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7월 21일 금요일[(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7월 21일 금요일[(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본기도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11,10─12,14
그 무렵 10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12,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9 그것을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
○ 주님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 강론
2023년 가해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영원한 안식을 누릴 이들은 이 세상부터 안식을 누린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에게 들켜 비난 당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시며,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고도 하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이 명확하게 안식일을 어기고 도둑질까지 하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실까요? 또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심선미 씨는 무당이었다가 하느님을 만나 회개한 사람입니다. 몸이 갑자기 아프고 자신 안에 신들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때 신내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신들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들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학대하였으며 그녀는 결국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배를 탔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반면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는 100달러(약 12만 원)와 고물 트럭 한 대만 가지고 90일 안에 100만 달러(약 12억 원)의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챌린지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서 막 일부터 시작하고 그것으로 축제 때 풍선을 팔고 그것으로 중고 자동차를 수리해서 팔고 그다음은 집을 사서 수리해서 팔아 그 이익 1억 원 정도로 언더독이라는 바비큐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그 마을에 커다란 바비큐 행사가 있다는 것을 기회로 잡아 1등을 하여 상표 가치를 높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게 평가액은 75만 달러였습니다. 어쨌든 10만 원으로 석 달 만에 10억을 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석 달 동안 월급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는 이들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왠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글렌 스턴스라는 사람이 매우 친절하고 자신들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확신에 찬 그의 행보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잡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심선미 씨 마음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글렌 스턴스는 자신을 따르는 1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돈도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키지만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꼭 이 사업을 이뤄낼 수 있고 결국엔 그들을 행복하게 할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전이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안식 안에 머무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배를 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립니다. 이것이 참 안식처를 찾는 방식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배에 절대 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하느님 창조 사업에 뛰어든 이는 이미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 있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군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책임이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나라를 선택한 것은 본인 책임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나라 안에서는 그런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 창조 사업에 뛰어든 이들은 이미 피 흘림, 곧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갈라 2,19-20 참조).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4,9-10) 우리가 참 안식으로 가고 있음은 믿음으로 느끼는 평화의 감정으로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2023년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성지순례가 끝났습니다. 4월에는 요르단 이스라엘, 5월에는 그리스 터키 그리고 6월에는 이탈리아엘 다녀왔습니다. 이탈리아 순례는 제가 3년 동안 주일 미사를 도와주는 부르클린 성당 공동체와 함께 했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함께한 순례자들 이름을 처음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이번에 종신부제품을 받은 리차드 부제와 아내 세라피나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 다니엘과 브라이언 그리고 엄마 프란체스카, 가브리엘과 라파엘 그리고 엄마 보나, 요한과 바오로 그리고 엄마 요세피나가 있습니다. 모녀가 온 프란체스카와 나오미가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한 마르꼬와 수산나, 마태오와 수산나, 요셉과 벨라데따, 프란치스코와 안나, 요한과 아녜스, 유스티노와 비아가 있습니다. 혼자오신 스텔라, 헬레나, 페트리시아, 세실리아, 레지나, 율리안나, 안나, 마리아, 카밀라가 있습니다. LA에서 합류한 프란치스코와 프란체스카 부부가 있고, 코네티컷에서 합류한 마틸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부른 경우가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부르신 제자 12명이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요한, 토마, 바로톨로메오, 시몬, 유다, 가리옷 유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필립보, 마태오”가 있습니다. 비록 가리옷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상의 순례를 마쳤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던 자캐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캐오에게 "이 집은 구원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던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마리아는 '라뽀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물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새겼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성지순례는 오래된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높은 절벽에 있는 수도원을 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성물을 사고,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 또한 성인들을 모범을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을 갔어도 삶의 태도가 변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번도 가지 못했어도 이미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오늘 예수님께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을 합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으로만 안식일을 바라보면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세상의 것을 떠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맞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가 바랑을 지고 다니듯, 바랑이 없는 거지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짐’을 져야 하듯, 오늘도 우리는 삶을 ‘짐’으로 지고 살아갑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고, 수도자로서 스스로 짊어진 ‘짐’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자녀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가족으로서 함께 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질병과 육신, 상처와 나약함, 분노와 원망을 ‘짐’으로 지고 가기도 합니다. 형제를 ‘짐’으로 지고 가고, 세상을 ‘짐’ 지고 가며, 자기 자신을 ‘짐’으로 지고 갑니다.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짐’이 있고, 부당하게 떠맡겨지는 ‘짐’도 있고, 피하고 싶은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짐’을 떠맡기도 하며, 함께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생명을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살면서는 죽음을 ‘짐’으로 짊어지고 죽어갑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그런데 나의 몸에서, 나의 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도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니, 그 ‘짐’을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짐’을 지고서야 가실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코, 그 ‘짐’을 지지 않고는 가야할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도록 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사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짐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오히려 ‘짐’으로 하여, 우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가는 까닭입니다. 정녕 ‘짐’을 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짐’이 없이는 가지를 못하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짐’은 우리를 북돋아주고 도와주는 은총입니다. 그 ‘짐’은 저를 구원으로 이끄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몸소 우리의 ‘짐’마저 짊어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짊어진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서 제가 갈 길을 사랑으로 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30720. 연중 제15주일 목요일.
