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2월 17일 금요일[(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2. 17. 08:15

[매묵]2023년 2월 17일 금요일[(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마리아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3(32),10-11.12-13.14-15(◎ 12ㄴ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땅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보신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빚으시고, 그들의 행위를 속속들이 헤아리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5,1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 알렐루야.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전에 미운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읽었습니다. 오리 새끼들 중에 유난히 키도 크고, 털의 색이 다른 새끼가 있었습니다. 물 위에 비친 모습이 다른 새끼들과는 달랐습니다. 엄마 오리는 다른 새끼들과는 다르지만 똑같은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어느 겨울 미운오리 새끼는 호수로 날아온 백조를 보았습니다. 미운오리 새끼는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백조들과 함께 힘찬 날개 짓으로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도 읽었습니다. 실력은 있지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함께 모여 지옥 훈련을 하였습니다. 모난 성격들이 다듬어지고 외인구단은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는 만화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진 사람은 미운오리 새끼 취급을 받곤 합니다. 거짓과 욕망으로 출세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눔과 겸손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은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 기획팀이 발족하였습니다. 보스턴, 탬파, 버지니아, 토론토에 사는 분들이 열정과 신념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상과 열정으로 신앙의 차원을 높여보려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습니다. 좋은 강사를 섭외하고, 홍보하고, 강의를 개설하였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하는 이분들에게 지도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으니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유리처럼 반사하는 성격이 아니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성격인 저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 기획팀이 발족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뉴욕에서 모여 단합대회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숙소를 구하고, 함께 미사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획팀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미사를 하고, 신앙체험을 나누고, 신앙기획팀이 나갈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운오리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아무런 이상도 없이, 목적도 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는 애벌레는 끌어 내렸습니다. 따라오는 애벌레는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애벌레들만이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 끝은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출세,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를 보았습니다. 나비는 측은한 눈빛으로 애벌레에게 그 길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의 눈빛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듣고 욕망이라는 을 오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누에가 된 애벌레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나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나비와 함께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욕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증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겸손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에 미운오리 새끼가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꿈과 이상을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면 그들의 꿈과 이상을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다면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누에가 되지 않는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2.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강론


대홍수 후에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주해서 자리를 잡은 장소 이름을 창세기 저자는 히브리어로 ‘신아르 שנער’ 라고 밝힙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거대한 탑을 쌓자고 제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하여 벽돌을 굽고 그것을 가지고 바빌론 탑을 건설하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바벨탑’이라는 복합단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אֶת-הָעִיר וֶאֶת-הַמִּגְדָּל)’보시고(창세 11,5)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겨레이고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탑을 건설하는 것으로 보시고 사람들의 말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자 사람들이 서로 말이 틀려 서로 알아듣지 못하자 탑을 세우는 것을 중단한 것입니다.

바빌론 제국의 이름에서 왔으리라는 바벨(בָּבֶל)은 희랍어 칠십인 역(LXX)에서 바뷜론(Βαβυλών)을 번역하였습니다. 바벨의 의미를 성경가자가 이미 설명한대로 ‘혼동’ ‘뒤섞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성경의 내용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Ziggurat)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엘람도시의 탑, 떠 우르 제3왕조 시대에 재건한 달의 신인 난나르에게 봉헌한 지구라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모델로 삼은 것은 창조의 신, 마루둑(Marduk)을 주신으로 삼는 지구라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계단식 탑이며 신전은 하늘의 신(神)들과 지상을 연결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창세기 저자가 바빌론의 이 지구라트의 영향을 받아 이를 토대로 바벨탑의 이야기를 전했으리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주제는 이방의 거대한 지구라트나, 바벨탑도 다 하늘 아래에 있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 어떤 것도 비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의 의미가 주어지듯, 결국 인간은 서로 다른 언어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아 바벨탑을 쌓는 것이 중단 되고 맙니다. 창세기 저자는 바벨탐의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창세 11,8-9)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으로 초대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고선 이론적으로나 머리로는 그 모든 것을 해나가는 못하면 구원에서 제외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자신의 구원이라고 가르치시며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36-3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절)라는 반대되는 말씀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풀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생명을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면 그는 죽은 것 같지만 사실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고통을 안고 삽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고통으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고통으로 바뀌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때로 고통과 희망을 섞어가며 사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나의 발걸음 인도하며 걸으시는 주님을 확실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때 가서는 분명히 볼 수 있는 식을 줄 모르는 희망이 우리의 발을 비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세우려고만 하는 바벨탑의 교훈을 새기며 십자가를 기쁘게 지며 오늘을 살아가는 참다운 신앙이 되는 은혜를 청해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230216. 연중 제6주간 목요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 말과 ‘명백히’(행전;담대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 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 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기꺼이 걷게 하소서.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영원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

-무지개와 십자가-

 

언젠가 허겁지겁 저를 찾아와 무지개를 보라 하던 수도형제가 생각납니다. 이젠 오염과 공해로 무지개 보기 참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구나 나이 불문하고 무지개를 볼 때면 지상과 하늘을 잇는 곡선의 하늘길 같은 모습에 마음 설레는 동심을 느낄 것입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만 아니라 때로는 수도권에서 모두 보았다는 말에는 참 신비스런 느낌도 들었습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1770-1850)의 유명한 ‘무지개’란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 뛰노라.

