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8월 18일 금요일[(녹) 연중 제19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18일 금요일[(녹) 연중 제19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본기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24,1-13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3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4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5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7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8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
○ 신들의 하느님을 찬송하여라. ◎
○ 주인들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
○ 사막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셨네. ◎
○ 힘센 임금들을 내리치셨네. ◎
○ 뛰어난 임금들을 죽이셨네. ◎
○ 그들 땅을 재산으로 물려주셨네. ◎
○ 당신 종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셨네. ◎
○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자비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교회가 드리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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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저희 세대는 ‘이문세’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는 “광화문 연가, 소녀, 그녀의 웃음소리뿐, 휘파람, 사랑이 지나가면, 옛사랑,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오늘하루’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밥 한 그릇 시켜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 창가에 비추는 건 나를 보는 내 모습, 울컥하며 터질 듯한 어떤 그리움, 그리운 건 다 내 잘못이야, 잊혀질 줄 알았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다시날걸 그땐 알 수 없었어.” 저는 가사 내용 중에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저녁 식사 전에 성당에 모여서 늘 하던 것이 ‘양심성찰’이었습니다. 양심성찰을 하면서 ‘오늘하루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받는데 익숙하다 보니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내 몸 아픈 것은 신경 쓰면서 이웃이 아파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나의 십자가를 남에게 맡기는 이기적인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사목정보’라는 잡지에서 ‘오늘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사제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신부님의 모습을 거울 속에 비추듯이 바라보았던 교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당 신축을 하면서 사제관이 없어서 편안한 아파트를 얻어드리려고 했는데 신부님은 굳이 상가 2층에 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매일 아침 상가 마당을 청소하였다고 합니다. 상가 주인이 무척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젊은이들에게는 유쾌하였고, 어른들에게는 공손하였고, 성가를 부를 때면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고 합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신부님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구두가 낡아서 비가 오면 신발에 물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우들이 주는 옷, 구두, 음식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외투는 20년은 족히 넘어보였다고 합니다. 얼굴이 검게 그을려서 오셨기에 좋은 곳으로 휴가를 떠난 줄 알았는데 시골 본가에 가셔서 종일 밭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따뜻한 마음의 사제가 임기가 되어서 다른 본당으로 떠날 때, 본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사제로서 자랑스러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2. 연중 제 19주간 금요일 - 하느님의 섭리 / 김찬선 신부님 강론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제가 요즘 감사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젊은 형제들이 저희 공동체에 와 같이 살아주는 것에 대해서.
저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저와 살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이주민 어머니와 아이들의 합동 연수회가 있었는데
그 피정 집의 고양이를 보자마자 아이들이 일제히 고양이한테
달려드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단순한 애정이 아닌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애정이 사람이 아니라 개에게 더 향하고,
혼족, 혼밥, 혼술이 대세이기에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요즘 수도원에
형제들이 들어온 것만도 고마운데 저와 같이 살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더욱이 저는 저의 수도원에서 어느 시어머니보다 어렵고 살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런데도 저와 같은 사람과 살아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고마움이고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라면
신앙적인 고마움과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도 제게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저희에게 보내주셨다고 믿는 프란치스칸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형제들을 내게 보내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매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형제들을 보내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이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다 해주셨다는 식입니다.
주님께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
주님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신앙의 눈으로, 성사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독서 여호수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선조들을 통한 주님의 섭리입니다.
조상들이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라 섭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란 우선 무엇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그 성취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취도 아니고 자연의 섭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섭리의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17.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설교(마태 18장)에서 먼저 공동체에서의 작은 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 하셨습니다. 이어서 공동체에서의 형제애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죄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교정 5단계 교정”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왜 용서를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아니 죄를 지었노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우리를 용서해주신 먼저 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구원해달라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도 끝까지,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당신께서는 똑같은 죄를 자꾸만 반복해서 짓고 또 짓는 우리를, 여전히 끝없이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끝없이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저를 또한 끝없이 용서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입은 바로 그 사랑, 그 용서, 그 자비로 우리도 끝없이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그러나 자비를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자비로운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자비를 입은 그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하는 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용서받은 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빚을 탕감해준 주인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마태 18,27)과 탕감 받은 자가 지녀야 하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빚진 사람이 진 부채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채를 진 사람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해타산의 계산이 아니라, 사람의 존귀함을 들여다보는 마음입니다. 곧 내가 받은 상처를 헤아려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상처를 헤아려보는 마음입니다.
“감사히 여기는 마음”은 죄를 지은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곧 우리를 향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순전한 “선의”요, “자비”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의”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에게도 역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았음에 대해 “감사히 여기는 마음”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의 표현으로 다른 이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이제는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이제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고,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탈출(Exodus)의 여정
-날마다 새로운 출발-
"산처럼, 물처럼"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외관상으로는 고립된 섬처럼 보이는 요셉 수도원이지만 온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밤에 일어나 게시판을 읽어보면서 새삼 깨달은 진리입니다. 그중에는 잊지말고 기억해야할 사람 이름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알리는 것은 원장의 소임입니다.
