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3월 27일 월요일[(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3. 27. 06:05

[매묵]2023년 3월 27일 월요일[(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56(55),2 참조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본기도

하느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으로 온갖 복을 내려 주시니
저희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3,1-9.15-17.19-30.33-62
그 무렵 1 바빌론에 요야킴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2 그는 수산나라고 하는 힐키야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3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4 한편 요야킴은 아주 부유한 사람으로서 넓은 정원이 그의 집에 맞붙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늘 그를 찾아오곤 하였다.
5 그런데 그해에 어떤 두 원로가 백성 가운데에서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바로 그들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빌론에서,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지는 재판관인 원로들에게서 죄악이 나왔다.”
6 그들이 줄곧 요야킴의 집에 있었으므로,
소송거리가 있는 이들은 모두 그리로 그들을 찾아갔다.
7 한낮에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수산나는 남편의 정원에 들어가 거닐곤 하였다.
8 그렇게 그곳에 들어가 거니는 수산나를 매일 눈여겨본 그 두 원로는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게 되었다.
9 그들은 양심을 억누르고 하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린 채,
의로운 판결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15 그들이 알맞은 날을 엿보고 있을 때,
수산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녀 둘만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이 무더웠으므로 그곳에서 목욕을 하려고 하였다.
16 거기에는 숨어서 수산나를 엿보는 그 두 원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17 수산나는 하녀들에게,
“내가 목욕을 하게 올리브 기름과 물분을 가져오고
정원 문들을 닫아걸어라.” 하고 말하였다.
19 하녀들이 나가자마자 두 원로는 일어나서 수산나에게 달려가 20 말하였다.
“자, 정원 문들은 잠겼고 우리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소.
우리는 당신을 간절히 원하오. 그러니 우리 뜻을 받아들여 우리와 함께 잡시다.
21 그러지 않으면, 어떤 젊은이가 당신과 함께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이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22 수산나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23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
24 그러고 나서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두 원로도 수산나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더니,
25 그 가운데 하나가 달려가서 정원 문들을 열어젖혔다.
26 집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에서 나는 고함 소리를 듣고,
옆문으로 뛰어들어 가 수산나에게 일어난 일을 보았다.
27 원로들이 저희 쪽의 이야기를 하자 하인들은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수산나를 두고 누가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28 다음 날, 수산나의 남편 요야킴의 집으로 백성이 모여들 때,
그 두 원로는 수산나를 죽이겠다는 악한 생각을 가득 품고서 그리로 갔다.
29 그들이 백성 앞에서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요야킴의 아내, 힐키야의 딸 수산나를 데려오게 하시오.”
그러자 백성이 사람을 보냈다.
30 수산나는 부모와 자녀들과 모든 친척과 함께 나왔다.
33 그러자 수산나 곁에 있던 이들과 그를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34 그 두 원로는 일어나 백성 한가운데에서 수산나의 머리에 자기들의 손을 얹었다.
35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6 그 두 원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단둘이서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이 여자가 여종 둘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가더니,
정원 문들을 닫아걸고서는 여종들을 내보냈소.
37 그때에 숨어 있던 젊은이 하나가 이 여자에게 가더니 함께 누웠소.
38 정원 구석에 있던 우리는 그 죄악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달려갔소.
39 그리고 둘이서 정을 통하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자가 우리보다 힘이 세어 붙잡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그자는 문을 열고 달아나 버렸소.
40 그 대신 이 여자를 붙들고 그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41 이 여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소. 이것이 우리의 증언이오.”
그들이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들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3,41ㄹ-62
그 무렵 회중은 41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ㄱ.3ㄴㄷ-4.5.6(◎ 4ㄱㄴㄷ)
◎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 환호송