주님은 ‘영원한 안식처’이시다
-정주와 환대-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바티칸에서 일하는 분들의 자녀들중 5세에서부터 13세까지 250명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서 교황님과 아이들이 주고 받은 대화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대를 초월하여 80대 후반의 할아버지 교황님이 10대 전후반 아이들과의 기탄없는 대화가 참 경이로웠습니다.
“교황님의 슈퍼 영웅(superheroes)은 누구입니까?”
한 아이의 질문에 대한 교황님의 답입니다.
“조부모가 나의 슈퍼영웅이다. 나는 그분들의 지혜를 생각한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의 좋은 영향력은 아이들의 밑거름이 되어 노년에까지 큰 성장 동력이 됨을 봅니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이 없다는 세상에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열정의 교황님입니다. 어른하면 생각나는 바 든든한 배경의 산같은 분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여기서 산은 제가 35년 동안 정주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다 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불암산은 제 정주와 환대의 스승인 주님을 상징합니다. 요셉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직결된 환대영성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하여 면담성사를 본 착한 자매와의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의 청담淸談도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늘 멋지고 품위있게 사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마가렛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라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신부님, 계시는 존재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참 좋습니다. 꽃말이 너무 이쁩니다.”
“단아端雅하기가 자매님을 닮은 마가렛꽃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런 향기로운 청담은 주고 받는 모두에게 사랑의 자양분이 됩니다. 어제 산책중 처음 발견한 마가렛꽃이 참 반가웠습니다. 꼭 1년을 기다렸다가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거기 그 자리에 다시 피어난 정주와 환대의 청초한 보라색 마가렛꽃을 보니 수차례 인용했던 ‘환대는 꽃처럼’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반가이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구나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무려 23년전 여기 요셉수도원에서의 시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꽃들이 상징하는 바 정주와 환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삶의 중심 자리에 정주하시면서 마음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집인 정주의 요셉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 되고,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축복,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습니다. 사랑의 초대에 이어 사랑의 환대입니다. 반면 무시와 냉대의 아픔은 얼마나 길게 지속되는 지요! 주님이야말로 끝없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며 환대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초대와 환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시 참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차별없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안식의 품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환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요셉 수도원입니다. 대부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생존에 허덕이는 광야 여정중의 참 측은하고 가엾은, 영육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다.”
그러나 값싼 은총은, 안식은 없습니다. 부단한 선택과 훈련, 습관화없이는 은총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도 없습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이기에 평생공부는 필수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멍에를 메고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불편한 내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무거운 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변합니다. 값싼 은총, 값싼 평화, 값싼 자유, 값싼 안식은 결코 없습니다. 100% 주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 했습니다.
참으로 평생학인이 되어 부단히 치열히 온유를, 겸손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된 안식에 참된 평화에 참된 자유입니다. 이래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고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탈출기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이 너무 닮았습니다. 어제 봤다 시피 두분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예수님의 예표로 손색이 없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광야여정의 수련중 단련되어 황금같이 단단하고 순수로 빛나는 모세를 찾아 오신 하느님을 환대하여 긴밀한 기도의 대화를 나누는 참으로 진지하고 침착하며 열정많은 모세입니다. 모세를 환대하는 주님이요 주님을 환대하는 모세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시고 흉금을 열고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밝히십니다. 얼마나 모세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주님이신지요! 주님과의 이런 깊은 친교의 만남이 주님과 관계를 한없이 깊이 했을 것이며 모세에겐 내적 힘과 안식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닮아 겸손과 지혜, 신뢰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을 모세입니다.
바로 여기서 계시되는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로 계시되는 하느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I AM sent me to you)
영어로 쓰면 분명히 드러나는 “I AM(있는 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I AM with us)”, “우리를 위해 있는 하느님(I AM for us)”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하느님 이름인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바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늘 우리를 위해 계신,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하고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7/20(금)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전삼용 신부)
2.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맞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I AM(있는 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I AM with us)”, “우리를 위해 있는 하느님(I AM for us)”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하느님 이름인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바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늘 우리를 위해 계신,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님이십니다.(이수철 신부)
[7/20(금)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제 209일 기도]
임마누엘 하느님! 야훼이레 하느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을 명심하게 하소서.
사람을 분별 단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7월21일(금) 7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