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6월 21일 수요일[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6월 21일 수요일[(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주님의 산에 오르고, 그 거룩한 곳에 서리라.
본기도
복된 알로이시오가 놀라운 정결과 참회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그의 공덕과 전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 정결과 참회의 정신을 충실히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9,6ㄴ-11
형제 여러분, 6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7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9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10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11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
○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5,1-5)와 복음(마태 22,34-40)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저희가 복된 알로이시오를 본받아
언제나 깨끗한 예복을 입고 천상 잔치에 참여하여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사의 양식을 받아 먹었으니
깨끗한 삶으로 주님을 받들어 섬기며
오늘 공경하는 복된 알로이시오를 본받아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성지순례는 은총이 열매 맺는데 기도하지 않는 성지순례는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하면 불평할 것들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도하면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로 격려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작은 들꽃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단체로 이동하기에 시간 약속이 중요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모두들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출발시간 전에 버스에 앉아 계시는 순례자들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먼저 기도로 순례를 시작합니다. ‘아침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부부를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소를 위한 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를 함께합니다. 순례를 마치면서 ‘저녁기도,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 삼종기도’를 바치고 사제의 강복을 받습니다. 혼자 하는 기도는 자칫 소홀할 수 있고, 건너 뛸 때도 있는데 함께 하니 순례가 더욱 풍요로워 집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순례는 감사와 찬미의 순례가 됩니다.
평화신문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곤 합니다. 어떤 분은 고인이 된 아들을 추모하면서 신학교에 아들에게 줄 유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평생 폐휴지를 모아서 마련한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을 통해서 전해지는 사연을 읽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만 전염력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나눔도 분명 전파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공동체의 헌금과 교무금으로 운영됩니다. 공동체의 기부와 자선은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지면을 통해서 어려운 이웃을 소개하는 것은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받아서 좋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주니까 좋습니다. 본당에서 볼리비아 선교를 위한 기금 마련 골프대회를 하였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선교를 위한 나눔을 하니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자선은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기도와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마귀는 어느새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 나눔으로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나누어주신 것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되로 주면 말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넘치게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자선’에 대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자선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 생색내는 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을 경계하십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중용 23장은 이러한 삶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내적 인간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그만 아내가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까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 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하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혼자 다니는 것이 익숙해진 2년 후 버스운전기사가 이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를 하였습니다.
“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남편은 외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혼자 남겨질 아내를 위해
아내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모자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적으로 만족하면 사람들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요즘 보니까 카카오 스토리에 부모님과 함께 한 사진을 많이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만 보고 “신부님은 효자세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진짜 효자라면 그런 말을 유도할 사진들을 올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작은 형과 길을 걷고 있을 때 매우 비싼 옷에 반지, 목걸이,
그리고 화장까지 진하게 하고 턱을 들고 걸어가는 아주머니를 보고,
“저 아줌마, 왜 저래?”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아이였던 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 속이 비어서 그래!”
그렇습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더 잘나 보이려고 하고,
가난이 부끄러운 사람은 더 부자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보이려는 행동들은
대부분 내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란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는 가난한 집과 청력 장애와 도박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못 배우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공부도 못해서 삼수를 해, 이름도 없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는 많은 노력 끝에 본인이 원하던
성악을 하게 되었고 유명 강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등감은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졸업 후에도 대학 교수님께
성악 지도를 받았는데, 큰 회사들에 가서 수천 명 앞에서 강의하고 온 것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참 잘하고 있구나... 그런데 네가 흘러야 돼!”
그렇습니다. 여전히 열등감을 극복 못하고 있기에, 흐르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기에,
그렇게 외적인 것으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적으로 부족하면 외적으로라도, 하느님에게가 아니면 사람에게라도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내가 외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내적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선행도, 기도도, 단식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분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키 높이 깔창을 넣은 구두에서 깔창을 뜯어냈습니다.
키는 더 작게 보일지언정 마음은 편했습니다.
누구를 속이고 있다는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따라서 밖을 향하면 곧 그분을 볼 수 없고 잊어버리게 됩니다.
