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4월 16일 주일[(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4. 16. 04:30

[매묵]2023년 4월 16일 주일[(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큰 자비를 기리는 날로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 자비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1베드 2,2 참조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여라. 너희는 그 젖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또는>

4에즈 2,36-37
너희는 영광과 기쁨을 누려라. 하늘 나라로 너희를 부르신 하느님께 감사드려라. 알렐루야.<대영광송>

본기도

영원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로 저희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니
더욱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물로 깨끗해지고 성령으로 새로 난 이들이
성자의 피로 얻은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42-47
형제들은 4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47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8(117),2-4.13-15ㄱㄴ.22-24(◎ 1)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또는
◎ 알렐루야.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나를 밀치고 밀쳐 쓰러뜨리려 해도, 주님은 나를 도와주셨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속가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요한 20,2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알렐루야.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의 주님,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려는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위로하며 그들의 안식처가 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정치인들에게 서로 존중하고 대화하는 마음을 심어 주시어,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뜻을 모으고 함께 행동하게 하소서.

3. 장애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희망의 주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시어,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꿋꿋이 이겨 내고, 재활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소서.

4. 본당 사도직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저희 본당의 사도직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굽어살피시어, 그들이 주님의 은총을 깊이 깨닫고 저마다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과 세례로 새로 난 자녀들)이 바치는 제사를 받으시어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세례로 새로 난 저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한 20,27 참조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의 발 앞에 엎드려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고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이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그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충전을 해야 작동합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태풍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일의 최종 원인을 신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있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의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성과 오성 그리고 감성으로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 , 미는 더 높은 존재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진, , 미의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야 가을에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우주의 씨를 뿌린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철학자들에게는 교과서와 같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인 신의 존재 증명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 깊이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선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구름, , , , 바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측은지심의 마음, 수오지심의 마음, 사양지심의 마음,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이 마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나 더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높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모세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도 크시기에 이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 주셨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이 구원의 역사, 사랑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쁜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기쁜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셨고,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무덤에 묻힌 지 3일이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 기쁜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와 짐은 편하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둠에 빛을 주셨고,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셨고,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기쁜소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권력에 의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에 의해서, 믿었던 제자의 배반으로, 군중들의 무지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랐습니다. 무참하게 하느님의 아들이 허무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이상한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빈무덤이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 무덤을 찾았으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으로 달려갔으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토마사도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성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앙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였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 기쁜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2. 방효익 바오로 신부 강론

 

부활 제2주일(가해)

복음(요한 20,19-31)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수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드러내셨고, 저녁에는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던(마르 14,50)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약속하신(14,18.28) 대로 찾아오셨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었다는데, 아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할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셨는데, 승리한 메시아(이사 9,5; 미카 5,4)께서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고난을 겪을지라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의 평화(14,27; 16,33)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손의 상처와 피와 물이 나왔던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면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인시키십니다.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신 것처럼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17,18) 당신과 함께하셨던 성령을(1,32-33) 불어넣어 주시는데, 새로 태어나 한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라는 것이고(3,3-8),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숨결(성령)에 달려 있음을 말합니다. 영광스럽게 되신 분께서는 성령께서 이미 와 계심을 확인해주시고(7,39),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14,26).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제자들은 먼저 진리(말씀)로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17,17-19). 또 다른 사명은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므로”(16,8)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상의 죄인들을 용서하고 악을 물리쳐야 합니다(루카 24,47).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과 평화의 인사를 받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를 설득하려고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평화와 기쁨의 분위기에 있던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소.”라고 했으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던 것처럼(20,17), 토마스도 살아나신 분을 자기가 직접 뵙고, 못 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들과 초기 교회가 겪었듯이, 많은 이들이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는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기 전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기뻐했던 다른 제자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엉뚱했던 토마스(11,16)의 의심은 나타나엘의 의심(1,46-50) 못지않습니다.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상처를 만져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겠다(14,21)고 하신 것처럼 믿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믿는 것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불신을 지적하시면서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즉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1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지 않고 제자들의 증언만 듣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위로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요한복음의 결론이며 동시에 서론(1,1-18)을 다시 읽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분을 믿지 않았던 유다인들의 불신(12,37)을 다시 강조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3,15-16).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증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내면서(2,22; 12,16; 14,26)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신 분이심을(10,27-28) 선포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과 행적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목격 증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체험이었기 때문에 그분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고,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독서(사도 2,42-47)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끈끈한 형제애를 보여줍니다.
루카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삼천 명가량 늘었다는(2,41) 것과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주셨다.”(2,47)라는 말 사이에 사도들의 공동체가 부활 신앙을 어떻게 살았는지 소개합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줄 수 있던 것은 공동체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고, 자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친교), 성찬의 전례를 거행했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하느님께서 사도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확인해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을 주시고, 많은 이들이 사도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잘 따랐던 사도들 공동체는 일치와 조화를 이루었으며, 박해 때문이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재산과 재물을 공동소유로 하면서 필요한 대로 나누었습니다.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친교(형제애)를 이루고, 빵을 나누는 일(자선)과 기도하는 일(성찬의 전례)에 전념했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되새겨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기쁘게 살던 사도들 공동체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제2독서(1베드 1,3-9)는 사도시대 이후 초기 교회 공동체가 했던 찬미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선택된 이들은 성령으로 거룩해져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고, 또 그분의 피가 뿌려져 정결하게 되었습니다(1,2). 하느님의 자비로 새로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구원에 대한 생생한 희망을 주셨기 때문에 두 가지 분명한 태도를 갖추라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상속재산(하느님 나라: 마태 5,5)이 썩거나 더러워지거나 시들지 않도록 잘 간직해야 하고, 둘째,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밝혀질 믿음의 목적인 구원을 받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련을 잘 견뎌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기”(로마 8,17) 때문에, 비록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지금 겪고 있는 박해나 시련을 잘 견뎌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믿음이 불로 단련을 받는 것이므로 잘 견뎌낸다면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에 기쁨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복음)을 목격한 사도들의 공동체(1-2독서)가 부활 신앙을 어떻게 살았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잠가놓고 있었음에도 찾아오신 예수님의 발현 방식에 복음사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목격 증인들은 부활하신 분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았고, 도망쳤던 제자들을 찾아주셨고,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믿었기에 예수님의 행적과 부활 체험을 기록했고,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기에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기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구원을 확실하게 체험했으나 부활하신 분의 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할 줄 몰랐습니다. 부활하신 첫날 그분을 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또 알아본 뒤에도 또 생소했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그분께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경우에만 부활하신 분이 보였고, 오직 그분께서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특성이며,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부활하신 분과 만남을 어정쩡하게, 때로는 말더듬이처럼 모순된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했던 초기 공동체의 순박하고 열렬했던 신앙생활의 모습과는 달리 공동체와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토마스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떠난 뒤 했던 권고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분을 직접 뵙지는 못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을 때, 신앙생활에서 오는 시련을 견뎌내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신앙생활이 잘 성숙할 수 있고,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15.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이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이요,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배움의 여정

