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2월 16일 목요일[(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2. 16. 05:47

[매묵]2023년 2월 16일 목요일[(녹) 연중 제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9,1-13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2(101),16-18.19-21.29와 22-23(◎ 20ㄴ)
◎ 주님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라.
○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
○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
○ “당신 종들의 자손은 편안히 살아가고, 그 후손은 당신 앞에 굳게 서 있으리이다.” 주님이 시온에서 당신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당신 찬양을 전하시리라. 그때에 백성들과 나라들이, 주님을 섬기러 모여들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고사에서는 전화위복,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엘파소에서 뉴욕 오는 길에 시카고에서 경유했습니다.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가 취소되어서 다시 비행 일정을 예약하니 1시간 늦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엘파소에서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40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가 예정대로 출발했으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습니다. 오히려 비행기가 취소되고 다른 비행기를 예약한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나무는 키가 크지만 뿌리가 깊지 못합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아도 충분히 양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우람한 나무인데 바람이 심하게 불면 이내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여기는 사람은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어느덧 미국에 온지 4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신부님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미국에 새로 오는 신부님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본당의 재정이 여유가 있고, 신자수도 많은 성당으로 오는 신부님은 이내 적응하기 마련입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 충분합니다. 규모가 작고, 재정 상태가 어려운 본당으로 오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만나면 찾아가서 며칠 지내면서 경험담을 이야기 해 주곤 합니다. 텃밭을 가꾼 이야기도 하고, 화초를 키워보라고도 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사제가 없던 공동체로 오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며칠 동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신부님께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명동의 교구청에서도 8년을 살았습니다.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도 3년을 살았습니다. 토론토에서 학생으로 3년을 살았고, 뉴욕에서 신문을 만들며 4년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제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면, 기도하면서 살면 그 자리가 꽃자리였습니다.

 

노아는 신대륙으로 처음 발을 디딘 사람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가족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아무런 조직도 없는 곳에 새로이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제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징표를 주셨습니다. ‘무지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이제 막 하늘을 날아가는 어린 새처럼 낯선 곳에서 둥지를 만드는 젊은 사제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징표를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되는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듯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2023년 가해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마르코 8,27-33

 

내 안에 들어있는 사탄의 모습!

 

여러분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쎈 말이어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팔자 사나운 저 같은 경우, 누군가로부터 그런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충격이 엄청나더군요.

사나흘 동안 정말이지 기분이 꿀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도 아니고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를 향해 사탄이라고 외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코 복음 8장 33절)

수제자를 향해 사탄이라고 한 배경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사탄이라고 하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저 역시 가끔 제 안에 들어있는 사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때로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머릿속은 오직 인간적인 것들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보다 인간들로부터의 인정을 더 추구합니다.

진지하고 영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오로지 세상적인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마음속엔 오직 현세적 성공, 사람들의 박수갈채, 축척, 상승의 욕구로 가득 차 있어, 보다 본질적인 것들,

영원을 향한 갈망, 하느님을 향한 발돋움, 희생, 배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풀잎 위에 맺혀있는 아침 이슬같이 해가 뜨면 즉시 사라지고 마는 허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었기에, 그토록 강경한 발언까지 사용하며 회심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것들,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집, 지위, 명예, 재물, 학력...사실 그 모든 것들은 잠시 후 우리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다 빠져나갑니다. 본질적인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멉니다.

 

별것도 아니니,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전혀 신경 쓰지 마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보다 영원한 대상, 보다 오래 지속되는 대상, 결국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대상이신 하느님,

그분을 향한 마음의 갈망, 그분과의 끈을 놓치지 마라는 의미의 말씀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인 것입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며 충만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100명이 공통적으로 지닌 한 가지 특징은

‘빛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 세상의 아름다움이 주는 위안도 정말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끼리 주고받는 사랑도 얼마나 감미롭고 풍요로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가치, 더 큰 빛, 더 큰 사랑에로의 성장을 오늘 우리에게 바라고 계십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보기는 보되 눈이 가려져 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그는 마치, 장미꽃을 그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뿐,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불이 자신을 뜨겁게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 알뿐, 주변을 환히 밝혀준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대체 무엇이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입니다. 이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성령의 도유를 말합니다. 곧 영으로 도유되어 치유된 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고, 나아가서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보며, 그분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와 사랑을 보는 눈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개안開眼의 기쁨,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만남-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116,12-13)

 

화답송 시편이 은혜롭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마음이 됩니다. 잘 들으라 있는 귀요, 잘 보라 있는 눈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은 영성생활의 기본입니다. ‘들어라’로 시작되는 베네딕도 규칙이요, ‘보라’ 자주 언급되는 성서에 말마디입니다. 그리하여 귀가 어두우면 보청기도 하고 눈이 어두우면 돋보기를 합니다. 

