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4월 8일 토요일[(자) 성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4월 8일 토요일[(자) 성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이날은 노자 성체만 모실 수 있다.
교회는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영성체 후 묵상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쪽은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비자금을 지키기 위해서 29만원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자금을 이용해서 사업을 하고, 재산을 불려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민주주의 영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의 손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정한 축재를 고발하였습니다. 자신도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늦었지만 만시지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쪽은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희생자들의 영령 앞에 사죄를 하였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비자금도 모두 반납하였습니다. 희생자들의 유족들도 대통령 아들의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밭으로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밭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을까요?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나간 아들입니다. 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환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환율이 오르면 원화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수출이 잘되고 경제가 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리면 수출의 가격이 떨어지고, 수입의 가격이 올라갑니다. 경제가 성장할 것 같지만 오히려 경제성장에 발목을 잡습니다. 환율이 내려가면 원화의 가치가 상승합니다.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체질개선을 하게 됩니다. 원화의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해외에서의 투자가 높아집니다. 경제성장이 둔화 될 것 같지만 오히려 경제가 성장합니다. 이것은 통계수치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환율은 저평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외환보유고, 수출실적으로 보면 지금의 환율보다 더 낮아야 한다고 합니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높이면 당장은 좋을 것 같지만 금융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율법과 계명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고, 왼 뺨을 때라면 오른 뺨을 내주라고 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꽃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주간 토요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나의 신앙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나의 신앙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열어 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 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파스카 성야
마태오 28,1-10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죽음을 딛고 되살아났다. 내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 정복되었다!
작년 늦가을에 심었던 튤립이 피정 센터 곳곳에 마구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여쁘고 탐스러운 샛노란 꽃망울을 바라보며 주님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꽁꽁 언 땅에 묻을 때는 과연 긴 겨울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습니다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사한 얼굴을 내미는 친구들에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부활 성야 미사 복음의 주제어는 두려움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짧은 구절 안에 거듭 반복해서 두려움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덤 경비자들의 두려움을 소개합니다.
갑작스러운 큰 지진과 함께 천사들이 등장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을 옆으로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경천동지할 광경에 무덤 경비자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던지 사시나무 떨듯이 떨다가 까무러쳤습니다.
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신앙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이어서 소개되는 두려움은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느낀 두려움입니다.
안 그래도 그토록 사랑했던 스승님과의 사별과 단절로 인한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천사가 열어놓은 무덤 안에 스승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이 느낀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자들을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마태오 복음 28장 5~7절)
이 순간부터 여자들의 두려움은 기존의 두려움과 다른 양상을 지닙니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두려움입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여자들의 두려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전력 질주하던 여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 꿈속에서도 그리웠던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완전히 돌아가셨던 분이 되살아나셨으니 여자들은 당연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 엎드렸습니다.
그분의 발을 꼭 붙잡고 연신 절을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천사와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목소리, 바로 그분 목소리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그 말씀으로 인해 여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적대자들도, 세상의 박해도,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용감하고 담대한 복음 선포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다들 비슷할 것입니다.
쥐고 있는 것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노화와 병고에 대한 두려움.
사별과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 인생이 이렇게 작아지고 쪼그라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저런 다양한 두려움에 시달리며 슬퍼하는 우리를 향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내용의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죽음을 딛고 되살아났다. 내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 정복되었다.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끝이 아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몇천 배, 몇만 배 더 충만하고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07. 주님 수난 성금요일.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8,42)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인간의 역사와 보이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보이는 역사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악이나 죽음 등은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혼란과 비참함은 우리의 존재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당한 처사나 불의의 사고나 재난 등은 참으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고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위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8,42)
주님!
가슴이 이토록 쓰리고 아픔은
당신께서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계신 까닭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채 말입니다.
이토록 제 영혼이 떨고 있음은
당신께서 제 안에 동굴을 파고 들어와 좌정하고 계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상처에서 젖을 먹이시느라고 말입니다.
깊은 침묵의 함성으로 속삭이는 그 사랑의 숨결을 듣게 하소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파스카 예수님
-날마다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리2,8)
마지막 봉헌이자 순종인 거룩한 죽음입니다. 평상시 봉헌의 여정,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봉헌이요 순종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목사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드린 즉각적인 대답이 생각납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대답하고 내심 만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죽음 준비입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안해도 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해도 충분합니다. 오늘부터 하루하루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탕한 다음 제 좌우명 고백시입니다. 묘비명을 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이 기도문을 택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평상시 삶이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의연하게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제1독서 이사야서에 예고된 주님의 종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네 번째 노래에 속합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분명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 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짊어지리라.”
“우리를 위하여” 바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닮는 길만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수난은 혼자 겪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난복음 후반부에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잘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상징하는 바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바로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야할 자리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두 임종어는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 묘비명이 있다면 이 두 임종어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마르다.”
평생 하느님을 목말라했던, 목마르게 생명과 진리의 하느님 아버지를 찾았던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진리에 따라 진리를 증언한 예수님의 전생애였습니다. 앞서의 빌라도와 나눈 문답이 생각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평생 진리를 목마르게 찾았던 진리자체이신 주님과의 일치만이 우리의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시켜 줍니다. 생명의 진리는 물과 같고 밥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미사를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찾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임종시 진리자체이신 하느님을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임종어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의 고백입니다. 죽기까지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책임을 다했기에 예수님의 이런 고백입니다. 과연 평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루려고 노력을 다한 우리의 삶이었는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날마다 실행하려고 분투의 노력을 다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참으로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기에 이런 주님의 고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예수님을 장엄하게 고백하며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로 삼을 것을 권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라보고 배우고 따라야 할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종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아멘.
[4/8(토) 성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성주간 토요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나의 신앙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나의 신앙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조명연 신부)
2.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죽음을 딛고 되살아났다. 내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 정복되었다.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다.
죽음은 이제 끝이 아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몇천 배, 몇만 배 더 충만하고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양승국 신부)
3.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영근 신부)
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이수철 신부)
[4/8(토) 성토요일, 제 105일 기도]
하느님!
성토요일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합니다.
부활이 죽음 안에 온다는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고통 속에 부활이 이미 자리잡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과 늘상 동행하니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4월8일(토) 2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