-믿음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겸손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필수적인 것이 겸손입니다. 경청과 겸손있어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배움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배움과 훈련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수행이 배움과 훈련이니 수행의 학습(學習)입니다.

 

기도도, 믿음도, 겸손도, 경청도, 순종도, 섬김도, 사랑도, 희망도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학습해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평생 배워야 하는 섬김이요, 배우고 배워도 늘 초보자임을 깨닫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한국 지폐에 있는 얼굴을 아십니까? 이제 카드만을 사용하다보니 지폐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천원권의 얼굴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이황 퇴계, 오천원권은 이이 율곡, 만원권은 세종대왕, 오만원권은 율곡의 모친 신사임당입니다. 얼마전 퇴계 평전을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감동했습니다.

 

“퇴계는 천재적 재능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거나 탁월한 이론이나 공적으로 사람들이 감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실패담과 자신이 애써던 노력의 과정으로 누구에게나 아무런 거리감없이 결코 기가 꺾이는 일 없이 편안하게 그 앞에 다가 서게 해주는 스승이다.”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온유의 퇴계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위대한 사막교부중 한분인 팜보압바의 임종시 남긴 일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시작도 못했는데 하느님께 가는 구나!”

 

이런 겸허한 고백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니 오늘 지금 여기서 분발의 노력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게 합니다. 요즘 겨울 추위를 지낸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이 한창입니다. 어제 써놓은 “참행복”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하늘의 별같다

 하늘을 바라보듯 땅을 바라본다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다

 오늘 지금 여기서”-2023.4.14.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를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사람들이겠습니다. 사막교부들중 아르세니우스에 대한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언젠가 아리세니우스 압바가 이집트의 농부 수도승에게 자기 생각에 대해 상의하는 모습을 본 제자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묻습니다. “아니 스승님처럼 훌륭한 교육을 받은 분이 이런 농부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묻습니까?” 그러자 아르세니우스 압바의 겸손한 대답입니다. “그렇다. 나는 많이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이 농부의 알파벳도 모른다.”-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나 학식보다는 겸손한 믿음에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지식 유무와는 별개로 평범한 분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삶의 스승, 삶의 지혜입니다. 저 또한 공동체의 수도형제들의 일상으로부터 평범한 지혜를 많이 배우고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부활의 믿음을 지니는 것이 어려운지 배웁니다. 예수님의 부활했다는 소식에도 한결같이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 이어 당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의 골자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신비의 주님을, 파스카 기쁨의 주님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희망을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파스카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파스카 주님께 대한 믿음도 배움이자 훈련입니다.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입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매일 온힘을 다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공동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믿음의 배움과 훈련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일상화해주는 공동전례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 성숙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좋은 모범이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유다지도자들과 원로들,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놀라니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들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제자들이었으니 최고의 스승이자 목자인 예수님을 통해 보고 배운데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결과 이런 담대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대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 지시하였지만 제자들은 이에 반발하며 담대히 확신을 토로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지식이나 학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도 끊임없이 믿음의 배움과 훈련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배워 깨닫고 훈련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영국의 성인 토마스 모어(1478.2.7.-1535.7.6.)가 단두대에서 처형시 일화가 생각납니다. 처형대에 올라간 그는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말하니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나는 왕이 좋은 신하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진리에 따라 살다가 순교한 “진리의 순교자” 토마스 모어 역시 주님의 참 제자임을 깨닫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배움의 도상에서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선사되는 겸손한 믿음, 지혜로운 믿음이요 이런 믿음 또한 부단히 배워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에, 사랑에, 겸손에 언제나 초보자라는 자각이 하루하루 날마다의 모든 수행에 최선을 다해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며 매일 주님의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4/16(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조재형 신부)

 

2. 사도들과 함께했던 초기 공동체의 순박하고 열렬했던 신앙생활의 모습과는 달리 공동체와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토마스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떠난 뒤 했던 권고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분을 직접 뵙지는 못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을 때, 신앙생활에서 오는 시련을 견뎌내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신앙생활이 잘 성숙할 수 있고,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방효익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지식이나 학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이수철 신부)

 

[4/16(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13일 기도]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에 올라 부활하신 예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과 동행 함에 감사합니다.

늘상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현존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4월16일(일) 4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