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24일 금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24일 금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본기도
저희가 시작한 참회의 생활을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육신으로 닦는 이 재계를 성실한 마음으로 완수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사순 시기의 재계를 지키며 이 제사를 봉헌하오니
저희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주시고
극기를 실천하는 꿋꿋한 힘을 저희에게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이 사랑의 영약으로 모든 죄의 상처를 낫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이 백성이 언제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며
지난 삶을 뉘우치오니
이 세상 순례를 마치고 영원토록 주님을 뵈옵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동창 신부님 중에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저와 비슷한데 시간이 지나면 신부님과 저는 실력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스키를 배울 때입니다. 저는 내려오는 법과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바로 리프트를 탔습니다. 몇 번 넘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곧잘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났지만 저는 늘 그 정도의 실력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강사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매번 스키장에 갈 때마다 레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비슷했는데 나중에 보니 신부님은 최고급 코스, 최고 난이도 코스에서 쉽게 내려왔습니다. 저는 스노보드는 엄두도 못 내는데 신부님은 그것도 유연하게 타고 있습니다. 역시 레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도 비슷합니다. 신학생 때 동료들의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늘 B그룹에서 테니스를 쳤습니다. 신부님은 테니스도 레슨을 정확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교구 사제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였습니다. 독학으로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운동은 레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인도 잘 모르면서 남에게 충고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구글 검색이 있어서 웬만한 선무당들은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잘못된 상식을 믿고 따라했다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나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그냥 얻어지는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무당처럼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단식의 의미를 모르면서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미를 모르면서 율법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모르면서 과부의 헌금을 조롱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안에는 썩고 있으면서 겉만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서 스키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치려했던 저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저들의 행동은 배우지 마라.”
오늘 독서는 단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율법과 규정에 따라서 지켜야 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다고 하면서 일꾼들을 다그치거나, 이웃과 다투고 못된 주먹질을 한다면 그것은 참된 단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見月望指”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달 쪽을 향해 손짓을 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뒤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다가 큰일을 잊는 다거나 본질을 잊고 곁가지에 한 눈을 파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금액, 헌금의 액수, 신자 수 등을 먼저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활동입니다. 본당의 예산은 찬조와 나눔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지역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회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하고,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라는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2. 2023년 교구장 사순 메시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제 조심스럽게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 공동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에 따라 시노드를 개최함으로써, 움츠러들었던 신앙생활의 ‘어두운 터널’에서 ‘친교, 참여, 사명(선교)’이라는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어둠 속에 머물던 지난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맞이한 사순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구원의 기쁨을 우리 삶 안에서 다시 체험하고 참여하는 가운데 파스카 부활의 신비를 잘 맞이하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 곧 온 존재를 통해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죄인인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하느님의 그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묵상하고 그 사랑, 자비, 용서를 체험하고 만나면서 사랑이신 하느님께 다시금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지금의 나’를 차분하게 직시하고,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면서 하느님 아닌 다른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두고 살아온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받고 하느님을 향해 새롭게 정향(定向)하는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는 은총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얻어주신 것처럼, 우리 삶 안에 있는 여러 형태의 부정적인 체험들이 그저 암울한 끝이 아님을 믿음 안에서 묵상하고 다시금 신앙 안에서 힘을 길어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시간입니다. 고통과 절망으로 보이는 현실, 우리 스스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저 ‘어둠’으로만 보이는 사건이나 상황에서도 절망과 좌절로 끝맺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자비의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원치 않는 여러 모습의 실패, 좌절, 이별, 병고, 단절, 죽음 등의 힘든 시간들이 그저 의미 없는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시는 다른 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둠이 짙어가는 것은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이 부활로 귀결되었음을 믿기에 우리는 이 사순 시기가 희망의 시간임을 압니다.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려운 사람끼리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아픔 중에 있는 가족을 따뜻이 손잡아 주고, 혼자 있는 이웃을 찾아주고,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열린 눈과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맞잡을 때, 빛을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특히 미사성제를 통해 믿음의 힘을 길러냅시다.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는 장(場)이요 시간인 미
사 전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그저 이천여 년 전의 역사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힘을 길어내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떨치고, 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다양한 신심 활동을 통해 믿음에 활기를 불어넣는 시간으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일상 속의 참회와 속죄로 그분 십자가에 동참합시다.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오히려 적극적인 미사 참례와 다양한 신심 활동으로 꺼져가는 신앙생활의 불씨를 새로이 지핍시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23.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셋째>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고,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왜 버려야 하는지’, ‘십자가를 왜 져야 하는지’에 있습니다. 곧 그것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은 사랑이 가져오는 결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목숨을 내놓은 결단이며, 그렇게 사랑으로 목숨을 내놓으면 오히려 목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과 죽음의 길로 드러나며, 그 생명의 길을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삶은 선택이다
-선택의 은총, 선택의 자유, 선택의 지혜-
“생명을 선택하여라.”
