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6월 19일 월요일[(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6월 19일 월요일[(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본기도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6,1-10
형제 여러분,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6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9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사람을 새롭게 하는 성사가 되게 하시니
이 제사가 저희 육신과 영혼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요한 17,1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6월 19일 월요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여섯 가지 대당 명제(지난주 목요일 묵상 참조) 가운데
다섯 번째 가르침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복수에 관한 규정을 다룹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탈출기의 전체 구절은 이렇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21,24-25).
동태 복수법이라 일컫는 이 규정은 잔인한 보복을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법의 취지는 지나친 보복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상해를 입은 사람이 복수심에 불타서
자신이 입은 피해 이상의 보복을 벌일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합당한 보복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규정임에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지닌 폭력성을 지적하시며 아예 복수를 포기하라고 주문하십니다.
오히려 자신의 오른뺨을 친 사람에게 다른 뺨마저 내주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오른손잡이임을 감안하면,
누군가의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을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는 대단히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참기 힘든 모욕을 당하고도 그 사람에게 왼뺨마저 내밀라는 것은
상대방의 의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함께 가자고 강요하는 자에게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달라는 대로 주고 바라는 만큼 꾸어 주라시니, 아니 그보다 더 얹어 주라고 하시니,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여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모습이고,
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문의 밑바탕에는 어제 우리가 함께 묵상한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거저 얻었기에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저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호구 취급을 받을지언정, 하늘나라에서는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은 ‘성모님의 집’이 있던 ‘에페소’입니다. 성모님의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순례자들을 포근하게 맞이하는 것처럼 성모님이 집은 따뜻하고 아늑했습니다. 성모님의 집이 오늘날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가 된 것은 고고학자들의 발굴과 한 수녀님의 환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에페소의 산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집’ 터를 찾았습니다. 성모님은 요한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에페소로 왔을 거라는 추측을 했지만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수녀님이 ‘환시’를 통해서 성모님을 만났고, 성모님께서 집을 보여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우연히 고고학자들은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수녀님이 이야기한 집이 자신들이 발굴한 성모님의 집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려서 아팠고,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던 수녀님은 에페소에 성모님의 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에페소에는 성모님의 집이 복원되었고, 사람들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성모님의 집을 순례하였습니다. 이슬람에게도 성모님은 존경받는 분이기에 성모님의 집을 복원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니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기는 것처럼 성모님의 집을 찾는 순례자들이 많아지면서 신학자들도 성모님의 집에 대해서 연구하였습니다. 2000년 전 에페소는 바오로 사도가 열정을 기울여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페소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자유로운 도시였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요한 사도와 성모님을 따뜻하게 맞이했을 거라고 합니다. 몇 번의 지진이 있었고, 이슬람이 통치하면서 교회는 땅 속에 묻혔고, 성모님의 집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노력과 한 수녀님의 ‘환시’를 통해서 성모님의 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님의 집도 순례지로 인정하고 있으며 에페소에 있는 성모님의 집도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로 인정하였습니다. 교황님들도 성모님의 집을 방문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집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성모상’이 있습니다. 손이 없는 성모상입니다. 성모님의 손을 복원하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손을 내어준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손이 없는 성모상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저도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손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내어 주실 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교구 인사이동으로 저의 소임지가 정해지면 언제나 먼저 그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에 힘입어 저는 큰 어려움 없이 4개의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저는 어머니께 3년 동안 같이 지내자고 부탁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죄송했지만 어머니는 기꺼이 저와 3년을 지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도와 따뜻한 사랑이 있어서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마친 후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성모님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성모님과 요한 사도는 멀리 에페소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합니다.” 저는 자매님의 묵상을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모델입니다. 성모신심은 결코 독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모신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있습니다. 성모신심이 향하는 곳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모신심이 향하는 곳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모신심이 향하는 곳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성모님이 우리 신앙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었던 삶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 속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618. 연중 제11주일.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연중 11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 하느님 백성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 도착하고 난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게약체결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계약 체결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독점적인 수취자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사명과 함께 보편적 구원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민족을 당신께로 이끌게 될 것을 밝히십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의롭게 된 우리에 대한 증언입니다. 곧 그리스도 한 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고 모든 이가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군중을 위해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군중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길잃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파견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회개하여 새롭게 하느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 역시 단지 복음의 수취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 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엾은 마음”은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그런데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요?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이 아닐까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아픈 마음을 같이 지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미’는 그 마음을 가슴에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하오니,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시고,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된 신자의 행복한 삶
-성소, 친교, 선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깨어 눈만 열려 있으면 곳곳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성서안에서, 전례안에서, 공동체안에서, 자연안에서, 서로간의 대화안에서, 역사현실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니 모두가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대상이 됩니다. 성서를 읽으며 주님을 만나듯 일상을 통해서도 주님을 만납니다.
며칠전의 기사가 나라 공동체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에 대한 진단입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세상’이라 했고 ‘침몰하는 난파선’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귀기울여야 할 예언적 진단입니다.
