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2월 28일 화요일[(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2월 28일 화요일[(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당신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나이다.
본기도
주님의 가족인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절제로 자신을 이겨 내고
저희 마음이 언제나 주님을 바라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은 의인들을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분의 귀는 그 부르짖음 들으신다.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
○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에게 너그러이 베푸신 선물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오니
이 제물을 자비로이 받으시고 현세의 삶에서 저희를 돌보시어
저희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저를 의롭다 하시는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소서. 곤경에서 저를 구해 내셨으니,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제 기도를 들으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현세의 욕망을 억제하며
천상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하느님,
하느님의 강복으로 믿는 이들을 굳세게 하시고
슬픔에는 위로를
고통에는 인내를 주시며
위험할 때에는 보호하여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2월 28일 화요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사순 시기는 기도(祈禱)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이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하여, 특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를 바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바치는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자기만의 비법으로 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의 기도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두려움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원문의 순서를 따라가면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말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두 번째 말은 “우리(의)”입니다. 아버지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다음에 “우리(의)”라는 말을 주셨습니다(Pater noster).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자녀의 기도이며 형제들의 기도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모두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토록 용서를 강조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도 서로의 형제도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
이 빵은 나만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고 ‘일용할’ 빵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호화로움과 부유함을 요청하지도, 인생의 모든 부분을 걱정 없이 살만큼 채워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빵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위하여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유일 것입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말씀과 성체로 언제나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합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큰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나가서 일하였다. 둘째 아들에게도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어서 밭에 나가지 않았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겠느냐?” 제자들은 당연히 밭에 나가서 일을 한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슷한 이야기를 유대인들에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선택 받은 민족이면서도 하느님의 아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겠다고 합니다. 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누가 형제요! 어머니이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이며 어머니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셈’을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였고 온갖 시련과 고난이 다가와도 끝까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지향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먼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게 구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선순위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머지 것들은 모두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2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예전에 들었던 노래 “모두 다 사랑하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에 구름 떠가네. 보라색 그 향기도/ 이 몸이 하늘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곁에 사랑도 가네. 빨간 입맞춤도/ 시간이 멈춰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 맞은 태양도 목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있네/ 아무런 미련 없이/ 그대 행복 위해 돌아설까나/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227.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도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도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 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그런데, 이 심판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베푼 이든 베풀지 않는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을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여 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서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것임을 말해줍니다.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어둠에 갇혀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최후 심판의 잣대는 사랑-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시편19,15)
제가 요즘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영적훈련인 수행입니다. 좀더 분명히 도식화 하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의 수행생활이 평생 이 도식대로 이뤄집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기도와 노동과 공부가 균형잡히고 조화된 일과표에 따라 평생 훈련병처럼 살아가면서 습관이, 제2천성이 되고 비로소 순수하고 자유로운 참사람이,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이런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구체적 수행의 훈련이 없이 참사람이 되는 길은 없다고 봅니다. 이런 수행의 훈련에 항구히 충실할 때,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성인이요, 그렇지 않고 소홀하여 욕망대로 살 때는 괴물도 되고 급기야 폐인도 됩니다. 참으로 평생 가장 힘든 것이 사람이, 참사람이 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교황님의 수요일 일반 알현시 강론은 노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부내용을 인용합니다.
“인류역사상 일찍이 이렇게 노인이 많은 때는 없었다. 버려질 위험이 너무 크다. 지금처럼 버려질 위험이 많은 때는 결코 없었다. 자주 노인들은 짐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미 가장 약하고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무리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너무 많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보지 못한다.
젊은이는 노인들과, 노인들은 젊은이와 대화해야 한다. 이런 다리가 인류에게는 지혜의 전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사회에서 노인들은 나무의 뿌리들과 같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들은 온역사를 지니고 있고 젊은이들은 꽃과 같고 열매와 같다. 만일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물이나 영양분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번창할 수 없다. 사회가 지닌 아름다운 모든 것은 노인들의 뿌리와 관련된다. 노인들이 소모품처럼 쓸모없다 버려져선 안된다. 노인들은 사회의 축복이다.”
새삼 잘 늙어 공동체의 튼튼하고 좋은 뿌리가 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뿌리가 병들고 약하면 꽃도 열매도 부실함은 불문가지입니다. 이래서 불가에서는 사찰의 두 중요한 자산을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라 합니다. 새삼 평생 영원한 현역의 훈련병으로, 좋은 습관의 노인들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어제 저는 조선시대는 물론 한반도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대왕의 평전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계 인류역사상 아마 이런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은 처음일 것입니다. 말그대로 그 옛날 세계 최고의 문명국 조선이었습니다. 그 일부 내용을 나눕니다.
