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27일 월요일[(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27일 월요일[(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천상의 가르침으로 저희를 회개시키시어
사순 시기에 올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이 예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은혜로 저희 삶을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로 몸과 마음에 힘을 얻고 비오니
저희가 천상 영약을 충만히 받아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이 백성의 마음을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시어
해야 할 것을 깨닫고
올바른 일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가톨릭평화 신문 2월 12일 가사에서 3가지 소식을 보았습니다. 1면에는 암 환자들을 위해서 20억 원을 기부한 김성주 씨의 이야기입니다. 김성주 씨는 가족들을 설득해 동생 김계숙 씨의 유산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마뗄암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김성주 씨도 매년 2억 원씩 5년간 더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불화를 겪고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씨 가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유산을 봉헌하였습니다. 6면에는 교황님이 ‘민주콩고와 남수단’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님은 민주콩고에서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로 용서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수단에서는 난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령의 교황께서 몸이 불편함에도 기꺼이 아프리카를 방문한 것은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7면은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입니다. 홀로 가족들을 돌보며 열심히 살았던 어머니의 사연이 소개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어머니의 건강과 가족을 위해서 정성을 나눌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 2023년 02월 27일 월요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구조는 무척 단순합니다.
서론(25,31-33)에 이어 완벽한 병렬 구조로 이루어진 두 번의 대화(25,34-40; 41-46)가 이어집니다.
예수님 시대의 라삐들은 가르칠 때 대개 두 번 반복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긍정의 형식으로 다음에는 부정의 형식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가르침)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 있습니다(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루카 6,20-26 참조]; 슬기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의 집 짓는 방식[마태 7,24-27 참조]).
또한 당대의 라삐들은 심판의 어조를 잘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경우가 오늘 복음 말고도 때때로 나옵니다(다니엘서 7장 참조).
라삐들과 성경의 몇몇 대목이 이런 문학 유형을 사용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기보다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은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오고 이에 대하여 임금이 대답하는 형식입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우리 삶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어떤 가치들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두 번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여섯 가지 행위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자기의 이야기(역사)를 마칠 때 자기 자신과 하느님만 남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비유 속의 여섯 가지 고통과 가난의 상황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에 따라 성공과 실패 여부를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상황은 바로 배고픔, 목마름, 유배, 헐벗음, 병듦, 감옥입니다.
지옥은 존재합니다. 지옥이란 적어도 죄가 만들어 놓은 불행과 절망의 시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불행한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말씀을,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26. 사순 제 1주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사순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제1독서>는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이요, <복음>은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는 아담이 유혹에 걸려 넘어진 결과와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신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대전환을 가져온 거대한 두 사건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이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낙원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유혹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생명을 받게 되었던 사건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된 사건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합니다. 세례 때,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영은 이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최초로 하신 일은 바로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8,15;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귀와 승냥이들이 우글거리는 하느님의 부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천사가 시중드는 곳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에 맞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자리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쇄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사막에서 받은 유혹을 상기시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유혹받으시나 승리하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모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물질적 유혹입니다. 빵에 대한 유혹이요,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벽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정신적 유혹입니다. 영예에 대한 유혹이요,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증명해보라는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이 세상 왕국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영적, 신앙적 유혹입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란입니까? 궁핍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8).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영적승리의 삶
-“악마의 유혹, 하느님의 말씀, 구원자 예수님”-
지금 세계는 전쟁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총칼만 안들었지 흡사 좌우의 갈등이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누구나 소망하는바 평화인데 역설적으로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시작과 더불어 시작된 전쟁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보니 “교황님의 슬픔과 평화를 위한 지칠줄 모르는 호소”라는 제하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 종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기사가 길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월초 일간신문에서 스크랩한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1월7일 하루에만 러시아군 전사자가 1천명을 넘었다고 주장했고, 러시아군은 지난 한달간 우크라이나군 6500명이 전사했다며 맞섰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해 2월24일 개전이후 러시아군 전사자가 13만 319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그러니 개전이후 정확히 1년이 넘게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1년간 러시아군 전사자가 13만 3190이라니 한달 평균 1만명이 넘고 우크라이나군까지 합치면 한달 평균 2만명쯤 전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의 일같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뿐인 나의 아들이 전사했다면, 하나뿐인 내 남편인 가장이 전사했다면 그 가정의 불행과 비극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어처구니 없는 전쟁인지요! 전세계가 혼돈 상태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미친짓이요 악마의 소행이라 개탄하는 교황님입니다. 새삼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러니 이런 전쟁을 영적전쟁의 상태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예로부터 수도생활을 영적전쟁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내외적으로 영적전투 치열한 전장터같은 세상입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도 영적전쟁이요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어제 조용히 피정왔다가 떠나는 목사님의 다음 메시지에 화답하여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오늘 피정을 마치고 떠나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오후 4시 떠나는데 떠나기전 면담을 하고 싶습니다. 아침에 우연히 <어떻게 살아야합니까?>책을 읽으며 면담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연락을 드립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고, 저는 하루하루 산다고,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산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저의 지론을 피력했습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그래서 영적전쟁에 승리를 위한 영적훈련이 필수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하고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승리자 파스카 예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어떻게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저는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유혹의 현장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악마의 유혹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에덴동산에도 악마를 상징하는 뱀의 유혹이 있었고, 이집트 탈출시 이스라엘 백성도 유혹을 통과하지 못해 죄를 짓고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과 악마와의 영적전투 치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악마의 유혹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요 이 유혹없이는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와와 더불어 아담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짓는 장면이 너무 생생한 가르침이 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애초부터 유혹하는 악마와 대화하지 말고 침묵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요 선택입니다. 이점에서 하와도 아담도 실패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는 데 정말이냐?”