1) 2023년 8월13일, 우리 공동체의 선배 안드리아스 헨첼 수사님이 93세 복된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독일, 쾨닉스 뮌스터 수도원.
2) 2023년 8월11일, 필립신부가 은단다 선교병원에서 수도자이자 선교사로 길고 풍요로운 삶을 살다가 92세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은단다 수도원
3) 2023년 8월15일, 전 수도원장인 안셀름 젤러 퇴임 아빠스께서 향년 85세로 선종하셨습니다.-오스트리아, 피히트 수도원.
이분은 한국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분이며 2004년 총회 방문시 참 따뜻한 미소로 친절히 환대해 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이형우 시몬 아빠스님(2016년 선종)과 함께 머물렀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4)쿠바 선교 체험을 마치고 김안토니오 수사가 8월20일 귀국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세월중에 그립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갑니다. 한때 번성했던 절들의 폐사지, 절터를 방문할 때의 슬픔을 사라져가는 수도원들을 볼 때도 느낍니다.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벗어날 수 없는 세상 현실입니다. 메멘토 모리, 결코 한시도 잊지 말아야할 죽음입니다. 이밖에도 수도원을 잠시 방문하여 머물 분들, 그리고 고성 올리베타노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에 참여할 수도형제들의 이름들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섬같은 수도원으로 보여도 내적으로는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참으로 역동적인 환대의 수도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더불어(together) 여정중의 수도공동체임을, 또 정주와 환대의 영성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두분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한분은 30년 이상 수도원 대축일시, 머리가 까맣던 젊은 시절부터 수도원 꽃꽂이를 해주신 분으로 지금을 백발의 할머니가 된 분이요, 이분과 40년이상 우정을 지속해온 자매 두분이 함께 면담성사차 방문했습니다. 두분의 한결같은 신앙과 우정에 감동했고 이 자체로 천국입장의 구원이라 격찬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우리 모두 더불어 여정임을 깨어 기억하며 살 것을 촉구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영성생활은 늘 새롭게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깨어 살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반복하여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삶은 탈출의 여정입니다. 혼자 또는 더불어 탈출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모세오경은 끝나고 오늘부터는 새로운 인물,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등장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이름 여호수아는 그가 일생을 통해서 보여주게 될 일들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즉 이 이름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언입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된 땅을 정복했다는 것은 정치적 사건이기보다는 영적 해방으로서, 그 참 의미가 이름에서 드러납니다. 바로 이 이름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됩니다. 끊임없이,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구원 활동중인 예수님입니다.
탈출기의 홍해를 건너던 모세를 연상시키듯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에 진입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참으로 모세의 이집트 탈출의 역사를 잊지 말고 생생히 기억하라고 주님은 여호수아를 등장시켜 요르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끊임없는, 하루하루 탈출의 여정임을, 늘 새로운 출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생생한 9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잊지 못할 추억은 날마다 떠날 때의 기쁨이 제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면 다음날 새벽 일어나 떠날 때의 설레는 기쁨, 말그대로 떠남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루를 넘기면 마냥 지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삶은 떠남의 여정, 탈출의 여정임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고 지금도 언제나 지금 여기서의 정주의 삶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일 탈출의 여정, 떠남의 여정을 삽니다.
이런면에서, 요즘 산책시 자주 만나는 맑게 흐르는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 불암산 계곡물은 저에게 참 좋은 최고의 스승이 됩니다. 이래서 제가 좌우명 삼아 자주 외는 짧은 자작 고백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산속의 강”-
이런 면에서 저의 호는 강산江山에 천산天山 둘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기억과 관련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 용서하라는 것은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살기위해 매일 밥먹고 매순간 숨쉬듯이 영혼이 살기위해 밥먹듯이, 숨쉬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무한히 용서받고 있기에 이런 용서의 은총을 기억할 때 가능한 무한한 용서입니다. 용서도 훈련입니다. 정말 잊지 않기 위해 부단한 용서의 선택에 훈련, 습관화입니다.
바로 이를 잊었기에 무자비한 종의 비유입니다.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참으로 무한한 용서가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함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망각은 형제입니다. 만 탈렌트 사랑의 빚진 사실을 까맣게 망각한 무지한 무자비한 종입니다.
바로 탐욕에 눈멀었을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참 좋은 예입니다. 이런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진 것을 잊어 몰랐기에 백 데나리온 빚진 이에 대해 이처럼 가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무자비한 종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영적 삶은 잊지 않고 기억하기위한 끊임없는 노력이요 투쟁입니다. 하느님 용서의 체험에 부단한 용서입니다. 이런 기억과 용서의 사람이 위대한 상식인입니다. 무한한 용서의 사람,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의 말이 생각납니다.
“결국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상식인이며, 위대한 생각은 완전한 상식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자비와 용서, 기억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8/18(금)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조재형 신부)
2.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섭리의 훌륭한 도구들입니다.(김찬선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이제는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이제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고,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이수철 신부)
[8/18(금)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237일 기도]
인간도 자연도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이 섭리에 맡길 때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으로써...
섭리의 훌륭한 도구로 활동함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18일(금) 7시...수산나 -