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8월 9일 수요일[(녹) 연중 제18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9일 수요일[(녹) 연중 제18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본기도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13,1-2.25―14,1.26-30.34-35
그 무렵 주님께서 파란 광야에 있는 1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사람들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게 하여라. 각 지파에서 모두 수장을 한 사람씩 보내야 한다.”
25 그들은 사십 일 만에 그 땅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26 그들은 파란 광야 카데스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왔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과 온 공동체에게 그 땅의 과일을 보여 주면서 보고하였다.
27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
28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
29 아말렉족은 네겝 땅에 살고,
히타이트족과 여부스족과 아모리족은 산악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족은 바닷가와 요르단 강 가에 살고 있습니다.”
30 칼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말하였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31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면서,
32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기들이 정찰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33 우리는 또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
아낙의 자손들은 바로 이 나필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14,1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7 “이 악한 공동체가 언제까지 나에게 투덜거릴 것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28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29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30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4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그제야 너희는 나를 멀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35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러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에게
나는 기어이 이렇게 하고야 말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 조상들처럼 저희도 죄를 지었나이다. 불의를 저지르고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저희 조상들은 이집트에서, 당신의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
○ 그분의 업적을 어느새 잊어, 그분의 분부를 따르지 않았네. 사막에서 그들은 탐욕을 부리고, 광야에서 하느님을 시험하였네. ◎
○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
○ 당신이 뽑은 사람 모세가 아니라면, 그들을 없애 버리겠다 생각하셨네. 모세는 분노하시는 그분 앞을 막아서서, 파멸의 진노를 돌리려 하였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1-28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인 제물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
<또는>
요한 6,3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 모임에서 ‘Mission Statement(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답을 들으면서 ‘신앙 강좌 기획팀’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풋볼을 너무 좋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신앙보다는 풋볼이 더 좋았던 형제님이었습니다. 신앙 이야기는 30분도 힘들었는데, 풋볼 이야기는 5시간을 해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이 완전히 바닥을 쳤고, 건강하던 몸도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이 모두 신앙에 관련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형제님을 준비시켰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련과 고난이라는 가시못이 빠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의 성구로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이 마음에 품은 성구는 필립비서의 내용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풋볼도, 재산도, 건강도 예수님을 아는 확고한 가치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9시간이 넘는 거리를 기쁘게 운전하면서 왔습니다. 형제님의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지나친 것 같아도 이해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같이 타오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걱정하였습니다.
한 자매님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으로 직장 생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한 수도회의 영성을 알게 되었고, 그 영성에 따라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수도회의 영성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고민할 문제이고, 평신도는 그저 따라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인을 보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몇 사람과 함께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있는 신앙인들에게 영상을 통해서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꿈과 열정은 좋았지만 평신도들만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도신부님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합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에 저를 알게 되었고, ‘가톨릭평화신문 신앙 강좌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이 정한 성구는 고린토 후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평화신문과 함께 하면서 주변의 오해도 풀렸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때에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사람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영상을 편집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회계 업무가 늘어났는데 하느님께서는 회계 업무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셨음을 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이집트의 군대에 비하면 절대로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을 아시고 40년을 더 광야에서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풍랑의 시간에도, 박해의 칼날에도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 2. 연중 제 18주간 수요일 - 그러나 / 김찬선 신부님 ~
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바다의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또 <욥기>에서도 하느님을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로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시며 야훼 하느님께서 현현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돛을 올리고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요,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너라!”(마태 14,29)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저 없이 안전한 배에서 내려 파도가 이는 물 위를 걸어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떠받쳐주던 물이 이제는 그를 삼켜버리는 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전한 배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구명대를 던져달라고도 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은 들어 다시 주님이신 예수님께 향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1,26)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1,31)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그러기에,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풍랑이 이는 길을 떠나야 하고,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순종함으로써 신앙의 도약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복종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하느님 중심의 삶
-기도와 회개, 믿음과 겸손, 자비와 지혜-
“선택, 훈련, 습관”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포르트칼 리스본에서의 제37차 세계 젊은이 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후 로마로 귀국중 기내에서의 회견 기사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Lisbon WYD was a “beautiful”experience’(리스본에서의 세계 젊은이 날 행사는 아름다운 체험이었다)
문득 30여년전 강론시 세수대야 바닥의 영문 글씨를 보고 강론에 인용했던 신선한 말마디, “Life is beautiful(인생은 아름다워라)”이었습니다. 이어 생각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명시,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과연 인생 끝나는 날, 인생 아름다웠다고 고백할 자 몇이나 될런지요? 리스본에서의 교황님 강론중 떠오른 말마디 하나도 생각납니다. “기쁨은 선교다. 기쁨은 훈련(training)을 필요로 한다.” 요즘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영적 삶의 구조, “선택-훈련-습관”이란 말마디와 더불어 “끊임없이” “한결같이”란 두말마디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영성 훈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어제 신문 칼럼 끝대목의 경고도 생각납니다.