“세종은 노인복지 문제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쏟앋다. 세종 14년부터 가을철에 80세 이상 된 노인들을 궁궐로 초대하여 양로연 잔치를 실시했다. 남자의 경우는 임금이 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여자의 경우는 왕비가 궁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신분차별은 전혀 없어서 노비라도 나이가 80세 이상이면 모두 초대되었다. 양로연에 노비를 초대한 것과 또 여자 양로연을 따로 베풀어 준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뜰에는 악공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노인 앞에는 탁자가 있고 술과 음식이 놓인다. 집사관들이 노인들에게 술을 따른다. 그때마다 음악이 연주된다. 다음에는 식사를 올리고, 그 다음에 또 술을 올린다. 술은 다섯 순배로 그친다. 식사가 끝나면 임금에게 절을 올린다.
세종 14년 가을에 처음 시작된 양로연은 크게 흉년이 든 해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가을에 거행되었고 세종 15년에는 노인들에게 임금에게 절하지 말라고 명했다. 잔치가 끝나자 여러 노인들이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붙들고 인사하며 차례대로 나갔다. 88세 최고령인 이귀령 노인은 자리를 피하여 37세 임금에게 말했다. “신이 나이 88세 이온데 역대의 임금으로 오늘처럼 늙은이를 공경한 분이 없었습니다. 원하옵기는 신의 나이에 열두해를 더하여 헌수하나이다.”
같은해 여성 노인들을 위한 양노연도 왕비가 사정전에서 베풀었는데 362인이 참석했고 남자 노인보다 배 이상이 되었다. 역시 사대부 부인에서부터 노비 여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노인이 망라되었다. 이해에 열린 지방의 양로연은 고을 마다 남자는 수령이 주관하여, 또 여자는 수령 부인이 주관하여 거행했다. 세종시대는 역사상 양로연이 가장 많이 열린 시대였고, 시대가 내려가면서 양로연은 점차로 쇠톼해 갔다.”
또 세종대왕의 애민사상에 감동하게 되는바 노비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참으로 평등한, 하늘이 낸 천민天民으로, 하늘의 시민으로 생각하면서 이들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다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의 성인 반열에 올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차고 넘치는 성인이 세종대왕이었습니다.
그러니 훌륭한 노년을 위해 평상시 사랑의 훈련및 습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레위기 19장의 일부를 다룹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주제로 전개되는 내용이 이웃간의 구체적 사랑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시작되어,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속여서는 안된다”에 계속이어지는 구체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금령이 헤아려보니 무려 16회 나옵니다. 그리고 해야 한다는 긍정적 명령은 넷입니다.
1.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2.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3.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4.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런 무수한 금령과 긍정적 명령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그리고 왜 통제되어야 하는지, 왜 자발적 구체적 사랑의 실천 훈련에 힘써야 하는지 깨닫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로 시작하여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끝나는, 바로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금령마다 못박듯이 후렴처럼 무수히 반복되는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바로 사랑 실천은 주님의 엄중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새삼 이런 사랑의 실천 역시 자발적 훈련임을, 사랑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이것도 부족하여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무한한 이타적 아가페 형제적 사랑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아예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이런 구체적 사랑 실천을 최후심판의 잣대로 삼는다 하십니다. 십계명도 기도도 전례의 충실도 아닙니다.
종파에 무관하게 모든 곤궁중에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형제라 칭하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오늘 복음은 장례미사때 주로 사용되는 복음으로 아마도 참석한 분들이 최후심판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예언적 진술입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전반부 양들로 지칭되는 오른쪽 사람들은 준비된 나라를 차지한 복을 받은 의인들이요, 후반부 염소들로 지칭되는 왼쪽 저주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것으로 갑니다. 전반부만 나눕니다.
너희는
1.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고,
3.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4.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과연 몇이나 해당되는지요? 우리 사랑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이처럼 최후심판의 잣대는 십계명의 준수도, 거룩한 전례의 충실도 아니라 곤궁중에 있는 불쌍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 직접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임금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들을 형제라 하며 자신과 동일시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새삼 살아 있는, 곤궁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이자 나의 형제요, 살아 있는 성체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일 것입니다.
“주님, 우리 마음을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시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올바른 일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2/28(화) 사순제1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말씀과 성체로 언제나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합시다.(정용진 신부)
2. 주님의 기도에서 우선순위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머지 것들은 모두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불가에서는 사찰의 두 중요한 자산을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라 합니다. 새삼 평생 영원한 현역의 훈련병으로, 좋은 습관의 노인들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이수철 신부)
[2/28(화) 사순제1주간 화요일, 제 66일 기도]
하느님!
어느 누구든지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인도하심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2월28일(화)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