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5월 27일 토요일[(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3개

마르티나 2023. 5. 27. 03:44

[매묵]2023년 5월 27일 토요일[(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3개

 

오늘 전례

[백]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입당송

사도 1,14 참조
제자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 축제를 마치는 저희에게 너그러이 은혜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 신비를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10),4.5와 7(◎ 7ㄴ 참조)
◎ 주님, 올곧은 이는 당신 얼굴 뵈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옥좌에서,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
○ 주님은 의인도 악인도 가려내시고,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6,7.1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거룩한 신비를 합당히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6,1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성령이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리라.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저희의 기도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예수님과 사랑하는 제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좌 신부님 때에 늘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던 신부님은 본당 신부님이 되어서도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보기 때문입니다. 일이 없으면 심심해서 죽겠다고 하고, 일이 많으면 피곤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고, 본당 신부가 되어서는 요즘 보좌 신부들은 예전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산이 높다고 불평만 하지 정작 산을 오르려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봄이 와서 온갖 꽃들이 만발한데 혼자만이 스스로의 감옥에 갇혀서 겨울을 지내는 사람과 같습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게이트를 알아야 합니다. 보통 게이트의 번호가 바뀌지 않지만 간혹 게이트의 번호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옆의 게이트로 바뀌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한참 걸어야 하거나 트레인을 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분들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곤합니다. 이런 분들과 함께 지내면 늘 조심스럽습니다.

 

잘 될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역경의 순간에 더욱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순례 때입니다.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는데 그만 미사 도구를 놓고 왔습니다. 걱정이 한 가득인데 좋은 의견을 내 준 분이 있었습니다. 휴게소에서 와인을 사고, 도자기 그릇을 사고, 둥그런 빵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멋진 성찬의 예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던 것처럼 빵을 쪼개어 나누어 먹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던 것처럼 빵을 나누어 먹었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전례와 빵 나눔의 예식을 통해서 순례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사해의 뜨거운 사막에서 기꺼이 아이스크림을 나눈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이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활짝 웃게 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은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아름다운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어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요 밖에서도 새는 바가지인가? 아니면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는 잘 될 나무인가?” 저의 지나온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평과 짜증의 발자국이었다면 이제라도 인내와 온유함의 발자국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혔어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 함 석헌 선생님이 말하던 바로 그 사람이 되었습니다.


  • 2.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5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사랑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당신께서는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시고 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레서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성인예찬(聖人禮讚)-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니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가뭄으로 메말랐던 대지가 봄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습니다. 저절로 참 많이 나눴던 “봄비”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5

 

2005년도 이맘때쯤 그러니까 18년전 쓴 시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빠르게 지납니다. 앵두꽃 하얗던게 엊그제 같은데 한 수도형제는 어제 빨갛게 익은 앵두를 다 땄습니다. 빨간 앵두하니 27년전 써놨던 “고백’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믿음의 뿌리 있어

희망의 나뭇잎

사랑의 열매다

 

사랑합니다.

마침내 빨간 열매로 사랑을 고백하는

앵두나무

 

초록빛 나뭇잎

희망 사이로 수줍게 살며시

얼굴 내밀고

 

사랑을 고백하는

빨간 앵두열매들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1997.5.30.

 

봄비가, 빨간 앵두나무가 상징하는 바 성인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두분의 익명의 성인을 소개합니다. 어느 성인처럼 살아가는 의사가 전하는, 퇴근후 방문하여 치료해준 자매님의 아들인 교구사제가 성인입니다.

 

“알츠하이머와 파킨스 병으로 투병중인 어머님을 평생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계시는 신부님을 뵐 때마다 ‘사랑’을 정말 제대로 실천하고 계심에 감탄과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나네요.”

 

또 저보다 1년 후배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후 요양원에 있는 남편을 간병하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후 그 요양원에서 일하는 성녀같은 70대 초반의 자매님이 보내준 사연도 생각납니다.

 

“요양보호사 6개월째 제가 돌봐드리던 어르신들중 3분이 선종하셨습니다. 가슴 아픈 일은 임종을 알림에도 가족 누구도 오지 않고 화장장으로 온다며 그리로 어르신 시체를 보내라 합니다. 

