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8월 17일 목요일[(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17일 목요일[(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본기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3,7-10ㄱㄴㄹ.11.13-17
그 무렵 7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
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8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 자,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13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4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천막에서 떠날 때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 앞에 섰다.
15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아주 멀리 차르탄 곁에 있는 성읍 아담에 둑이 생겨,
아라바 바다, 곧 ‘소금 바다’로 내려가던 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예리코 맞은쪽으로 건너갔다.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알렐루야.
○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곱 집안이 낯선 말 하는 민족을 떠날 때,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나라가 되었네. ◎
○ 바다가 보고 달아났으며, 요르단이 뒤로 돌아섰네. 산들은 숫양처럼 뛰어다니고, 언덕들은 어린양처럼 뛰놀았네. ◎
○ 바다야, 너 어찌 달아나느냐? 요르단아, 어찌 뒤로 돌아서느냐? 산들아, 어찌 숫양처럼 뛰어다니고, 언덕들아, 어찌 어린양처럼 뛰노느냐?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자비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교회가 드리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후배 신부님이 안식년을 얻어서 신문사에서 잠시 지내고 있습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후배 신부님에게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홈 디퍼’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조립하는데 아주 잘하였습니다. 저는 잘 보지 못하는 것을 유심히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브루클린 미사에 함께 하면서 강론을 부탁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더니 좋은 강론으로 교우들에게 영적인 선물을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공자가 이야기한 지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이 있을지라도 덕을 베푼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이에 따라 갖추어야 할 지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15살이 되면 학문에 뜻을 두고, 30살이 되면 본인의 뜻을 세우고, 40살이 되면 삶에 부덕함이 없고, 50살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고, 60살이 되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70살이 되면 어떤 행동을 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올해 60이 되었으니 좀 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지혜를 청하고 싶었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만 우리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요르단 강’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궤’를 앞세워 장애물인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지내던 때를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굶주림과 목마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붙이를 모아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친 광야를 건널 수 있는 이정표였습니다. 십계명은 두려움이라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 중에 90%는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저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욕심과 교만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재물을 쌓아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보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헌금보다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분노와 원망입니다. 분노와 원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용서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8,21-19,1: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일흔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다는 것이다.
일흔일곱 번이란 루카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
복음에서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는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16.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방법과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교정방법과 절차를 네 단계로 제시해 줍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여,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이를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규칙> 23장~30장에서 이렇게 다룹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마태 18,16-17), 그의 장로들이 한두 번 그를 남몰래 훈계할 것이다. 그래도 고치지 않거든 모든 이들 앞에서 공적으로 책벌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서도 고치지 않거든, 파문이 어떤 벌인지를 아는 경우에는 파문에 처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둔한 자일 경우에는 육체의 벌에 처할 것이다.”(수도규칙 23,2-5)
<복음>이나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다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곧 예수님과 베네딕도 성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과 절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 때문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한 형제를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하여 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못한 형제를 위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마태 18,19 참조). 또한 성 베네딕도도 [수도규칙]에서 바로 그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올바로 ‘보는 눈(觀)’
-하느님 중심의 올바른 공동체관(共同體觀)-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적반하장, 후안무치의 괴물같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요즘 시국을 대하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요 참으로 보는 눈의 중요성을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요즘 나라 지도자들은 얼마나 공부하는지, 책을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식, 무지가 죄입니다. 정말 자기를 아는 사람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제일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것이 나를 아는 일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정말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겸손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독서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경청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무식의 어둠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부단한 공부와 독서와 경청의 훈련과 습관은 필수입니다. 도대체 그 많은 지식에 비상한 두뇌를 지녔어도 무식하고 무지한, 지혜의 눈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올바로 보는 눈을 지니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교육의 궁극 목적도 이런 올바른 눈을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눈없는, 눈먼이들이 대부분같습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탐욕, 분노, 질투, 완고함등 무지는 얼마나 다양한지요! 그러니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혜안慧眼의 맑은 눈으로 본질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셋을 지녀야 합니다. 철학과 실력,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역사의식, 사회의식, 공동체의식, 시대정신, 열린 지평을 지녀야 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에 참나를 아는 공부, 그리고 역사 공부, 현실 공부입니다. 칼 바르트 신학자는 성서를 보듯 신문을 보고, 신문을 보듯 성서를 보라 했습니다. 이래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확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볼 수 있는 역사관, 종말관, 죽음관, 시국관, 국가관, 인생관, 철학관, 세계관, 종교관, 시간관, 구원관, 정치관, 공동체관, 가치관 정말 끝이 없습니다. 모 정치 지도자의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 기본사회(基本社會)의 복음적 가치관에 공감하고 감탄했습니다. 이래서 올바른, 양심적인, 통찰력을 지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그대로 철학과 실력, 용기를 지닌 전문가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중심의 올바른 공동체관에 대한 묵상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교회공동체는 크든 작든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중심인 지도자는 중심이신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비단 공동체의 책임자인 지도자뿐 아니라 모두가 지도자적인 정신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모임인 코이노니아 자매회, 책임자를 돌아가면서 한다는 말에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의 작은 공동체라면 공동체 성원에게는 참 좋은 체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올바른 공동체관을 배우게 됩니다.
