)
[2/13(월)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51일 기도]
하느님!
무량무변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합니다.
늘상 감사하며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13일(월) 6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