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5월 3일 수요일[(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5월 3일 수요일[(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소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며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입당송
본기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8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또는
◎ 알렐루야.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에 드리는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티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소서.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리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내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관념이 아니었고,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생활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밥을 푸시면서 성호경을 그으셨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생일에는 본당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기일에는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부활, 성탄 판공을 보았습니다. 교무금, 헌금은 꼭 챙겼습니다. 아침,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삼종기도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피정, 교육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본당 신축헌금을 냈고, 형편이 어려우면 노력봉사를 하였습니다. 9일기도, 54일 기도를 하셨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면 제일먼저 주변에 있는 성당을 찾아보았습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신앙을 교리에서 배우기 전에, 교회에서 배우기 전에 먼저 집에서 배웠습니다. 신학교의 가르침은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의 연장이었고,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확인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신자의 수보다는 성당에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전을 신축해야 했고, 본당은 분가해야 했습니다. 1년을 배워야 하는 교리는 6개월로 단축해서 배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영성의 깊이를 채우는 것보다 친교와 활동을 넓히는 것에 치중했습니다. 주일미사의 참례 수가 80%가 넘었는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점점 낮아졌습니다. 20%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고,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힘들어졌습니다. 도시생활과 핵가족으로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덕을 쌓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보다는 재물, 권력, 명예로 현세해서 성공하는 삶을 먼저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대학만 갈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잠시 성당에 가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신자는 늘어났지만 성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성직자도 늘어났습니다. 냉담자도 늘어났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는 나무가 바람에 쉽게 넘어지듯이, 샘이 깊지 않으면 가뭄에 곧 말라버리듯이 교회에 활력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포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도, 칼도, 죽음도, 세상의 권신도, 천신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전해 준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에게 전해 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님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오늘은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의 빛이 이웃에게 전해 질 것이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가 참된 행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2. 송영진 모세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3. 5. 3. 수)(요한 14,6-14)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8-11)”
여기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모세도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 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탈출 33,18-23)”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11-13)”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대단히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만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필립보 사도가 ‘아버지’를 뵙고 싶어 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금 상황은 최후의 만찬이 끝난 뒤에
배반자 유다가 떠나고, 예수님께서 고별의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몹시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를 꾸짖는 말씀을 하신 것은, 사실은 모든 사도들을 꾸짖으신 것이고,
그것은 사도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한 격려로 해석됩니다.
(사도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꾸짖은 것이 아니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은,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
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외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11절).
예수님의 ‘일’과 ‘삶’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표징’과 같은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4-16).”
사도들은 예수님의 ‘일’과 ‘삶’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삶이 ‘사랑’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존재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12절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협력자들입니다.
13절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과 신자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계시 말씀이기도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으며,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wnslaR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제 지친 발을 씻어주고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눈에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다독거리십니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당신 손은 오늘도 제 가슴 위에 있습니다.
저는 잃을 수 없는 당신 사랑의 사람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믿음의 여정
-은총, 선택, 배움, 훈련-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묻는다면 ‘믿음으로 산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제는 참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5월 성모성월의 첫날이었습니다. 수도원을 찾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계속되는 부활시기 파스카의 계절이자 신록의 계절, 신록의 기쁨 가득한 5월입니다. 믿음의 색깔은, 파스카 예수님의 색깔은 아마도 이런 신록의 색깔일 것입니다.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도 생각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노년 품위의 우선 순위도 ‘믿은, 건강, 돈’이 되겠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선택,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의 여정에도 우리는 기도처럼, 사랑처럼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오늘 믿음을 강론 주제로 택한 것은 복음의 다음 말마디입니다. 완고한 불신과 무지의 유다인들에 대한 다음 예수님의 말마디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믿음은 주님의 양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 끊임없이 반복된 초대송 후렴이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는 성구였습니다.
새삼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선택,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임을 또 믿음의 개방임을 깨닫습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보고 배울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물론 기도도, 사랑도, 희망도, 겸손도 도대체 보고 배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021년 7월 20일 써붙인 말마디가 여전히 붙어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 공동체입니다.”
살아가면서 나이들수록 수도공동체에 대한 감사는 더욱 커집니다. 제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이요 형제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날마다 끝없이 배웁니다. 겸손도 희망도 사랑도, 섬김도 배우고 특히 믿음을 배웁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학교, 믿음의 학교가 수도공동체입니다.
성서의 사람들, 교회의 성인들은 말그대로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이들의 희망과 기쁨, 사랑과 지혜, 찬미와 감사, 평화와 자유도 그대로 믿음의 표현들입니다. 제가 늘 경탄하는 바는 저보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의, 그러나 정신은 영원한 청년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벌써 41차 해외 사목 방문으로 4.28-30일 까지 항가리를 방문하여 6회나 긴 강론을 하셨고, 귀국중 비행기내에서 인터뷰 내용에 감탄했습니다. 어쩌면 노령의 나이에도 이렇게 기억력이 좋고 말씀도 잘하시고 총명하신가 하고 말입니다. 이또한 믿음의 표현이겠습니다. 교황님의 무엇이 그렇게 항가리 국민들을 열광케하는지 물음에 대한 항가리 주재 교황대사의 답변입니다.
“두가지이다. 그의 기쁨, 그의 열정이다. 그들은 기쁨에 넘친 사람을, 늘 미소띤 사람을 본다. 복음의 기쁨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교황님의 이런 면모를 본다. 중부 유럽에 속하는 항가리는 겨울날이 길고 구름낀 회색빛 어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신자든 아니든 교황님의 빛나는 기쁨과 미소는 이들에게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황님의 성실성이다. 교황님은 말씀의 사람이요 참 성실하게 말씀하신다. 이래서 항가리 사람들은 교황님께 깊이 감동하고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의 보증 수표같은 교황님입니다. 희망과 사랑처럼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분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바로 교황님의 기쁨과 열정, 성실성 모두가 믿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황님뿐 아니라 오늘 기념하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분은 성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가 되는 분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는 아리우스 이단과 치열히 대결하면서 교회를 수호한 교회의 사람,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5차례나 유배기간중 숱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그런 와중에도 귀한 집필 활동도 계속하셨으며 수도승들의 교과서라 일컫는 사막 수도승의 아버지 “성 안토니오의 생애”도 쓴 분입니다. 그러면서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목숨은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중, 참으로 주님의 양들중의 양들같은 존재가 안토니오 성인이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또한 이런 착하고 지혜로운 믿음의 양들이 되는 것 또한 은총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좋은 양이 될 때 신자들의 착한 목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우리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성인들, 교회의 사람들이 바로 이 복음 말씀의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중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되는 혜성같은 존재, 바르나바 역시 믿음의 용사임을 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정말 호감이 가는 멋지고 아름다운 성령과 믿음의 사람 바르나바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의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결론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몫이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분들의 열정과 노력,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보고 배우라 선물로 주어진 성인들이요 교회의 어른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끊임없이 보고 배울 열정도 선물하십니다. 아멘.
[5/3(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되새김 구절]
1.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
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외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11절).
예수님의 ‘일’과 ‘삶’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표징’과 같은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송영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제 지친 발을 씻어주고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눈에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다독거리십니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당신 손은 오늘도 제 가슴 위에 있습니다.
저는 잃을 수 없는 당신 사랑의 사람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이수철 신부)
[5/3(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 130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제 지친 발을 씻어주고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저는 잃을 수 없는 당신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5월3일(수) 4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