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3월 12일 주일[(자) 사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3. 12. 04:48

[매묵]2023년 3월 12일 주일[(자) 사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첫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입당송

시편 25(24),15-16
제 발을 그물에서 빼내 주시리니, 제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또는>

에제 36,23-2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어, 온 세상에서 너희를 모으리라.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모든 부정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리라.

본기도

하느님,
온갖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우리가 마실 물을 내놓으시오(탈출 17,2).>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17,3-7
그 무렵 백성은 3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며 말하였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
4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
5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로들 가운데 몇 사람을 데리고 백성보다 앞서 나아가거라.
나일 강을 친 너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거라.
6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7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5(94),1-2.6-7ㄱㄴㄷ.7ㄹ-9(◎ 7ㄹ과 8ㄴ)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

제2독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1-2.5-8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4,42.15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 당신은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니 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주소서.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5-42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5-15.19ㄴ-26.39ㄱ.40-42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9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지상의 나그네인 교회를 보살펴 주시어, 교회가 복음 말씀으로 세상의 가치를 바라보며, 빛과 어둠을 올바로 구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2.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지혜의 주님, 세계의 지도자들을 이끌어 주시어, 국가와 국민 사이의 분쟁을 슬기롭게 조정하며, 인류의 진정한 일치와 발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게 하소서.

3.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오늘날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가난으로 힘든 이들을 살펴 주시어, 경제적 어려움으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구해 주시고, 저희는 사순 시기의 정신을 올바로 실천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저희 본당의 모든 이에게 강복하시어,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화해의 제사를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도 형제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사순 감사송 7 : 사마리아 여인(사순 제3주일)>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시면서
이미 그 여인에게 친히 신앙의 선물을 주셨으며
또한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시려고
그 여인에게 신앙의 갈증을 느끼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주님께 감사드리며
천사들과 함께 주님의 권능을 찬양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4,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샘이 솟아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삶의 참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할 힘을 기르며 희망을 발견하고 간직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헛되지 않은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 우리 마음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 신앙인의 행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이 세상에서 천상 양식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이 성사의 신비를 날마다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을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이끄시고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자비로이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계명을 완수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LA 신문 홍보를 하면서 교회신문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서부지역에 있던 가톨릭신문이 철수하였습니다. 그동안 가톨릭신문을 구독하던 독자들은 3년 동안 교회신문을 구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서부지역에 신문홍보를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었고, 구독신청을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교우들에게도 적극 권면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신문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LA에 머무는 동안 연도와 연미사를 봉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면서 깊은 상심에 빠져있는 교우가 있었습니다. 제게 연도와 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기꺼이 고인을 위한 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서 동부에서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고인을 기억하고, 유족을 위로하려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2002 한일월드컵 때입니다. 한국의 감독은 히딩크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에서 5:0으로 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한국 선수들이 체력은 강하지만 기술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한 체력을 요구하였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을 넘어 8강까지 올라갔을 때입니다. 모두가 만족하고 있을 때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I am still hungry!”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목마름을 채워주듯이 한국 선수들은 4강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독일에게 아깝게 1:0으로 패배해서 결승까지는 가지 못하였지만,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끌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2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의 순위가 올라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우리들의 신앙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사제들의 식어버린 열정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강론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대신에 개인적인 취미활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제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는 좌절감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책임을 교회와 제도의 탓으로 회피하는 무능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미 지나간 팬데믹을 핑계 삼아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저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보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신문구독자를 늘리는 것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교회의 소식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안정되게 운영하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팬데믹 때문에 신문홍보를 제대로 못하였지만 이제는 열심히 신문홍보를 다녀야 합니다. 신문사 운영을 위해서 광고를 유치하고, 좋은 필진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동북부 엠이의 일을 맡겨 주셨고,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셨으니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며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작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열매와 곡식을 보기 때문에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고, 이 세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를 위해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을 지나가십니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걷느라 지치셨습니다.
그 우물가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마침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유다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깊은 감정이 있는 그 여인은 예수님을 탐탁하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그 여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당연히 그 여인은 주님의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을 청하시는 분이 이제는 생수를 주시겠다는 것, 다시 말해 주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한 단계 높여서 그 여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13-14절)

그녀는 여전히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나 솔직한 말을 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15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느닷없이 그녀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면서 그 여자의 과거를 맞추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18절)

그 여자는 주님께서 예언자라고 생각하면서 주님께 유다와 이스라엘 서로 갈라져서 예배를 하던 뼈아픈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대답하지요.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21절)

그러자 그 여인은 더 단계를 높여 주님께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25절)
오늘 복음의 핵심을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복음은 여인이 주님의 신원을 다 이해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알아맞힌 예수님에 대해서 동네에 돌아가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29절)라고 떠듭니다.
유대인들에게 감정을 갖고 있는 사마리아 동네의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자기 동네에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 그곳에 머무십니다. 이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다사람들에게 배타적이던 마을 주민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목마르고 지치신 분으로 여인에게 다가 가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수준에서 하나하나 짚어 당신께서 메시아이심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던 상처받은 한 여인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 왔고 그들도 또한 구세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만나고 서로 연결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곳 주민들도 주님을 만나면서 구세주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끌려도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바로 구원으로 초대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중요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굳게 갖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은 인간적인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실망을 하지요. 그러나 그 희망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이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편에서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이제 의심을 버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반역하며 하느님께 대들었던 뼈아픈 역사를 짚어보며 다시는 하느님께 대들지 말라는 내용의 노래를 합니다.