요즘 계속됐던 제1독서 신명기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참 멋진 지도자입니다. 늘 공동체의 중심인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눴고 맡은 책임에 얼마나 간고분투의 노력을 다했는지 그 삶자체가 감동이요 감탄이요 감격입니다. 신명기 33장은 세상을 떠나기전 ‘모세의 축복’이요, 마지막 34장은 참으로 장엄하고 감동적인 모세의 죽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참 냉철합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까지로 모세의 역할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죽음은 얼마나 중요한지, 참 멋지고 아름다운 지도자 모세입니다. 참 멋진 지도자의 귀감으로 모세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영원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공동체에 미치는 좋은 영향은 참으로 큽니다. 모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묘사가 깊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모세는 죽을 때에 백스무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찼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릴레이 경주에서처럼 평화적이고 자연스런 여호수아에로의 바톤 텃치의 권력 교체요, 모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함은 흔적없이, 자취없이 사라짐으로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추호도 부담을 주지 않게 하려는 하느님의 심모원려임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모세는 맑은 눈, 맑은 정신으로 선종했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 지혜의 영도 선사했으니 정말 완벽한 떠남입니다. 참으로 좋은 추억을 가득 남기고 떠난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기에 오히려 죽어서도 영원히 살아 있는 듯 지금까지 좋은 영향을 미치며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신명기의 모세에 이어 주님으로부터 공동체관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배웁니다. 공동체내에서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한 섬세한 교정과정을 통해 목적은 벌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에 있음을 봅니다. 점차적인 절차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복귀하도록 최선을 다한 후 비로소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이라는 것입니다. 예전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장상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이에 대해서는 분명한 사실(fact)에 근거한 교정이 필요하며 이것이야말로 형제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교정의 목적은 치유와 화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땅의 공동체내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로부터의 용서가, 공동체와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땅의 공동체의 현실에 따라 하늘도 좌우된다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매인 것을 푸는 고백성사의 은총입니다. 땅이 하늘입니다. 땅의 공동체내에서 막히면 하늘에서도 막히고, 땅의 공동체내에서 풀려 통하면 하늘에서도 풀려 통한다는 것입니다. ‘아래로부터 위로’이지 이 반대는 절대 없습니다. 물론 아래로부터 푸는 일에도 은총은 절대적입니다. 오래전 이런 진리를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이란 시로 표현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치유와 화해로 땅의 공동체와 하늘이 하나로 통했을 때,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고귀한 품위의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다음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을 모신 공동체 기도의 위력입니다. 참으로 공동체 형성에, 올바른 공동체관에 마음을 하나로 모은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와 둘의 차이가 천지 차이입니다. 둘이나 셋이라도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에 땅에서 매인 것이 풀림과 동시에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땅의 공동체와 하늘이 하나로 통하는 하늘 나라 공동체 형성에, 또 올바른 공동체관의 눈을 지니는데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8/17(목)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와 둘의 차이가 천지 차이입니다. 둘이나 셋이라도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에 땅에서 매인 것이 풀림과 동시에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수철 신부)
[8/17(목)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 236일 기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17일(목) 3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