뱀을 보면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내적인 것 아니면 외적인 것 둘 중의
하나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만족을 원하든지, 사람들이 주는
칭찬이나 인정을 원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만 집중할 수 있을 때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또 집착으로부터 오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적 인간이 됩시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620.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사랑의 여정
-평생과제-
“사랑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이 사랑의 여정입니다. 삶은 선물이요 평생과제가 사랑입니다. 영적성장과 성숙도 결국 사랑의 성장이자 성숙입니다. 외적성장은 멈춰도 내적 사랑의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수도원의 아름다운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하늘길 가로수들이 상징하는바 내적성장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 역시 은총이자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요 평생 사랑의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평생 사랑을 강조하며 수십년간 매일 강론 해온대로 살았다면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깨달음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
오늘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6번째 마지막 대당명제의 결론이자 6개 대당명제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를 살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 바로 평생학인이 되어 완전한 사람되는 사랑 공부가 우리의 평생공부요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완전한(perfect)은 온전한(whole)을 뜻합니다.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이요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온전함은 원숙(圓熟)함과 원만(圓滿)함과 통합니다. 가을되어 익은 둥근 열매들을 보면 둥글 ‘원(圓)’자를 실감합니다. 바로 “둥근 삶, 둥근 마음” 바로 제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둥근 사랑”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도 익어 갈 때 둥근 사랑일 것입니다. ‘원숙(圓熟)’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가을 열매는 태양의 자식들
호박, 배...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느님 사랑 닮아, 성체를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10.
무려 25년전 여기 배밭수도원에서 쓴글입니다. ‘배밭’하니 ‘별밭’이라는 어제 쓴시도 생각납니다. 초록빛 하늘 배나무에 달린 흰봉지의 배열매들이 꼭 흰별들처럼 생각되어 쓴 시입니다.
“날마다
별밭사이
흰별들 사이 초록빛 하늘길을 걸을 때마다
기쁨 가득
충만한 행복이다
가을 열매익어
흰별들 배열매 딸때까지 계속될 거다
이 설렘,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날마다”-
정말 배밭이자 별밭을 산책할 때의 마음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모나게 살았지만 너희들은 둥글게 살라” 하시며 많은 제자들의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어 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 원숙한 사랑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복음 앞부분에 상세하게 밝혀줍니다. 바로 대자대비하신 공평무사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들도 하지 않느냐?”
원수를 사랑하여라, 맞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마음,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이처럼 높습니다. 내눈에 원수지 타인엔, 하느님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도 피치 못할 원인이,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우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기적 심리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당장 저부터 실천해야 할 것이 낯선 피정자들을 봐도 소 닭보듯, 개 닭보듯 할 것이 아니라 상냥하게 웃으며 목례하고 다정한 인사말 던져야 하겠다는 반성을 합니다. 사랑의 침묵이자 사랑의 말과 표정입니다. 유유상종의 배타적 사랑을 한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에 각별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선택과 훈련, 습관의 최우선 대상이 이런 대자대비의 사랑공부요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하느님 사랑의 화신인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아, 바로 예수님의 사랑 은총이 우리의 작은 사랑을 격려합니다. 이웃 원수사랑과 더불어 우리 하느님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늘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예수님을 치열하게 가열차게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님은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아가페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바로 이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 마음,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원수사랑도, 공평무사한 보편적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자주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삶은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습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사랑의 수행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평생 해야할 평생공부가, 평생과제가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늘 초보자요 날마다 용기를 내어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날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사랑이요 이 거룩한 미사가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시고, 사랑의 수행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자,
새로움이요 놀라움입니다.
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6/21(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자선’에 대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자선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 생색내는 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을 경계하십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조재형 신부)
2. 내적으로 부족하면 외적으로라도, 하느님에게가 아니면 사람에게라도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내가 외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내적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선행도, 기도도, 단식도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적인 것 아니면 외적인 것 둘 중의 하나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만족을 원하든지, 사람들이 주는
칭찬이나 인정을 원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원수를 사랑하여라, 맞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마음,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이처럼 높습니다. 내눈에 원수지 타인엔, 하느님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도 피치 못할 원인이,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우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기적 심리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당장 저부터 실천해야 할 것이 낯선 피정자들을 봐도 소 닭보듯, 개 닭보듯 할 것이 아니라 상냥하게 웃으며 목례하고 다정한 인사말 던져야 하겠다는 반성을 합니다. 사랑의 침묵이자 사랑의 말과 표정입니다. 유유상종의 배타적 사랑을 한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이수철 신부)
[6/21(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제 179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에게만 인정 받게 하소서.
선행도, 기도도, 단식도 오직 하느님만 알게 하소서.
외적이 아닌 내적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원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6월21일(수) 4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