 

색맹色盲이란, 문맹文盲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색깔을 분별 못하는, 색에 눈멈을 뜻하는 색맹色盲이요, 눈이 있어도 글자를 몰라 읽지 못함을 문맹文盲이라 합니다. 얼마나 답답한 색맹에 문맹이겠는지요. 참 다양한 눈멈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면 보지 못합니다. 탐욕, 애욕, 질투, 분노, 집착, 어리석음 등 모두가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그러니 육안肉眼만 있는게 아니라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도 있고, 영의 눈인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날로 약화되도 심안의 시력은,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선물도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나 탐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무지에 눈이 멀어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곁에 놔두고 슬프게, 불평하며, 불행하게 산다면 너무 어리석은 어처구니 없는 삶입니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서 개안의 기쁨은 절대적이요 개안의 여정이 참 소중합니다. 눈이 열려 ‘있는 그대로’ 실상實相을, 진상眞相을 보는 개안開眼이라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지요. 바로 행복기도 다음 대목은 개안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자주 인용했던 자작 행복기도이던지요!

 

“주님, 

당신을 만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에 참으로 결정적인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바로 마음의 눈이, 무지의 눈이 열리는 개안인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릴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세례성사는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을 상징하는 입문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복음의 일화와 제1독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 역시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와 초대교부들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이를 고치시는 내용이 은혜롭습니다. 바로 그 어디나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는 자리가 벳사이다입니다. 오늘 개안은 그대로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림을 상징하니 그대로 세례 은총입니다. 개안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니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하는 다음 복음이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바로 점진적인 개안의 과정은 그대로 우리 평생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날로 주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함께가는 개안의 여정에 밝아지는 마음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례성사로부터 시작된 개안의 여정은 날마다의 성체성사, 주기적인 고백성사라는 두 평생 성사 은총이 날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게 합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도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대중의 인기와 호기심에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겸손한 면모입니다. 이처럼 평생 날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의 만남중에 서서히 좋아지는 마음의 눈, 마음의 시력입니다.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질수록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무지에 눈멀 때 괴물이요 폐인이 될 수 있지만 개안과 더불어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노아는 홍수의 와중에도 방주에 머물다 구원되니 그대로 물로 새롭게 태어난 세례성사의 구원 은총을 상징합니다. 역시 방주에서 나오는 구원의 여정도 점차적인 과정을 밟습니다. 얼마나 신중한 믿는 이의 처신인지 믿는 이들의 모범인 노아입니다. 세례의 구원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그의 첫 제사가 참으로 개안한 노아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세례를 통해 신인류 노아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셨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짐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큰 가르침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우리의 무지의 악, 무지의 어리석음, 무지의 탐욕을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지속가능한 일상이 계속되리라는 주님의 확약의 말씀인데, 무지한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해 기후위기를 초래함으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위협받고 있으며 지속 가능했던 순환의 삶이 무너지고 있으니 이것은 순전히 무지한 인간탓입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우리 무지의 눈을 밝혀 주시어 생태적 회개의 실천에 더욱 분발 노력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시편116,15). 아멘.


  [2/16(목)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어디에 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제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면, 기도하면서 살면 그 자리가 꽃자리였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영원한 대상, 보다 오래 지속되는 대상, 결국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대상이신 하느님,

그분을 향한 마음의 갈망, 그분과의 끈을 놓치지 마라는 의미의 말씀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인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입니다. 이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이영근 신부)

 

4. 육안肉眼만 있는게 아니라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도 있고, 영의 눈인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날로 약화되도 심안의 시력은,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선물도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이수철 신부)

 

[2/16(목)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제 54일 기도]

 

하느님!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16일(목) 5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