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4월 24일 월요일[(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4. 24. 21:28

[매묵]2023년 4월 24일 월요일[(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 순교자

입당송

착한 목자, 당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네. 당신 양 떼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6,8-15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11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2 또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부추기고 나서,
느닷없이 그를 붙잡아 최고 의회로 끌고 갔다.
13 거기에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14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23-24.26-27.29-30(◎ 1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또는
◎ 알렐루야.
○ 권세가들 모여 앉아 저를 헐뜯어도, 이 종은 당신 법령을 묵상하나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 ◎
○ 저의 길을 아뢰자 당신은 들어주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당신 규정의 길을 깨우쳐 주소서. 당신의 기적을 묵상하오리다. ◎
○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저는 진실의 길을 택하였고, 제 앞에 당신 법규를 세웠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물과 함께 바치는 저희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2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우리 주 …….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하느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이 되어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무서운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굶주림을 피해서 갔던 이집트는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을 만큼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피라미드를 건설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요나가 회개를 선포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는 규모가 엄청 컸습니다. 아시리아는 강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망국의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에 감탄해야 했습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로마는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통치하였습니다.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로마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와 사회 구조에서는 당대의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굳게 간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습니다. 비록 강대국의 힘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갈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부활신앙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력으로 남을 침략해서 얻는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나눔을 통해서 얻는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십자가와 희생을 통해서 얻는 자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미리 예고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공동체는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가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를 잡고 홍익인간의 이상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무서운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우리 민족의 주변에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는 오랜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사절을 보내기도 했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침략은 막아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국토를 침략하였습니다. 한일합방으로 36년간 우리민족을 식민지로 통치하였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일본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냉전 시대에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 러시아는 바로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과 함께 참전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우리의 경제, 문화, 사회의 많은 것들은 미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5000년을 이어오는 우리 민족은 많은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굳건하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으며 굶주림을 참아야 했지만 이제는 가난한 나라를 도와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K Culture"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는 슬픈 역사가 있었지만 우리는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굳게 간직하였습니다. 우리의 얼과 혼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얼과 혼을 지켜낸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6,22-29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란다!

 

오늘 제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치유활동을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었습니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참 메시아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킬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꿈을 성취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긴 했지만, 결코 존경과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가끔 예수님께서 자취를 감출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은 목숨 걸고

집요하게 그분을 찾아다녔습니다.

어렵사리 예수님을 발견한 그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를 몰래 따돌리고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그들의 속셈과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의미 없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십니다.

 

“허황된 꿈들은 빨리 깰수록 좋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다. 이 세상 것만 기를 쓰고 추구하지 말아라.

감추어진 세계, 보다 가치있고 차원 높은 세계는 어찌 보지 못하느냐?”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423. 부활 제3주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오늘은 부활 3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7)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받아서 <화답송>의 시편에서는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30년이 지나서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음”(1베드 1,28)을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곧 당신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켜내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느지 들여다 보아야 할 일입니다.
 
절망과 슬픔에 빠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의 표면만 보고서 절망에 빠져,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바로 그 순간은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때가 자신들의 걸었던 희망과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때가 바로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죽었다’는 그 앎과 그래서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타올랐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응답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나의 믿음이 부서지고 당신의 믿음이 들어설 때입니다. 나의 희망이 부서지고 당신의 희망이 들어서고, 나의 사랑이 부서지고 당신의 사랑이 들어설 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그런데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루카 24,31).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14,31).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계신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여전히 동행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증언하도록 동행하십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하메나 놓칠까 우리의 손을 꼭 붙들고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이미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늘 데리고 다니시기”(2코린 2,14)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 가까이 오시어 곁에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주님과 함께 개안開眼의 여정, 우정友情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어제는 신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날이었고 오전, 오후 명일동 성단 독서단 18명을 대상으로 “렉시오 디비나” 주제로 피정을 지도한 날이었습니다. 피정온 사랑스런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흡사 하느님의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개안의 은총으로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강의 시작전 드린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참 탁월한 선택을 하셨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참 아름다운 날에 참 아름다운 수도원에 참 아름다운 분,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나러 오신 여러분들은 참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의무이자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참으로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닮아가면서 참내가 되어갈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그날까지 새롭게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강의와 강론과 배려 덕분에 넘 행복하고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미사에서 정점을 찍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원님들이 다 너무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건강하시고 행복한 수도생활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떠나면서 보내준 단원 대표 자매의 글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어제 피정 지도했던 주제, 렉시오 디비나, 참 풍부한 내용이었습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 목표는 내 삶의 성경책 렉시오디비나에 있습니다. 내 고유의 삶의 여정을 통해 눈이 열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아 갈 때 참으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후 의기소침해 있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아연 활기를 찾는 분위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 성경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와 빵 나눔의 성체성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엠마오 도상이 제자들은 눈이 가려져 함께 하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빵을 떼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 보는 장면과 이어지는 이들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 가르침이 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라지셨다.’-

 

그대로 미사중 성찬전례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님의 몸인 성체를 모실 때 순간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 본 참으로 강렬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사라진 주님은 어디로 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과 하나됨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어 계신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할 것입니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한결같은 수행이 얼마나 주님과의 만남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엠마오 도상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새삼 주님의 은총속에 이뤄지는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믿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엠마오 도상 제자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미사전례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반부가 말씀전례라면 후반부는 성찬전례입니다. 

 

매일의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에 미사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피정지도시 강조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매일미사책대로 날마다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면 좋겠습니다.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주의 깊게 렉시오 디비나 하고 매일 미사에 참석하면 좋을 것입니다. 미사에 이보다 더 좋은 준비도 없고 혹시 미사 못하더라도 매일의 영적 양식으로 삼아 매일 미사책대로 렉시오 디비나하면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개안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말씀과 전례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가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편의 다윗의 체험을 통해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베드로입니다. 바로 그 시편은 화답송에 그대로 나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시편의 주님의 고백을 자기 고백으로 삼았을 것이며 자주 되새겼을 다음 내용입니다. 그대로 내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은 내용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의 고백이 되었고, 베드로의 고백이 되었고 우리의 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우리 순례여정의 삶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제 절친이라 고백하곤 합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35년 동안 정주하면서 날마다 미사에 강론을 통해 우정을 다져온 주님이니 아마 세상에 이런 친구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빠짐없이 매일 쓰는 강론은 사랑하는 주님께 올리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계속될 우정의 여정, 개안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했던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설교에 이어 제2독서 베드로 전서에서 그의 생생한 주님 체험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그네 살이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것으로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중 하느님을 가리키는 방향의 이정표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개안의 여정,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4/24일(월) 부활제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허황된 꿈들은 빨리 깰수록 좋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다. 이 세상 것만 기를 쓰고 추구하지 말아라.

감추어진 세계, 보다 가치있고 차원 높은 세계는 어찌 보지 못하느냐?”(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 가까이 오시어 곁에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의무이자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참으로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닮아가면서 참내가 되어갈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그날까지 새롭게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이수철 신부)

 

[4/24일(월) 부활제3주간 월요일, 제121일 기도]

 

하느님!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하느님 자녀의 향기를 풍기게 하소서.

하느님 자녀다운 모습을 갖추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4월24일(월) 21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