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6월 26일 월요일[(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6월 26일 월요일[(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2,1-9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10,11.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6월 26일 월요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 가운데 으뜸이자 특별히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획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바로 그 시작의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으로 개명되기 전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하란에 정착하여 오랜 기간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재물과 가축 수도 그곳에서 많이 늘었을 것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렇게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정착 생활에서 벗어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신앙생활은 정착 생활이 아니라 방랑 생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정된 삶은 그 안락함 속에 우리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법을 점점 잊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선조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그분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방랑길에 늘 함께하실 하느님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역동적인 신앙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어느 한곳에만 계속 머무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여 봅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산보를 하면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분들을 봅니다. 대부분의 개들은 목줄이 있습니다. 주인은 목줄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목줄이 개를 구속하는 것 같지만 목줄은 개와 주인을 연결시켜주는 도구입니다. 목줄은 지나가는 사람을 개에게서 안전하게 해 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목줄은 개가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목줄은 다른 위험으로부터 개를 보호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개들은 목줄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목줄이 주인과 연결시켜주는 도구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주인이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목줄은 개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개의 목줄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하늘을 나는 연을 연결시켜주는 연줄입니다. 연줄은 연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줄은 연이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집니다. 연은 스스로 바람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에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봅니다. 컴퓨터,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청소기는 모두 전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일지라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무선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주파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혈관이 있어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혈관에 이상이 생기면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군대는 계급이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사는 직책이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제도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은 이제 ‘신앙’이라는 줄로 연결되었습니다. 신앙의 줄이 연결되어 있으면 고난이 다가와도,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편 23장은 신앙의 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끌어 주시네. 내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라.” 아브라함은 조건 없는 믿음으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사악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제물로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을 칭찬하시고 ‘땅과 후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신앙의 줄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줄을 약하게 하는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남을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판과 험담은 주로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한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내 신앙의 줄은 하느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1953년 7월 23일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이 됩니다. 분단은 길어지고 그 아픔이 깊어만 갑니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의 열망도 깊어만 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참 평화’를 위하여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셨고, 우리를 평화이 일꾼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하셨으니, 참된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우선,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음을 모아”(마태 18,19)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하라.”(마태 18,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 이 땅 한반도에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고,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됩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며, 지난 2015년 이래로 매일 밤 9시에 주모경을 바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7일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를 해 왔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처럼,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는 꼭 남북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같은 공동체 식구끼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합니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합니다.
또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주님!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공존-
오늘 2023년 6월25일은 연중 제12주일이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해 저는 2살이었기에 기억은 못합니다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전쟁후 50년대 힘들고 가난했던 생활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원수가 되어 완전히 갈린지 73년입니다. 예전 한때 애절히 불렀던,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남북동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나라 살리는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니 6.25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었고 단 하나, 부산-경남 지역 신문에 나온 <“한국전쟁 73년, 이젠 평화를”... 25일 곳곳서 미사, 기도회, 답사>란 기사만 구석에 작게 나와 있었습니다. 이젠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6.25 한국전쟁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의 전쟁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자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평화입니다. 결코 꿈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민족통일, 남북통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에 앞서 평화입니다.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어느 학자의 지극한 이성적, 합리적 글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분단과 적대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이다. 독재를 겪지 않은 청년들에게 세습독재와의 통일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과 조선의 평화공존은 통일의 포기가 아니라 유예다. 독립공존을 거친 평화세대에 의해 통일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이 목적이 되면 언젠가는 한국전쟁처럼 통일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
통일 대신 평화가 목적이 됐을 때 끝내 통일폭력을 넘어 평화공존을 구가할 수 있다. 한국전쟁 73년, 한국과 조선은 이제 국가대 국가로서 보편의 지평에서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침내 항구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박명림)
그렇습니다. 통일이 아니라,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평화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산상설교에도 명시적으로 진복팔단의 참행복중 하나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또 우리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2,14)라고!
