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4월 15일 토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4월 15일 토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이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믿는 이들이 불어나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 백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세례성사로 새로 난 저희가 불사불멸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4,13-21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16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부속가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9-15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너희는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모님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기에 그냥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도 큰 뜻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가는대로 따라가는 편이었습니다. 고등학교는 공고에 가서 취직하려고 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갖고 싶은 욕심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적은 17등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자전거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드디어 9등을 했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저를 의심하였습니다. 제가 커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와야 하는데 팥이 나왔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커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성적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친구들도 저를 의심하지 않았고, 선생님도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저는 성적이 오른 것도 좋았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러난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편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에서 그런 예언자가 나올 리 없다는 편견입니다.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표징과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편견입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인종과 학력에 대한 편견도 많았습니다. 둘째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태도입니다. 거짓과 모함으로 진실을 덮으려 합니다. 진실이 드러날 경우 그동안 가졌던 특권과 특혜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진실을 감추려합니다. 독재정치가 있는 곳에서도 진실을 감추려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거짓된 예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모두 진실을 덮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엘제블의 힘을 빌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왔다고 모함했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숨기려는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늘어난 신자가 3000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감추려했습니다. 제자들이 보여준 표징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죽음으로 내몰았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시금 제자들의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믿지 못하였습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들 또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날이며 바로 주일이다. 만물이 빛에 휩싸인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며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인다.
수난 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이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부활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기쁘고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 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22-24)
부활 팔일 축제 주간의 말씀이 한결같이 역동적이고 충만한 파스카의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는 공관복음(마태4,18-22;마르1,16-20;루카5,1-11) 앞부분 소명사화와 연결되지만, 오늘 요한복음은 복음 마지막 부분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사화에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고기잡이 기적이 주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제자에게 발현하신 일화로 의미 풍성한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강론 제목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었고, 부제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 라는 주님의 다정한 초대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보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 더 복음적이고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무려 26년전 이런 깨달음의 자작 애송시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하느님을 찾는 노고를 잠시 멈추고, 찾아오시어 함께 계신 주님을 마음의 호수에 담아 모시자는 권고입니다. 어제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오매불망寤寐不忘 제자들이 그리워, 보고싶어 당신이 돌아가신후 갈릴리 호수, 생업현장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 오십니다.
말그대로 우리가 그리워 보고싶어 찾아 오시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 상황과 흡사합니다. 복음 서두부터 풍부한 의미가 계시됩니다. 아마도 예수님 돌아가신후 고기잡이 현장의 생업에 종사하게 된 일곱제자들의 실의와 좌절상태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여기서 일곱은 요한에게 풍부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일례로 요한복음에는 일곱의 표징들이 나오고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신원도 일곱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니 제자들의 내면은 말그대로 “텅 빈 허무”의 캄캄한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연상되는 주일미사후 낮기도대신 바치는 시편 127장 전반부 말씀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시편127,1-2ㄱ)
그대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 제자들의 심정적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빠진 텅 빈 허무의 삶은 세상 무엇도 대체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텅빈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허기虛氣로 “텅 빈 마음”은 하느님만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의 장면이 참 아름답고 구원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뭍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얼마나 멋지고 구원의 위로가 되는 장면인지요!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배후에서 물끄러미 지켜보셨을 주님께서, 찬란한 아침노을 배경으로 동터오는 태양과 더불어 당신을 계시하려는 순간입니다. “절망은 없다”라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실의와 좌절,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을 바로 그때 거기 그 자리에 주님은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실의와 좌절감에 빠진 제자들을 친히 찾아 오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그물 가득 고기를 잡아 올리는 순간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본 애제자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이어 주님의 출현에 반가움의 절정에 도달한 수제자답게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채 호수로 뛰어 듭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풍부하고 역동적입니다. 백쉰 세 마리의 고기들로 가득찬 그물은 미래의 교회의 풍성한 선교 열매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그 많은 고기들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교회일치의 견고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성체성사 미사를 상징하는 장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21,12)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우리를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시며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제자들의 “텅빈허무”의 마음은 “텅빈충만”으로 바뀌었듯이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그러합니다. “먹어라” 말마디를 대하니 문득 열왕기 상권에서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다 싸리나무 아래 잠이 든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던 천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광야여정중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19,7)
예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베드로가 아니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일치의 삶을 살게 된 덕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리더십이 빛나지만 제1독서 사도행전의 최고의회에서 설교는 그 리더십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 사도들의 말을 들은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는데 장정만도 무려 오천명 가량 되었다니, 복음의 ‘그물에 가득 담긴 고기들’의 상징적 장면은 교회의 풍성한 선교 열매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태생 불구자의 치유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설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권壓卷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확신에 넘친 베드로의 감동적 설교인지, 그대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말씀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4,10ㄴ-12). 아멘.

[4/15(토) 부활팔일축제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믿지 못하였습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신부)
2.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복음을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강론 제목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었고, 부제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 라는 주님의 다정한 초대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보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 더 복음적이고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이수철 신부)
[4/15(토) 부활팔일축제 토요일, 제112일 기도]
하느님!
“우리를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 라는 예수님의 다정한 초대 말씀...
늘상 저를 잊지 않으시고...찾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4월15일(토) 6시40분...수산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