오늘 제1독서 신명기의 소주제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 선택의 자유, 선택의 지혜입니다. 하루하루가 선택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좋은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저절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 좋은 삶에서 좋은 선택이 나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은 은총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100% 하느님께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삶에서 좋은 선택의 은총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말그대로 노력하는 천재들입니다.
요즘 이율곡 평전을, 세종대왕 평전을 읽으며 감탄하는 바도 노력하는 천재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참 많이도 읽은 자서전들이요 평전들입니다. 앞으로도 시간되는 대로 귀감이 되는 옛 선비들이나 성인들, 위인들의 평전을 읽을 계획입니다. 우리는 옛 위인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오늘 주님 말씀은 너무나 자명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선택과 훈련입니다. 타고난 것도 끝없이 많습니다. 좋게 타고난 것들도 있지만 바꿀수 없는 부정적인 타고난 것들도 참 많습니다.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타고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고향도, 부모도, 형제도, 가정도, 재능도, 성격도, 건강도, 기질도, 외모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좋게 타고난 것들에 감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렇지 못한 경우 좌절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도 많지만,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감동도 아름다움도 기쁨도 평화도 선택입니다. 선택하여 치열히 훈련하여 습관화하여 제2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 주어진 것들, 회개로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은 결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눈이 열릴 때 선물처럼 발견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옵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선택하여 참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행복도 발견입니다. 행복의 선택, 행복의 발견입니다. 선택한 행복을, 발견한 행복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삶,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이런이들은 결코 숙명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신명기의 하느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모세가 참 고맙습니다. 선택의 달인 신명기의 모세,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선택의 달인,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강조하는 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직접적이며 감동적입니다. 곧바로 우리의 지체없는 선택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네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래야 참으로 사는 것이요 행복한 삶, 충만한 삶입니다. 시편 1장 화답송도 하느님을 선택하여 온전히 신뢰와 사랑을 바친 이들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 우리 생명, 우리 행복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시길 원하십니까? 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떠날 때 바로 스스로 자초한 불행의 연속이니 이 또한 내 탓입니다. 신명기 백성에게 주신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을 떠날 때 도처에 널려 있는 유혹들이요 악마의 덫들입니다. 시편 화답송이 하느님을 선택한 의인들과 그 반대의 악인들에 대한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의인이냐 악인이냐? 이 또한 스스로 자초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의인들이요, 이런 생명의 주님과 무관한 관계로 뿌리를 전혀 내리지 못해 뿌리없이 끊임없이 표류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바로 참내가 없는 좀비같고 유령같은 악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최상, 최고, 최선의 선택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은연중 당신을 닮아 각자 십자가의 길을 각오하라는, 때로는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선택해야 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얻은 것은 명예요 재물이고 잃은 것은 삶이요 건강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한 무지의 삶이겠는지요! 주님을 얻은 자가 자신을 얻고 세상 모두에 초연할 수 있습니다.
아, 오늘은 요한 사도의 직제자인 "신앙의 용사" 스미르나의 주교 성 뽈리카르보 사도교부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선배 성인에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있고, 성 이레네오는 성 뽈리카르포의 제자가 됩니다. 주변에서 이렇게 서로 보고 배운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155년경 화형에 처해져 의연히 순교할 때 성인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죽기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성 뽈리카르포 주교입니다.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선택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선택함으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시종여일,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요, 이 십자가의 길에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는 제 좌우명 고백시를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2/24(금)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저들의 행동은 배우지 마라.”(조재형 신부)
2.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원치 않는 여러 모습의 실패, 좌절, 이별, 병고, 단절, 죽음 등의 힘든 시간들이 그저 의미 없는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시는 다른 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둠이 짙어가는 것은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이 부활로 귀결되었음을 믿기에 우리는 이 사순 시기가 희망의 시간임을 압니다.(정순택 대주교)
3.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셋째>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고,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이영근 신부)
4. 하느님은 우리 힘, 우리 생명, 우리 행복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시길 원하십니까? 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항구히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24(금)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 62일 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저의 힘, 저의 생명, 저의 행복 입니다.
언제나 늘상 어디서나 저를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2월24일(금) 6시...수산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