제가 세수부터 대소변에 전신목욕도 해드리고 죽드시는 식사도 떠드리고 말벗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발버둥치는 순간 포착해 안아서 올려드리며 정성을 쏟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입으시던 옷, 안경, 성경책등 유품 챙겨 박스에 보내려 하니 가족은 그저 다 버려달라고. 80세로 허망하게 가신 제 어르신 가여워 한참동안 울었습니다.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죽음은 무얼 말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듯 하나 일상의 비상한 성인들입니다. 제게는 70대 후반에도 주방장 소임의 책임을 다하는, 또 70대 초반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일하는 영원한 현역의 농장장 수도형제가 성인입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수도형제가 성인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겸손하게 합니다.

 

유난히 성인이 많은 한국 가톨릭 교회입니다. 절의 자산이 노승과 노목이라했지만 교회의 최고의 보물이자 자산은 성인입니다. 주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주님을 닮아 참나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지난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청중을 위한 교황님의 훈화가 참 각별했으니 바로 박해시대 한국 교회에 대한 소개와 온통 성 김대건 안드레아에 대한 찬탄과 격찬의 강론이었습니다. 다섯부분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1.복음을 위한 위대한 시련.

2.항구히 그리스도를 따름.

3.복음을 완전히 살았던 분.

4.위대한 한국인의 증거.

5.모든 추락으로부터의 부활.

 

교황님께서 얼마나 한국교회 대해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성인들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부심입니다. 기념, 기억하라고 있는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살라고 선물로 주신 성인들입니다. 

 

어제 베다 성인에 이어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다양한 꽃들처럼 크기, 모양, 색깔, 향기가 다 각기 고유한 꽃들처럼 성인이 그렇습니다. 똑같은 성인은 없고 주님을 닮을수록 고유의 참나의 성인입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에 대한 감동적인 생애를 일부 소개합니다.

 

-착하고 명랑한 성격에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소년 필립보는 ‘착한 필립보Filippo bono’로 불렸습니다. 필립보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속해있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어 교회의 분열이 뒤따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교회의 분열은 가톨릭 교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그리스도 교회는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회, 영국 성공회 넷으로 갈라집니다. 바로 로마의 사도라 부르던 필립보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던 때가 이 무렵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을 하느님께 이끌고자 준 많은 충고중 일부만 나눕니다.

 

“젊은이들이여, 선을 행할 시간이 아직 있으니 그대들은 복되다.”

“육신을 돌보는 데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교만을 미워하라. 자주 기도하라.”

“유혹을 받게 되면 그 즉시 주님께 매달려라.”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쉽사리 유혹에 빠진다.”

“악습의 온상인 게으름을 경계하라.”

 

동료사제들과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에 대한 평가와 임종시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유머 감각 풍부한 성인”이라고 칭했고,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매력넘치는 인품을 지닌, 사람을 저절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닌 성인 사제”, 또 “교회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성인”으로 평가받은 성인의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심한 병고에 시달릴 때, 성인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참으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는데, 이 비천한 몸은 이런 호사스런 자리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염치없는 노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자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자입니다.”

 

1595년 5월26일, 성인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축복하고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숨을 거두었고, 모든 이들은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위대한 성인께서 돌아가셨다” 소리쳤다 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인상적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베드로이고 사도행전 독서의 주인공은 바오로입니다. 두 성인 사도는 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말씀의 분위기에 어른 거리는 두 사도의 머지 않아 맞이할 순교의 죽음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세 물음과 답은 동일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자기를 세 번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확인받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말씀하신후, “나를 따라라” 명하십니다. 아마 얼마 안남은 동안 베드로는 자나깨나 “너는 나를 사랑 하느냐?” 이 말씀을 좌우명 삼아 주님 사랑에 온힘을 쏟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가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동안 계속됐던 사도행전 제1독서도 내일이면 끝납니다. 오늘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서 심문을 받고 이어 로마로 압송될 것이며 로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담대히 선포하다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의 좌우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다음 둘임에 분명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ㄱ)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4,7)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