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3월 24일 금요일[(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3월 24일 금요일[(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나약한 저희를 이 제사로 도와주시니
저희가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여
그 은혜를 새로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
○ 그의 뼈를 고스란히 지켜 주시니,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하여졌으니
이 제사를 세우신 주님께 더욱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었네. 그분의 풍성한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았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을 굽어보시어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이들을
천상 은총으로 자애로이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3월 24일 금요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여전히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지만 그래도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의인을 대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에서 봅니다.
그들은 다짐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이 말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갈등을 연상시킵니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서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의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2)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마치 악인들이 놓은 덫과도 같고 그들의 생각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에 대한 악인의 태도는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부 유다인들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어쩌면 지금도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으로 ‘사순특강과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며칠 여유가 있었는데 오타와에 있는 공동체에서 ‘미사와 사순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는 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꽃동네 피정의 집에서도 ‘미사와 고백성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차로 2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보통은 남는 시간이면 미술관도 가고, 시내 구경을 갔었는데 이번에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맞이해서 주님께서 제게 ‘은총’을 주셨습니다. 오타와에서는 허리까지 올라온 눈을 보았습니다. 늦은 시간 사순특강을 듣기 위해서 오신 30여분의 교우들을 보았습니다.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목하는 성당은 130년 역사를 지녔다고 합니다. 지역에서 ‘음악회’를 신청할 정도로 성당은 넓고, 크고, 아름다웠습니다. 미사 전에 반주자는 아름다운 성가를 연주하였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러 갔지만 오히려 저는 교우들의 열성과 아름다운 성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꽃동네 피정의 집에서는 아이티에서 사목하다 피정 때문에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대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끌러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헌신과 열정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왕복 10시간 차량 봉사를 하는 형제님의 노고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며,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하고, 복음을 읽고, 꽃동네 찬양 팀의 성가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여정이었는데 차 안이 마치 피정의 집 같았습니다. 차창 밖에는 하얀 눈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300킬로미터 이상 직진으로 펼쳐진 도로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 같았습니다. 이민 생활의 애환을 듣기도 하였고, 성당에 있었던 사제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교우들은 사제의 영성과 인품 때문에 사제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허물이 있어도, 다소 고집이 있어도, 행정의 미숙함이 있어도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말처럼 신심이 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교우들은 그럼에도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수록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신발 끈을 풀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깊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사제들의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하루 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323.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절)과 성부 하느님(30-32절)과 당신 자신의 활동(36절)과 성경(38-47절)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두고, <예레미아서>(5,7)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야훼 하느님 외에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5,42)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회개의 은총
-겸손, 자비, 지혜-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자 정화의 시기로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겸손과 자비와 지혜입니다.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참된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의 표징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도 결국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평생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수행이 그렇듯이 회개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선택-훈련-습관화를 자연스럽게 이뤄주는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깨어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의 시편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그리하여 수도원의 일과표 자체를 일컬어 저는 회개의 시스템이라 정의합니다. 바로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 일과표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 시편집일 것입니다. 전례에서 시편 인용은 필수입니다. 매일 미사 전례문을 봐도 시편 성구로 가득합니다. 시편을 맛들이며 좋아하다 보니 세상 시들에 대한 맛을 잃었습니다. 바로 생명과 빛, 희망을 주는 시편 기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수도공동체는 사순시기 각별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순특강으로 김영 아오스팅 인하대 명예교수이자 더탐사 시민학당 교장의 “동양고전에서 배우는 공생공락의 지혜”라는 노자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께 선물로 받은 “생태위기 시대에 노자 읽기” 책안에 싸인중 한마디 말씀이 참 지혜의 결정체처럼 마음에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한 듯 싶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란 뜻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순리대로 낮은 곳으로 항하며 겸손히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뜻합니다. 겸손이 바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노자도덕경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노자 강의를 들으면서 노자를 읽으면서 새삼 우리 시편성서가 얼마나 좋은지 깨닫습니다. 똑같은 시이면서 노자도덕경보다 시편집이 마음에 와닿는 것은 기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찬미와 감사, 생명과 빛, 희망이 넘실 거리는 시편기도와는 아예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예전에 좋아했지만 요즘 노자도덕경에 대한 관심은 시들한 편입니다. 결국 이런저런 시들을 읽다보면 시편기도로 돌아가게 되고 공부를 하다보면 결국은 성경 말씀공부로 돌아가게 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을 통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늘 시작처럼 생각됩니다. 언제나 여전히 남아있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노자도덕경은 물론 시편집을 포함한 성서말씀이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에로 이끌며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평생공부가 자기를 아는 공부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를 통한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복음서의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여기서도 역사는 반복됨을 봅니다. 정말 무지에서 벗어난 깨달은 각자(覺者)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은 모세와 예수님뿐임을 봅니다. 모세시대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 예수당대 유다인들 참 무지한 사람들의 전형이요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탈출기에서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격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면의 답답함과 분노를 모세에게 쏟아놓는 하느님이십니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달라는 하느님을 진정 시키는 모세의 진정성 가득한 애원의 중재기도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무지한 백성에 대한 모세의 한없는 자비와 연민을 배웁니다. 무지는 죄라기 보다는 자기를 모르는 병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모세의 애원의 기도에 감동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시니 다시 무지한 당신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생애가 연장되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기도, 사랑과 공부이지 죽으면 회개와 기도도, 사랑과 공부도 끝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회개와 말씀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늘 아는 공부에 전념함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를 사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탈출기 말씀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모세의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무한한 연민의 사랑이요 그 애원의 기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도 탈출기와 똑같은 현상의 반복입니다. 얼마나 완고한 유다인들인지요! 보십시오. 요한이, 또 예수님이 하고 있는 일들이, 아버지께서, 성경이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믿지 못하는 완고함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과 좌절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두 경우만 인용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나를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완고하여 닫힌, 그 많은 당신에 관한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무지의 유다인들이자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고소하는 이가 바로 이들이 희망을 걸어 온 모세임을 확언하십니다. 이들이 모세를 믿었더라면 예수님 당신도 믿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탈출기에 무지한 백성을 살리기 위해 애원했던 모세를 생각한다면 모세를 능가하는 예수님 당신을 왜 믿지 못하느냐에 대한 질책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은 물론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 거울에 비춰볼 때 그대로 드러나는 세상 모두의 실상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파스카 예수님을 증언하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요,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갈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를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미사은총보다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은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미사뿐입니다. 오늘 강론의 요약입니다. 아멘.

[3/24(금)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어쩌면 지금도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허규 신부)
2.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3.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회개와 말씀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에 전념함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를 사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3/24(금)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 90일 기도]
하느님!
끊임없는 회개와 말씀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하소서.
늘상 동행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 2023년 3월24일(금) 8시30분...수산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