“대전환이 필요한 때에 대환란이 닥쳤다. 실망하고 비관하여 관망하는 태도로는 위기를 돌파할 수도 복음의 원수를 몰아낼수도 없다. 깨어 기도하며 사방을 살피자.”
“대한민국은 압축성장에서 압축소멸로 치닫고 있다. 벼락발전에서 벼락소멸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적의 나라에서 인간이 만든 재앙의 나라로 돌변하고 있다. 나라를 살려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인간공동체로서 본질과 속성이 사라지고 삭막한 사막으로 바뀌고 있다. 위로는 국가의 공적인 보편적 역할이 실종되고 아래로는 시민들의 인간적 관계의 그물망이 해체되고 있다.
대한민국民國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물질과 땅만 남는 대한물국物國과 대한 토국土國도 막아야 한다. 개인이든 집안이든 나라든 안에서 스스로 망할 징조를 보인 다음에야 밖에서 망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외국에 침탈을 당한 것이 아니다. 즉 망국이 아닌 스스로 멸국의 길을 가고 있다. 지금 당장 나라를 살리는 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정신혁명과 인간혁명이 절실하다. 그 혁명을 싹틔우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난관을 극복해온 우리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럴수는 없다.”
예언자적 비분강개한 애국자요 열사의 외침처럼 들립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화급한 주제입니다. 모든 혁명의 기초는 내적혁명이요 영적혁명입니다. 우리로 하면 통절한 회개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주님을 향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늘 새롭게 우리 삶의 목표는, 삶의 방향은, 삶의 중심은, 삶의 의미는 세상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이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상실, 의미상실, 중심상실, 방향상실의 연옥같은 세상에서도 참된 신자의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정신건강, 영혼건강의 영약인 희망, 기쁨, 평화, 감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첫째, 성소와 응답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앞서 사람을 찾아 오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광야여정 여러분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들을 독수리 날개에 태워 데려왔듯이 우리도 알게모르게 당신 독수리 날개에 태워 지금 여기까지 데려다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통해 우리는 사제들의 나라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온세상의 주인이자 중심이신 하느님을 잊음이 재앙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백성을 대변한 중재자 모세를 통해 당신 백성에게 살길을, 응답을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하느님은 새모세인 예수님을 통해 열두 제자를 불러 주시어 사도로 삼아 사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새롭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장엄한 권고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화해에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소에 응답하여 화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과 친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자 형제들과의 만남이요 친교입니다. 파견과 선교에 앞선 충전시간이기도 합니다. 밖에서 사도의 선교사로 살기 전,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과의 관계를, 동료 형제들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기 전부터 주님은 제자 교육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할 바 이런 연민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 공부, 말씀 공부에 전념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당대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부단히 배우며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했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강조하셨듯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세 스타일을, 즉 친밀함, 연민의 마음, 부드러움을 배웁니다. 이제 제자들의 공부가 무르익어 파견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주님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파견을 준비하라는 말씀이 분명하니 다음 전개되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내 자신이 주님의 일꾼으로 충실히 일할 때 주님은 일꾼들을, 성소자들을 보내주십니다. 주님과 관상의 친교가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은 파견과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파견과 선교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존재이유가 선교입니다. 길잃은 양들 세상에 당신 열두 제자를 사도로 파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길잃은 양들입니다. 세상 곳곳에 차고 넘치는 길잃은 사람들입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잃고 살기에 죄도 병도 많은 세상에 차고 넘치는 괴물들과 폐인들입니다. 당대의 파견되는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은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4.마귀들을 쫓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오늘 복음의 요약이자 정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견되기전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치유되고 살아나고 온갖 영적나병들이 깨끗해지고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마귀들, 세속주의, 물신주의, 광신의 이념의 마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사실 영적으로 내적으로 위 4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죄인들이자 병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도 영적나병환자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도 하늘 나라의 실현이 되고, 이런 선교활동과 더불어 살림의 기적, 치유의 기적이요 우리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도 이루어집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선교의 대원칙입니다. 참으로 건강하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입니다. 저절로 따라오는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의 삶입니다. 오늘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랑의 실천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의 관상 은총이 선교 활동의 샘입니다. 참된 신자의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1.성소와 응답에 충실하십시오.
2.만남과 친교의 삶으로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깊이하십시오.
3.파견과 선교에 충실하십시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는 그날까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로 파견되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를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제자요 사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6/19(월)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거저 얻었기에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저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호구 취급을 받을지언정, 하늘나라에서는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정천 신부)
2.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었던 삶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 속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조재형 신부)
3.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하오니,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은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4.마귀들을 쫓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오늘 복음의 요약이자 정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견되기전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치유되고 살아나고 온갖 영적나병들이 깨끗해지고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마귀들, 세속주의, 물신주의, 광신의 이념의 마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이수철 신부)
[6/19(월)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제 177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거저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호구 취급을 받을지언정,
하늘나라에서는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을 믿나이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마귀들, 세속주의, 물신주의, 광신의 이념의 마귀들을 쫓아내게 하소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6월19일(월) 7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