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7월 4일 화요일[(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7. 4. 08:04

[매묵]2023년 7월 4일 화요일[(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입당송

시편 47(46),2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9,15-29
그 무렵 15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며 말하였다.
“자, 소돔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16 그런데도 롯이 망설이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17 그들은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18 그러나 롯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리,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19 이 종이 나리 눈에 들어, 나리께서는 이제껏 저에게 하신 것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20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제발 그리로 달아나게 해 주십시오. 자그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
21 그러자 그가 롯에게 말하였다. “좋소. 내가 이번에도 그대의 얼굴을 보아
그대가 말하는 저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겠소. 22 서둘러 그곳으로 달아나시오.
그대가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내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리하여 그 성읍을 초아르라 하였다.
23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올랐다.
24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25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27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29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6(25),2-3.9-10.11-12(◎ 3ㄱ 참조)
◎ 주님, 당신 자애가 제 눈앞에 있나이다.
○ 주님, 저를 시험하고 살피시며, 제 속과 마음 달궈 보소서. 정녕 당신 자애가 제 눈앞에 있어, 저는 당신 진실에 따라 걸어왔나이다. ◎
○ 제 영혼 죄인들과 함께, 제 생명 살인자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그들의 손에는 부정이,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이 넘치나이다. ◎
○ 저만은 결백하게 살아가오니, 저를 구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제 발은 올바른 길에 서 있나이다. 거룩한 모임에서 주님 찬미하오리다. ◎

복음 환호송

시편 130(129),5 참조
◎ 알렐루야.
○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에게 구원을 베푸시니
이 성찬례가
하느님께 올리는 합당한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03(102),1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또는>
요한 17,20-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순례 중에 가이드로부터 비잔티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잔티움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입니다. 로마의 박해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얻었던 교회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교회에 자유를 준 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옮기면서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때 세워진 교회가 성 소피아 성당입니다. 가이드는 비잔티움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스에 비자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신탁을 받았는데 신탁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눈 먼 이들이 사는 마을의 건너편으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면 된다,’ 비자는 눈 먼 이들의 마을을 찾아 다녔지만 어려웠습니다. 함께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불평과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도착했는데 건너편의 동네가 훨씬 살기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때 비자는 깨달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건너편 마을이 훨씬 살기 좋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그리고 비자는 건너편 마을로 가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비자가 세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비잔티움이라는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눈으로, 계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찾는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눈 먼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던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서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던 것은 롯입니다.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지만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러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빛바랜 교회의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새로운 비잔티움을 찾으려 했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눈 먼 이들의 도시를 떠나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나섰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복음의 기쁨으로 이코니아에, 안티오키아에, 스미느라에, 에페소에, 필립비에, 테살로니카에, 고린토에, 아테네에, 로마에 새로운 비잔티움을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내가 비잔티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방주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2. 2023년 07월 04일 화요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허규 베네딕토 신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릅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배라는 배경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다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거나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와는 달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다른 말로 하자면 자연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지만 이 사건의 반응에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짧은 이야기이지만 제자들이 겪은 일과 사람들의 반응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은 이 일을 듣고 바람과 호수도 예수님께 복종한다는 것에 놀라워합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갈릴래아 호수에는 가끔 큰 풍랑이 일어 배를 띄우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풍랑이라는 낱말은 다른 곳에서 지진으로 옮기기도 합니다(24,7 참조).

그 원인은 서로 다르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호수가 물결치고 땅에 진동이 이는 것을 같은 말로 표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은 모두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주님구해 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 대화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배는 자주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는그것을 굳건하게 믿는 공동체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토마스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자리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뵌 주님을 자신은 뵙지 못한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뵙기를 더더욱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 더 확인하고 싶었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가 보게 된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는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는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그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그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보고 인식한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안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보고도, 특히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것도 역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교회 공동체-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1.

 

2년전부터 제 집무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귀입니다. 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도 참 많습니다. 하느님이 참 좋은 선물이 공동체요 공동체를 통해 받는 축복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배우는 겸손입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하나도 ‘신의 한 수’와 같은 선물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제 행복기도문중 일부입니다. 선물이란 깨달음과 동시에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선물중의 선물이 공동체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부단히 배우면서 참나를 형성해 갑니다. 공동체내에서 상처도 받지만 공동체로부터 받는 위로와 치유, 축복의 구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제 마침 구입했던 개신교 저명한 목사인 이정배 교수의 “스승의 손사래”라는 책을 독료했습니다. 신학 50년 여정에서 만난 선생님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으로 얼마나 많은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복된 존재인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훌륭한 스승들과의 만남의 부족을 간접적으로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스승들을 만남으로 보완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고의 스승은 주 예수님이요 여기 공동체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도 참 다양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했다는 교회 전승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토마스가 있기에 얼마나 역동적인 주님의 제자 교회 공동체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토마스인지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일주전 전례모임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고백에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의 답변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인지, 바로 이것이 토마스의 장점입니다. 토마스 덕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서의 공동전례 모임시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변하여 문이 된 기적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중심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다해도 평화가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아무도 앗아갈 수 없고 빼앗아 올 수도 없고 거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주님께로부터 받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이요 우리가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주님의 평화뿐입니다. 

 

이어지는 토마스의 고백과 주님의 답변을 통해 제자들은 크게 배우니 그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에 참석할 때 마다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처럼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 귀한 고백을 배우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평생 지니고 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런 믿음과 더불어 평화의 축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런 분위기에서 쓰는 강론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살아 활동하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지체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그대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체험입니다. 공동체 하나하나의 형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 얼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주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인 교회 공동체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혈연을 뛰어넘어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회 성원들이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고맙고 영예로운 축복도 없습니다. 광야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멋진 고백을 통해 교회의 참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살아있는 교회공동체요 끊임없이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교회공동체, 그대로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교회공동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지요!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공동체요 하느님의 거처로 성장, 성숙 중인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생활 자체가 파스카 주님의 체험이요 하느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밖에서가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에서 만나야할 주님이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를, 교회 공동전례를 사랑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평화를 선사하시어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십니다. 아멘.

 

*AMEN(아멘)이란 뜻풀이를 소개합니다.

 Agree with God(하느님 말씀에 동의하고)

 Move with God(하느님과 함께 움직이고)

 End with God(하느님과 함께 끝내고)

 Never doubt God(하느님을 결코 의심하지 마라)  AMEN!


[7/4(화)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되새김구절]

 

1.  신앙생활의 목적은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내가 비잔티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방주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조재형 신부)

 

2. 주님구해 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 대화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강조합니다.(허규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AMEN(아멘)이란 뜻풀이를 소개합니다.

 Agree with God(하느님 말씀에 동의하고)

 Move with God(하느님과 함께 움직이고)

 End with God(하느님과 함께 끝내고)

 Never doubt God(하느님을 결코 의심하지 마라)  AMEN!(이수철 신부)

 

[7/4(화)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192일 기도]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늘상...AMEN!

 Agree-Move- End with God-  Never doubt God!

하느님과 함께 동의하고-움직이고-끝내고-의심않게 하소서.

아멘! 하게 하소서.

 

- 2023년 7월4일(화)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