오늘 미사 전례에서 화답송으로 시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의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 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시편 95,8-9)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3)라며 하느님을 못 믿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초대받은 사실을 어떻게 보면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노력해서 신앙을 얻었다고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의 여인은 사실 주님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유다 사람들과 사마리아 인의 깊은 역사적 상처가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다섯 남편을 두어야 했던 그녀의 또 다른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주님께서 단순히 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메시아이시며 영원한 샘물을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은총으로 하느님 말씀에 그 나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굳은 믿음으로 간직해야 합니다. ‘므리바에서 처럼, 마사의 그날 광야에서 처럼’ 하느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세상의 상황이 좋던 나쁘던 변함없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제는 우리를 하나하나 일깨우시며 우리가 당신의 길에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11.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오늘 <복음>에서는 말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러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성공해서가 아니라 실패하고서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하는 데에 있다기보다,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말로,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요, 그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롭게 탄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사실,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어히 몰랐겠습니까! 훤히 알면서도,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아니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를 품고 믿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그분의 희망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일 것입니다. 저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그분께서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믿고 계신 까닭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에 때한 깨달음에서 온다기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란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나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새로운 부르심과 소명에 대한 응답’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와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오늘 새벽 성무일도 시편136장 26절까지 매절마다 반복된 후렴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온 피조물에게 미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제가 자주 즐겨부르는, 사제서품 미사시 화답송 시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중의 복음이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보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복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정통하신 유일무이한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제 집무실 벽에는 렘브란트의 이 복음을 요약한 자비로운 아버지의 명화가 수십년 걸려 있습니다. 면담고백 성사시 제 배경의 그림이요 고백성사를 보는 형제자매들은 저절로, 돌아온 자녀를 반가이 맞이하고 있는 자비하신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돌아갈 아버지가,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참으로 우리를 환히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이요 끊임없이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떠오르는 ‘산처럼!’ 이란 자작시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한없이 기다렸다 맞이하는 아버지의 품같은 불암산을 보며 2000년 11월에 쓴 고백시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서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너그럽고 자비하신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불암산입니다. 또 하나의 불암산을 소재로 한 “온 세상 제대로 삼아”란 자작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가슴 활짝 열고 있는 불암산을 향해 동녘에서 떠오르는 해가 흡사 성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찬란한 태양 성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 성체 모시고

살아 있는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다.”-2007.11

 

오늘 복음의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영원히 배워야할 롤모델입니다. 미카 예언자가 제1독서에서 고백하는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는 회개한 자녀들의 과거는 결코 묻지 않고 영원히 불문에 붙이십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런 자비하신 주님을 닮을 것을, 결코 잊지 말고 찬미와 감사와 사랑을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장 화답송이 온통 자비하신 아버지께 드리는 찬미로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의 귀환에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너무나 실감나는 묘사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하느님의 기쁨은 이런 것입니다. 이어지는 즐거운 잔치가 흡사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처럼 되어 버린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환대를 받으며 완전히 존엄한 인간 품위를 회복한 모습입니다. 참으로 아버지께 돌아와 자기를 찾을 때 거지같은 초라한 존재에서 왕자같은 품위의 존재가 됩니다.

 

아, 이게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너무나 아버지를 떠나 무지와 허무속에 세상맛에 중독되어 살아 가기에 존엄한 품위의 진면목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격렬하게 분노하는 큰 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작은 아들은 물론 이 큰 아들의 모습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지칭하는 큰 아들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 또는 모범적 신자들의 내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의 분노와 항의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또한 우리 인간의 한계요 이를 넘어서야 진정한 회개이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

 

속 시원한 내면의 토로입니다. 아버지곁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다니 아버지를 참으로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아버지 곁에 가까이 살면서 자비하신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깨닫습니다. 작은 아들에 대한 연민이 추호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우라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 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죄스런 부정적 내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해 아버지가 함께 화를 냈다면 수습 불가능한 태풍으로 변했을 것이나, 아버지의 한량없는 자비가 큰 아들의 태풍같은 화를 미풍으로 가라 앉혔습니다. 새삼 자비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는 자비입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조용히 간절히 호소하시는 진정성 가득한 아버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큰 아들에 대한 사랑 역시 한결같았음을 고백하는 아버지입니다. 늘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살면서 아버지의 진면목을 몰랐던 바로 우리 수도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당신의 기쁨에 동참해 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참으로 주님곁에서 모범적으로 산다는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일화입니다. 큰 아들의 반응이 복음에는 생략되었지만 제 추측으로는 회개하여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참여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의 거울에 비춰본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무자비한 모범생 큰 아들을, 또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 온 회개한 작은 아들을 닮았습니까?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았는가 하면 때로는 옹졸하고 편협한 큰 아들을 닮았고, 또 때로는 작은 아들처럼 탈선하여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아, 여기 자비하신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자비하신 아버지에게는 큰 아들, 작은 아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예수 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평생과제가 평생회개의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 우리에게 평생과제로 주어진 것입니다.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아버지의 자녀로 사는 것, 그리하여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요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환대 잔치 은총이 날로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 고백하고 싶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예수 아드님을 닮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찬미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3/12(일) 사순제3주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작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열매와 곡식을 보기 때문에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고, 이 세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를 위해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므리바에서 처럼, 마사의 그날 광야에서 처럼’ 하느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세상의 상황이 좋던 나쁘던 변함없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제는 우리를 하나하나 일깨우시며 우리가 당신의 길에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정인준 신부)

 

3. 우리가 지금 그렇게 그분의 희망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일 것입니다. 저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그분께서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믿고 계신 까닭입니다.(이영근 신부)

 

4.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았는가 하면 때로는 옹졸하고 편협한 큰 아들을 닮았고, 또 때로는 작은 아들처럼 탈선하여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아, 여기 자비하신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 우리에게 평생과제로 주어진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3/12(일) 사순제3주일, 제 78일 기도]

 

하느님!

참고 견디며 인내하게 하소서.

예수님, 하느님을 닮게 하소서.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시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3월12일(일) 4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