“아직 인류가 살 곳은 지구뿐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명작만화 <슬램덩크>에서 북산고의 안감독님은 말씀하셨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기후위기 막기를 포기하는 순간,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인류의 삶은 끝난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무서운 말마디, 부단한 훈련의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영성생활은 끝난다. 그러니 죽을때까지 멈춰서는 안되는 영성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삶이 얼마 안남았다는 자각에서 강론중 요즘 많이 강조하는 제목중 하나가 “여정”입니다. 또 하나는 “삶의 중심”입니다. 이번 세계 젊은이의 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석했던 이집트 청년의 인터뷰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나는 중심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중심입니다. ‘내가 언제든 하느님 가까이 있음을 발견할 때, 나는 참으로 잘 살게 됩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보다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으면 혼란과 복잡의 무질서의 어둠에서, 늪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이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부제로는 “기도와 회개, 믿음과 겸손, 자비와 지혜” 그리고 “선택, 훈련, 습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하느님 중심에 가장 가까이 살았던 분이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요, 아예 하느님 중심과 일치되어 사셨던 분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요,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12-13세기 스페인 출신의 성 도미니코 사제 역시 주님과 참 가까웠던 성인입니다. 알비파, 발두스파, 카타리파 이단의 영적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에 교회의 필요에 응답해 탁발 수도회인 성 도미니코 설교자회를 설립한 분입니다. 청빈한 삶과 말씀의 연구와 설교로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 수도회 회원들의 주업무였습니다.
1221년 8월 6일 블로나의 수도원에서 치열했던 만 51세 생애를 마치면서 제자들에게 한 유언은 “서로서로 형제들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였습니다. 세상을 떠날 무렵 유럽에는 60여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500명의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234년 사후 13년만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입니다. 또 성 도미니꼬와 도미니꼬 수도회는 묵주기도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주님을 닮아 겸손과 믿음, 자비와 지혜의 참삶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정말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인데 모세가 바로 그러합니다. 하느님은 잠시 질투의 무지에 빠져 탈선해 있던 미르얌과 아론을 꾸짖으며 모세를 적극 두둔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이어 미르얌에게 벌로 악성 피부병을 주시자 아론은 즉시 회개와 더불어 모세에게 기도를 청합니다. 기도와 회개를 잊어 무지의 어둠에 빠졌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아론과 미르얌입니다. “하느님, 제발 미르얌을 고쳐 주십시오.” 하느님 중심에 늘 가까이 살았던 모세에게 기도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하느님 없는 모세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숨쉬며 살아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있음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결과가 믿음과 겸손이요, 자비와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끊임없이 하느님 중심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믿음과 겸손, 자비와 지혜의 한결같은 훈련으로 이들 덕목을 습관화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후에 신속한 주님의 처신에서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공성이불거, 노자의 말처럼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군중을 돌려 보내고 제자들은 떠나 보내고 자신은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께 관상과 활동의 리듬은 너무나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낮의 활동후에는 밤의 고독과 침묵의 자리에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친교로 자신을 충전시키는 일이 우선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일치로 영안이 활짝 열리니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곤궁중에 있는 제자들을 보자 즉시 개입합니다. 호수위를 걸으니 말그대로 하느님과 일치된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과 제자들과의 문답이 여전히 큰 가르침이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는 바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늘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아야 말씀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하느님의 현현인 예수님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에 주님 향한 눈길을 잃자 즉시 물에 빠져들면서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말마디들도 좋은 묵상감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부족하기로는 민수기의 미르얌과 흡사한 베드로입니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자 비로소 내외적 평화와 안정입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믿음을 고백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애초부터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할 믿음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이런 기도와 회개, 믿음의 여정을 통해 크게 깨닫고 배웠을 믿음과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일정이 참 분주합니다.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자 모든 병자들이 그분께 다가왔고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합니다. 새삼 외딴곳에서 날마다 밤마다 전존재를 아버지의 영으로 충전시킴이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됐음을 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한(whole)” 구원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즉 기도와 회개, 겸손과 믿음, 자비와 지혜의 삶을, 그리고 온전한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8/9(수)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풍랑의 시간에도, 박해의 칼날에도 주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나안 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2.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김찬선 신부)
3.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알비파, 발두스파, 카타리파 이단의 영적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에 교회의 필요에 응답해 탁발 수도회인 성 도미니코 설교자회를 설립한 분입니다. 청빈한 삶과 말씀의 연구와 설교로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 수도회 회원들의 주업무였습니다.
1221년 8월 6일 블로나의 수도원에서 치열했던 만 51세 생애를 마치면서 제자들에게 한 유언은 “서로서로 형제들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였습니다. 세상을 떠날 무렵 유럽에는 60여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500명의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234년 사후 13년만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입니다. 또 성 도미니꼬와 도미니꼬 수도회는 묵주기도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이수철 신부)
[8/9(수)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228일 기도]
오늘 복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예수께서 딸의 치유를 선언하며, 구원해주십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멘.
- 2023년 8월9일(목)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