정말 남북통일이나 남북평화에 우선되야 할 것은 남남통일, 남남평화입니다. 우리 남한의 한국은 얼마나 내부적으로 산산히 분열되어 있는지요! 치열한 내전상태를 연상케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까닭이나 사연들로 죽어가고 있는지요! 지금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통일이, 화해와 일치가,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델이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본원 숙소 명칭은 “자비의 집”, 자매들 개인 피정집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또 수많이 분들이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어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분이 전송해준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평화와 쉼, 아름다운 성가로, 기도로 이루어진 자연에 가까운 요셉수도원! 몇 년전에 한 무리로 다녔던 이름도 예뻤던 개들! 기도와 일! 인생 참 단순하네요(행동과 최고가치의 동행). 수사님과의 면담, 남편의 외도,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0년동안 살면서.
수사님의 끊임없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갈망들... 수사님의 답변,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서 향기가 나면 남편을 저절로 돌아올겁니다.”인생 달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사님이 계셔서. 또한 우리에게 평화의 집을 허락해 주셔서. 건강하시고 시간들이 기쁨, 행복 가득하기를 아멘!!’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 향기가 나면 남편은 저절로 돌아온다’, 제가 언제 이렇게 멋진 말을 했는가, "인생 달인" 이라니, 감격했습니다. 무명의 아름다운 메시지에 감동하여 ‘진선미’라 작명하여 저장해 뒀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수도공동체 분위기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어느 화가 자매의 요즘 동향도 인상적이라 주고 받은 글도 나눕니다.
“저는 요즘 ‘사랑의 찬미’라는 주제로 돌고래 소재를 그리고 있어요.”
“기막힌 착상이 참 좋습니다. ‘사랑의 찬미’ 역시 참 좋은 하늘에 보물 쌓기입니다. 한결같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남북의 평화공존을, 또 내 가까이서부터 평화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으니 기도와 사랑, 그리고 경청입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 역시 참 좋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리고 ‘간절하고 항구하게’가 기도의 원리입니다. 홀로의 개인기도도 좋지만 마음이 하나된 함께의 공동기도는 더욱 좋습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두명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고맙고, 미사경문중 제가 특히 사랑하는 대목입니다. “주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기도문의 위치도 절묘하게 주님의 기도와 성체를 모시는 영성체 사이에 나옵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입니다.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사랑하면 행복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자 말씀입니다. 결코 무지도 허무도 욕망도 아닙니다. 그러니 평생 말씀을,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할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이 사랑공부 소홀로 급기야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 폐인이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은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우선 말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선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다음엔 용서의 사랑입니다. 용서야 말로 신적 사랑,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내가 살기위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숨쉬듯이, 밥먹듯이 지칠줄 모르는 용서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점에서는 바오로 사도 역시 일치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받았기에 용서입니다. 새삼 사랑의 용서도 은총임과 동시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셋째, 경청하십시오.
사랑의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의 사랑입니다. 귀기울여 듣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 역시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경청의 선택, 경청의 훈련, 경청의 습관,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격동시킵니다.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돌려 주실 것이다.”
강조되는 바, “오늘”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이라는 말마디요 운명을 바꿔주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곡선으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참으로 사랑의 경청,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에 시종여일始終如一할 때 우리의 운명도 바뀔 것이요, 굽어진 곡선 인생도 똑바로 펼쳐질 것입니다. 마침 게시판에 붙은 시편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옳거니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나이다.”(시편34,6)
오늘 주님은 고맙게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공존을 위한 길을,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경청하십시오.
기도도 사랑도 경청도, 참 좋은 은총이자 거룩한 선택이요. 거룩한 훈련이자 거룩한 습관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6/26(월)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신앙생활은 정착 생활이 아니라 방랑 생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정된 삶은 그 안락함 속에 우리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법을 점점 잊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선조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그분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방랑길에 늘 함께하실 하느님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정천 신부)
2. 아브라함은 조건 없는 믿음으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사악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제물로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을 칭찬하시고 ‘땅과 후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신앙의 줄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줄을 약하게 하는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남을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판과 험담은 주로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한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내 신앙의 줄은 하느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합니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합니다.
또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주님!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 (이영근 신부)
4. 제1독서 에페소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우선 말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선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이수철 신부)
[6/26(월)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84 기도일]
하느님!
저와 언제나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저를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놓으시는 야훼이레 하느님!
하느님을 믿고, 그 뜻에 따르며, 그 뜻을 실행하게 하소서.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게 그 뜻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6월26일(월) 6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