에제 33,11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참회와 재계를 통하여 깨끗해진 마음으로
이 거룩한 제사를 봉헌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한 8,10-11 참조
여인아,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으리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이 성체로 힘을 얻고 죄를 용서받았으니
언제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께 간청하는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어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거룩히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오늘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산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음욕에 가득한 원로 둘이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지만 수산나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원로 둘은 수산나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원로들의 권위와 원로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산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수산나는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고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 다니엘의 영을 깨워서 수산나가 무죄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교활하고, 음욕에 가득한 원로 둘은 하느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는 이들이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성서는 솔로몬을 통해서도 억울한 어머니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거짓 어머니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아이를 둘로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생모는 가질 수 없을지라도 아이를 살리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이의 생모에게 아이를 찾아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역사에는 기시감(旣視感)’이 있습니다.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하면서 대학생의 죽음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은 공안들의 물고문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사회에서 경제의 성장은 부익부와 빈익빈을 더욱 키우기 마련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사회에서 경제의 성장은 절대 부패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부정과 부패는 국민을 더 깊은 가난의 수렁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시국미사가 있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억울한 학생의 죽음은 거세게 타오르는 빛이 되었습니다. 권력에 취한 자들이 진실을 가리려고 하였지만 권력에 맞선 이들에 의해서 거짓은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통령을 우리의 손으로 뽑는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진실을 왜곡했던 세력들이, 총과 칼로 권력을 잡았던 이들이 진실의 법정에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에는 기시감이 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배에 대해서 대동아 공영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과거는 더 이상 묻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도, 태평양 전략을 이야기하면서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여서 군사력을 더욱 키우려고 합니다. 과거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또 다시 군사력으로 아시아의 패권 국가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실효적으로 우리의 땅인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욕망의 원로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무죄한 이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세력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자신들의 잘못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사자와 역사 앞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도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때 비로소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나는 용서 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돌아온 아들처럼 회개가 있을 때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2. ♣ "죄 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니엘 예언서는 저자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을 때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은 1-12장으로 마감 되어 있고 희랍어 번역본(LXX)에는 13-14장이 추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12장까지를 성경으로 보는데 비해 가톨릭에서는 언어에 관계없이 13-14장을 똑 같이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13장에서 두 원로 노인의 모함에 빠져 죽을 운명의 수산나와 다니엘이 올바르게 재판을 해서 수산나를 구하고 모함을 한 두 노인을 처형한 이야기입니다.

14장에서 우상의 대상인 벨과 그 사제들의 거짓을 밝혀 낸 다니엘과 또 거대한 뱀을 죽여서 군중의 분노를 사서 엿새를 굶긴 사자들 굴속에 갇히게 된 다니엘이 살아남은 이야기입니다.

13장의 수산나에 대한 이야기는 독립된 이야기로 상세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요아킴의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 수산나에 대해 음욕을 품은 두 원로의 모함으로 그녀는 사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다니엘은 정당한 재판을 주장하여 수산나의 무죄가 밝혀지고 두 원로의 죄가 군중 앞에서 드러납니다.

다니엘서 저자는 수산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다니 13,62)

다니엘 서에는 무죄한 수산나를 구한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라면 요한은 간음죄로 고발된 한 여인을 주님께서 구해주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그 여인과 연결시켜서 군중 앞에서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이의 질문으로 주님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요한 8,4-5)

주님의 평소의 모습대로 율법보다는 그 여인을 용서해야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들은 주님을 고발하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들은 빨리 대답하라고 성화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라고 말씀하시고는 계속 땅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다고 설명합니다.

마침내 모두가 떠나고 예수님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절)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아무런 생각없이 남을 단죄할 때가 많습니다.

개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 인들 간의 갈등이 좋은 예입니다.

이스라엘들이 바빌론 시대에서 페르시아 시대에 와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곳에서 지내던 사마리아 인들이 와서 함께 성전을 짓고 싶다고 하며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성전을 짓게 해 주시오. 아시리아 임금 에사르 하똔이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올라온 날부터, 우리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제사를 드려 왔소.”(에즈 4,2)라는 말을 꺼냅니다.

그러나 즈루빠벨과 예수아와 나머지 이스라엘 각 가문이 우두머리들이 그들이 동참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것은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했을 때 그들의 나라에까지 끌려가서 그들의 종교까지 탄압을 받았던 것입니다.

남부 유다 사람들은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정통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경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부 유다가 바빌론으로 끌려 갔다 왔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바빌론에 남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던 것입니다.

그들도 점령당한 서러움을 잘 알고 있으면서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사람이 저 여자를 치라.’고 한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양심에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자처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까지도 예수님이 말씀에 자신들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자처하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고 때로는 험담까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없이 자신의 죄스러움을 깨닫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봄도 사순이 부활로 가는 길이듯,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고, 또 다시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봄의 길도 역시 생명의 길입니다. 


<봄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롤 새겨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바로 ‘봄길’입니다. 