악마의 유혹에는 이렇게 교묘한 과장이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와 역시 과장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와 역시 부풀려 과장하여 악마의 유혹에 화답함으로 유혹에 말려듭니다. 마침내 유혹에 빠져 나무 열매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또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워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습니다. 부부가 유혹에 빠져 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는 늘 우리와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보다 과장하여 부풀려 말하며 부추길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유혹하는 뱀의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과장하거나 부풀려 부추기는 말을 듣거나 이런 마음이 들면 즉시 입을 닫고 대화를 중단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하와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면 미풍에 끝났을 유혹이, 유혹에 넘어감으로 미풍이 태풍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유혹하는 악마의 유혹이요,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악마의 유혹에 대한 최상의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악마와의 치열한 영적전쟁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광야에서의 악마의 유혹이 참으로 집요합니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는데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몹시 시장하신 상태중의 유혹입니다. 세차례 아슬아슬한 유혹인데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으로 세 차례에 걸친 공격을 일언지하에 격퇴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당신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서두의 말이 벌써 예수님의 허영을 부추기는 유혹입니다. 참 견디기 힘든 것이 배고픈 몸의 욕구 식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과는 달랐습니다. 단호히 하느님 말씀으로 물리칩니다. 하와처럼 악마와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래서 평생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평생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살아야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이렇게 말씀 공부와 훈련으로 평상시 영혼을 튼튼히 해야 즉각적으로 악마의 유혹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악마의 공격은 무엄하게도 하느님께 대한 시험입니다. 간교하게도 먼저번 유혹과 같이 예수님의 허영심을 부추김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말씀 훈련의 달인인 예수님께 허영심이 있을리 없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하며 악마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하나 예수님은 거두절미 대화를 끊어버리고 한말씀으로 악마를 제압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정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이 약하면 악마의 성경의 인용에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악마의 공격입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영광과 권력,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단도직입적 지칠줄 모르는 참으로 집요한 악마의 유혹입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모두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감미로운 것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위와 같은 유혹들에 빠져 패가망신하는지요! 예수님의 단호한 대응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참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믿음의 모범, 믿음의 용사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살 희망과 용기가 생깁니다. 이 모든 유혹이 40일간 단식후의 극한 상황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으로,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된 예수님의 삶인지, 그 사랑이, 믿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런 영적승리에 이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하니 천사들의 양식으로 심신의 허기를 채웠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은총의 미사시간 때마다 생명나무의 열매, 천사의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심신의 원기를 회복합니다.
여기 주목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 악마와의 영적전투중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배경 둘, 양편에 계신 수호자 성령과 천사들입니다. 바로 성령과 천사들이 늘 우리의 양편 수호자로 도움이 되고 계심을 생각한다면 용기백배, 사기충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분명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예수님 유혹에 실패했지만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영적전투, 악마의 유혹이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했을 때 베드로를 통한 사탄의 유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을 모독하던 자들을 통한 마지막 사탄의 유혹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셋째,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영적승리의 모범, 참으로 하느님의 용사, 새아담 예수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살 희망이, 살 용기가, 살맛이 납니다. 아담과 새 아담 예수님의 비교가 참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합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우리는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았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구원자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과 수호천사의 도움과 주님 말씀에 힘입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2/26(월) 사순제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2. 당대의 라삐들은 심판의 어조를 잘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경우가 오늘 복음 말고도 때때로 나옵니다(다니엘서 7장 참조).
라삐들과 성경의 몇몇 대목이 이런 문학 유형을 사용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기보다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정용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래서 평생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평생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살아야합니다.(이수철 신부)
[2/26(월) 사순제1주간 월요일, 제 65일 기도]
하느님!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27일(월) 6시...수산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