 

나 어려서도 그러했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고

나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네.

 

만약 그러하지 아니하다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

타고난 그대로 경건한 마음 이어지기를

빌고 바라네.”

 

시의 원문 제목은 ‘무지개(Rainbow)’가 아니라 “내 마음 뛰노라(My Heart Leaps Up)”입니다. 읽을 때 마다 마음 설레게 하는 명시입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무지개’가 아닌가 하는 재미있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온세상에 보여주신 영원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 지상과 하늘을 잇는 하늘길이 바로 무지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며 새롭게 출발하는 모습이 참 장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신후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약하시며 그 계약의 표징으로 무지개를 선물하십니다. 이 대목을 다시 인용하여 나눕니다.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무지개라는 영원한 구원의 표징, 계약의 표징으로 스스로 한계를 정하시며 확약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롭고 겸손한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은 물론 살아 있는 모든 지상 생물들 모두에게 차별없이 구원의 표징이자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선물하시니 여기서 제외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제 한겨레 신문은 이해인 수녀님의 인터뷰 기사로 한면을 가득채우고 있었습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의 “안아만 주기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 모자라요” 제하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시인일뿐 아니라 수도자인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유명세에 주눅이 들지만 스스럼없는 그의 천진함에 금세 놀라게 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같은 파릇함은 여전하다. 그가 2008년 대장암에 걸려 항암 주사를 30번이나 맞고, 방사선 치료를 28번이나 할 만큼 지독한 투병과정을 거쳐 지금도 암세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제 포옹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못난 모습마저도 다그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안아주는듯한 넉넉한 성모상을 닮아가는 그가 건네주는 마지막 말이 봄햇살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필 거예요.”-

 

언젠가 “사람은 꽃이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이다”라는 제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인생, 매일 꽃처럼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일입니다. 안아 주라 있는 가슴의 품입니다. 안아 주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상입니다. 모두에게 영원하고 보편적인 구원의 표징,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를 선물하신 하느님은 모두를 안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처인 그분의 품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바라보는 눈이신 분

 

하느님은

모두에 귀를 기울이는 귀이신 분

 

하느님은

모두를 안아주시는 품이신 분”

 

저절로 참 넉넉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날이면 날마다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 품안에서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구약의 영원한 계약의 표징에 이어 신약의 영원한 계약의 표징이 바로 파스카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간혹 하늘에 무지개처럼 십자가의 형상이 보였다는 기적같은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종파를 떠나 십자가는 누구나의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된 느낌이 듭니다.

 

보편적이란 뜻의 가톨릭catholic인 천주교를 그대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십자가 고상입니다. 참으로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보편적인 종교가 가톨릭입니다. 언젠가 피정집 제의방에서 인사하고 미사차 입장하려는 순간의 난감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인사할 십자가 고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새삼 파스카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삶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 역사의 중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면에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영광송 기도는 얼마나 좋은 구원의 표징인지요! 제가 가톨릭 수도사제에서가 아니라 정말 이보다 짧고 좋은 기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파스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이,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란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을 생활화할 때 말 그대로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안정과 평화의 삶이요 두려움과 불안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파스카의 구원에 방해가 된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분노도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뿐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파스카의 구원의 길에 장애가 되는 이들에게는 차별없이 분노하실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옳고 멋지게 주님을 고백했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 메시아의 깊은 뜻에 무지했음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을 때 격렬한 저항으로 여지없이 탄로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호된, 충격적 질책을 하십니다. 충직한 반석같은 수제자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이, 걸림돌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기억해야 할 영원한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에 누구나 사탄으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베드로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평생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을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의 예수님이자 십자가임을 통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영원한 표징인 무지개가 신약의 파스카 십자가를 통해 더 확실히 구체화된 느낌입니다. 파스카의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마다 무지개를 연상하며 동심을 새롭게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답고 신비로운 ‘파스카의 꽃’이 되어, ‘무지개 하늘길’이 되어 살게 하시니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아멘.

 


[2/17(금)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주변에 미운오리 새끼가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꿈과 이상을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면 그들의 꿈과 이상을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다면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듣고 욕망이라는 ‘탑’을 오르기를 포기하여 나비가 되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면 그는 죽은 것 같지만 사실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며 걸으시는 주님을 확실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때 가서는 분명히 볼 수 있는 식을 줄 모르는 희망이 우리의 발을 비추는 것입니다.(정인준 신부)

3.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이해인 수녀......그는 이제 포옹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못난 모습마저도 다그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안아주는듯한 넉넉한 성모상을 닮아가는 그가 건네주는 마지막 말이 봄햇살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필 거예요.”-(이수철 신부)

 

[2/17(금)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 55일 기도]

 

하느님!

못난 모습마저도 다그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안아주는듯한...

넉넉한 성모상을 닮아가게 하소서.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17일(금)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