생명을 열어주고, 부활을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아나톨 프랑스)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요,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곧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11,23)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1코린 8,2)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요한 11,27) 

마르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임에 대해서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 11,40)

이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요한 11,43)


<오늘의 말·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공동생활(共同生活)의 축복과 아름다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오늘 사순 제5주일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45절까지 긴 복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라자로가 죽다-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눈물을 흘리시다- 라자로를 살리시다”순서로 전개되는 내용도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순간 영감처럼 떠오른 강론제목,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 감사했습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베타니아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말그대로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지극히 평범한 내용에 공감하며 은혜받았습니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여럿이 서로 도우며 사는 생활”

 

혼자서는 못삽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이요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이 지옥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분들께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제 집무실이 흡사 세상 공동체의 중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도 예고없이 10여명쯤 방문한 자매들에게 판공성사를 드리며 교회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체험했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의 다음 두절도 공동생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성규 머리45)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성규72,11-12)

 

성규나 성경은 개인 수양 서적이 아니라 더불어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사랑과 지혜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더불어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년전에 써놓은 말씀이 여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제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이와 더불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6째 연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설파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공동체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수도가정공동체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로 늘어나는 1인가구와 노령화 현실에 교회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넓게 깊이보면 믿는 이들은 혼자 살아도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기에 물심양면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불가의 절친 관계였던 두 고승, 성철과 청담의 일화도 생생합니다. 나이는 10세 정도 많은 청담이었지만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눴고 힘이 장사인 두 고승은 오랜만에 만나면 이층 다다미 방에서 반가움에 씩씩 거리며 한바탕 씨름을 하며 우정을 확인하고 나눴다는 웃음짓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수십년이 지닌 지금도 선명합니다.

 

수도원 다섯의 작은개들의 공동생활도 흥미롭습니다. 아예 이웃집 불암사의 선재라는 개는 요즘 수사님들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하다 시피합니다. 어제는 새벽 4시 산책길에 제 뒤를 종종 따라왔고, 후에 날이 밝자 수도원 개집의 문을 열어놓으니 반가워 격렬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더불어의 놀이를 즐기는 동네 아이들과도 흡사했습니다. 커다란 선재가 작은 개와 격렬히 싸우는 듯 해 자세히 보니 반가움과 애정의 표현이었고 몸에 전혀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론 서론이 길었지만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평생 도반이자 베타니아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를 사랑했고, 이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자매들간의 우정이 함께 감을 봅니다. 

 

삼남매의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부요와 축복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요! 라자로의 소생 기적을 통해, 또 마르타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옥같은 진리를 배우고 체험합니다. 혼자라면 어찌 이런 구원의 진리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오늘 복음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아픔에 도움을 청할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에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저도 자주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 형제자매들을 위해 생미사와 연미사를 통해 간청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대부분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반응 말씀은 어제 저녁기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에 이어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시 흥겹게 불렀습니다. 오늘 하루 흥겹게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려 합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가서 그를 깨우자.”

 

얼마나 정겨운 주님의 반응인지요! 라자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친구가 된다니 말씀 자체가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죽음도 우리 전능하신 친구 예수님의 눈에는 잠들어 있음이요 이를 깨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과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참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배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구원의 진리요 마르타의 모범적 신앙 고백인지요! 참으로 귀한 진리와 고백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마리아도 울고 함께 한 유다인들도 울었다는 장면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11,35)는 대목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참으로 인간적인 주님의 면모가 연상되어 큰 위로가 됩니다. 라자로를 살리는 절정 부분 또한 감동의 극치입니다.

 

“돌을 치워라.”

우선 우리가 살아나는 데 주님께 협조해 할 일은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의 돌을 치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즉시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짧은 감사기도후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흡사 죽음과 같은 깊은 영적 잠에 떨어진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절망의 무덤안에 갇혀있거든 즉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무덤문을 박차고 탈출하여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라자로를 살리는 복음은 예수님의 일곱 표징중 마지막 절정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부활을 예고하는 놀랍고 고마운 표징입니다. 부활을 앞두고 부활의 기쁨을 미리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주님은 당신 백성인 우리를 살려 내시고 당신 영을 우리 안에 불어 살려주시니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이 우리안에 사시기에 우리는 육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니 말그대로 영적 삶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죽음의 잠에서, 육적인 삶에서, 깨어나 성령 충만한 영원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6-7). 아멘.

 


[3/27(월)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욕망의 원로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무죄한 이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세력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자신들의 잘못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사자와 역사 앞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도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때 비로소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다니엘 서에는 무죄한 수산나를 구한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라면 요한은 간음죄로 고발된 한 여인을 주님께서 구해주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정인준 신부)

 

3.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가서 그를 깨우자.”

얼마나 정겨운 주님의 반응인지요! 라자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친구가 된다니 말씀 자체가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이수철 신부)

 

[3/27(월)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제 93일 기도]

 

하느님!

원로들의 욕망에 희생될 수산나를 구하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수산나의 머리카락 한올한올 세고 계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무궁무진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3월27일(월) 5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